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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110년前 보부상 조직, 양반과 日상인까지 받아들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15. 22:45

"110년前 보부상 조직, 양반과 日상인까지 받아들여"

입력 : 2016.01.14 03:00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영준 교수팀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출간
충남 예산·당진의 보부상 연구
"장돌뱅이조합, 외국 상인 참여… '지역 상인 연합'으로 확대 변모"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왼쪽)과 예덕상무사의 1886년 조직 명단 사진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왼쪽)과 예덕상무사의 1886년 조직 명단.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20세기 초, '장돌뱅이'로 불리는 보부상(褓負商) 조직에 중국·일본 상인도 가입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조영준·심재우·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교수와 양선아 한신대 연구원이 함께 펴낸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한중연 출판부)을 통해 밝혀진 연구 결과다. 이들은 충남 예산·당진 일대의 보부상 조직인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의 조직원 명단과 규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해설을 붙였다. 예덕상무사는 1851년부터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까지 110여 건의 자료를 남겼다.

이번에 출간된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에서 주목을 끄는 건 1906~1907년의 조직원 명단이다. 이 명단에는 중국 상인인 화상(華商) 왕문괴(王文魁)와 일본인 상인 상야위길(上野爲吉)이 예덕상무사 간부에 해당하는 부접장(副接長)을 맡은 것으로 나와 있다. 외국 상인과 한국 상인을 갈등 관계로만 보기 쉽지만, 협력과 공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조영준 교수는 "외국 상인까지 참여하면서 조직 성격도 애초의 '장돌뱅이 동업조합(同業組合)'에서 '지역 상인 연합'이나 '지역 공동체'로 확대 변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 ‘장사의 신’에서 주인공 천봉삼 역을 연기하는 장혁. 천봉삼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지만 보부상이 되어 거상(巨商)으로 성공을 거둔다.  

 

드라마 ‘장사의 신’에서 주인공 천봉삼 역을 연기하는 장혁. 천봉삼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지만 보부상이 되어 거상(巨商)으로 성공을 거둔다. /KBS 제공

 

1860년대 이후에는 양반과 승려들도 보부상 조직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평안도 용천군수를 지낸 정준용(鄭俊鎔)은 1905~1906년 예덕상무사의 리더인 영위(領位)를 맡았다.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전직 관리들도 참여했다. 1889~1890년 명단에는 충남 당진 영탑사(靈塔寺)의 승려도 있다. 1898년 서울에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가 결성됐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 중앙·지방 권력이 상인을 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포섭에 나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조 교수는 "순수한 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상업을 명분으로 내걸면서 동시에 정치를 포함해 다양한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예덕상무사의 규율 정리 표

예덕상무사는 6·25 전쟁 직후인 1954년에도 50여 명의 조직원을 확보했을 만큼 탄탄하게 조직을 유지했다. 보부상 조직이 일제 시기와 광복, 전쟁을 거치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상호 부조와 자율 규제 등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1850~1860년대 조직 규율에는 '시장에서 억지로 판매한 자, 볼기 30대' '동료 에게 사납고 고약하게 행동한 자, 볼기 30대' '문상을 하지 않은 자, 볼기 15대, 벌금 5전'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1883년 규율에는 다수결에 따른 접장 선출이라는 '민주적 선거 절차'도 포함되어 있다.

조 교수는 "보부상이 1970~1980년대까지 5일장 등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조직 규율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