“여기에 있는 것은 중용이 아니다/ 답보다 죽은 평화다 나태다 무위다.”

 

김수영이 4·19 직후 발표한 ‘중용에 대하여’(1960)의 한 대목이다. 당시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시인데, 진보에 대한 갈망을 중용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김수영이 유교 전통의 자산을 소중히 여겼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중용은 왜 진보와 평화의 원리일 수 있는가?

중용은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유가의 고유한 도(道)를 가리킨다. 가령 법가가 엄격한 법치의 도를, 도가가 무위자연의 도를 내세울 때 유가는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중도의 길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가의 도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다. 먼저 중용의 길을 준비하는 인도(人道)가 있다. 개인적 수양의 길인 인도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이 충분히 쌓일 때 중용의 길에 이른다. 그 다음 중용의 길로부터 도달하는 궁극이 있는데, 그것을 천도(天道)라 한다. 천도는 천지자연 전체를 통해 실현되는 조화의 원리다. 유가철학이 가리키는 중도는 인도를 완성하고 천도에 동참하는 길이다.

 

“중용은 답보나 미온적 태도의 반대말”

천도는 언제나 조화(평화)의 원리를 의미한다. 노자의 『도덕경』(16)은 천도에 의한 조화를 만물병작(萬物竝作)이라 했다. 유가의 『중용』(30:3)에서도 병육(竝育), 병행(竝行)이란 말이 사용된다. “만물이 함께 자라면서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작은 도들이 병행해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萬物竝育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이 천도에 따른 조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장의 조화와는 달리 유가의 조화는 중용에 의해 제한된다. 거꾸로 중용은 조화에 의해 구속된다. 중(中)과 화(和)가 서로를 요청한다는 점에 유가 형이상학의 특징이 있다.

중용의 용(庸)은 사용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때 중(中)은 중간이 된다. 중간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조건 온건한 것을 취한다는 것이 아니다. 산술적이고 밋밋한 평균만을 취한다면 아무런 조화가 일어날 수 없다. 조화란 정태적인 안정성(“답보” “죽은 평화”)이 아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 정돈되는 가운데 역동적이고 열린 전체를 이룰 때를 조화라 한다. 중용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조화를 위한 중용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특이한 것이 전체의 조화를 살리는 중용이 된다. 이는 멋진 화음(和音)을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소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논어』(13:21)에서 공자는 “중도를 가는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기필코 광자와 견자를 택할 것이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라고 했다. 이때 광자(狂者)는 열광적인 사람이고 견자(狷者)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분열적 인간과 편집적 인간으로 옮길 수도 있다. 중용은 그런 두 가지 광기가 상호 정돈되어 이루는 역동적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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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역사에서 미래 움트는 논리 간파

 

김수영은 유가의 도를 염두에 둔 듯한 작품을 몇 편 남겼다. 가장 좋은 사례는 ‘더러운 향로’(1954)다. 향로는 유교 전통(제례문화)의 상징이다. 시인은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 옆을 지나며 도취에 빠진다.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을 취하여 보는/ 이 더러운 길.”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낡고 썩어서 수명을 다했지만, 썩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거대한 뿌리’(1964)에 나오는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는 절창은 이런 썩기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썩기의 논리라기보다 삶기의 논리다. 어떤 것을 푹 삶으면 원래의 형질들은 해체되고 거기에 없던 형질이 태어난다. 이런 삶기의 논리가 잘 드러나는 시가 ‘미역국’(1965)이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 준다 우리의 환희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 시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김수영이 이 시를 자신의 “실질적인 처녀작”(전집2, 226)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과 더불어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났다는 것인데, 아마 이 시기에 이르러 자신의 역사인식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시에서 미역국은 “구슬픈 조상”을 비유하고, 구슬픈 조상으로는 퇴계와 다산이 거명된다는 점이다.

 

“미역국에 뜬 기름이여 구슬픈 조상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 난 영감이면 (…) 이것이/ 환희인 것을 어떻게 하랴.”

한국인에게 미역국에 뜨는 기름은 출산을 기념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생명의 기름이다. 거기서 김수영은 파산한 역사에서 미래가 움트는 논리를 본다. 그 역사는 정확히 퇴계와 다산으로 대변되는 유교 문화의 역사다. 썩어문드러진 유교 전통을 버리지 말고 그냥 푹 삶아서 역사를 회생시킬 에너지를 얻어 보자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돌아보면 ‘더러운 향로’에 등장하던 “더러운 길”이 다름 아닌 유교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용에 대하여’에서 김수영은 유교의 길이 중용에 있음을 암시한다. 미래의 이념은 낡은 중용의 진리를 다시 삶아낼 때 들끓을 환희의 기름에 있다는 것이다.

  
“너도 나도 취하는 중용의 술잔”

중용이란 용어는 김수영의 다른 작품 ‘술과 어린 고양이’(1961)에도 등장한다.

“내가 내가 취하면/ 너도 너도 취하지/ 구름 구름 부풀듯이/ 기어오르는 파도가/ 제일 높은 사안(沙岸)에 닿으려고 싸우듯이/ 너도 나도 취하는 중용의 술잔.”

동서고금을 통해 술잔은 풍요한 조화의 상징이다. 서양정신의 역사를 그려낸 헤겔의 『정신현상학』(1806)은 실러의 시 ‘우정’을 인용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정신적 왕국의 술잔 위로는/ 무한의 거품이 끓어오르네.”

 

우정의 축배 속에서 절대정신(무한자)이 실현되는 장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한자가 유한자와 분리된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무한자는 유한자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 상호간의 갈등과 조화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어떤 거품이다. 이것은 공자의 중용을 설명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사실 중용의 용(庸)에는 일상적이라는 뜻도 있다. 이때 중(中)은 안쪽을 의미한다. 중용의 논리는 진리를 평범한 일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찾지 말라 한다. 위대한 진리일수록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진부한 것을 숭고한 것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중용의 길이다. 이는 순간적인 것 속에 영원의 빛이 발하도록 만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중용을 시중(時中)이란 말로 옮겼다. 이때 시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진리는 시간 속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기준에 맞는다기보다 때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진리는 없다. 동일한 판단은 항구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때에 맞을 때, 다시 말해서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부응할 때만 참일 수 있다.

김수영이 말하는 중용의 술잔은 또한 『주역』(61)에 나오는 중부(中孚)의 술잔을 떠올리게 한다.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새끼가 화답한다. 나에게 좋은 술잔이 있으니 내가 그대와 함께 얽히노라(鳴鶴在陰其子和之, 我有好爵吾與爾靡之).”

새가 알을 가슴 깊숙이 품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중부란 말은 확고한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로 보이지 않아도 끼룩끼룩 화답하는 어미 새와 새끼 사이의 관계로 풀이된다. 중부의 술잔은 군주가 벼슬을 내릴 때 신하와 나누는 술잔이다. 새가 울음을 주고받는 것은 본능적인 사랑과 신뢰 때문이다. 반면 군주와 신하가 술잔을 주고받는 것은 대의(大義)를 두고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대의가 온전히 실현될 때를 두고 『주역』은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친다(信及豚魚也),” “믿음이 있기를 실로 당기는 것과 같다(有孚孿如)”고 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동물까지 믿음의 끈으로 묶여서 서로 화답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중용』에서는 자연(“어린 고양이”)까지 믿음에 취하여 광활한 응답의 연락망 속에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능력을 성(誠)이라 한다. 이것이 천지만물을 위대한 조화 속에 병육(竝育)하는 천도의 능력이다. 『중용』(25)은 여기서 사물 일반의 존재론적 기원을 찾는다.

“성은 사물의 처음이자 끝이다. 성이 없으면 어떠한 사물도 있을 수 없다(誠者物之終始, 無誠無物).”

성이 사물의 존재론적 기원인 것은 그것이 일으켜 세운 상호 감응의 연락망 안에서야 비로소 사물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은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을 형성하는 이유다(誠者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중용』(20)은 이런 성기(成己) 성물(成物)의 길을 다시 성스러움(聖)이라 일컫는다.

 

군자는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 위에 있어

유가적 의미의 성스러움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자연 전체에까지 믿음을 심어주는 환경 친화적인 창조의 경지다. 유가 철학이 환경 파괴와 더불어 자멸의 길을 가는 듯한 현대 문명에 던지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유가적 주체를 대변하는 군자는 성스러움으로 가는 중용의 길 위에 있다. 『중용』(20)은 그 여정을 성(誠)과 구별하여 성지(誠之)라 했다. 하늘을 닮아 성스러워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중용의 길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이 사랑을 정의하는 공식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그런 성지의 길을 현대적으로 번역하는 위치에 있다. 먼 곳(천명)과의 교감 속에 역사적 현실의 경계로 이행하는 것, 그 경계를 넘어 성스러운 창조의 논리를 긍정하는 것, 그것이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다. 김수영의 많은 작품은 그런 중용의 몸부림을 노래한다. ‘아픈 몸이’(1961) 같은 시가 좋은 사례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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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4대학 (Paris-Sorbonne) 철학박사. 근현대프랑스철학 전 공.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역임. 한국연구재단 책 임전문위원, 네이버 열린연단 자문위원. 최근의 저 서로는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등이 있다.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