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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주의: 니체의 칸트비판[顚倒된 칸트주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7. 21:46

박찬일의 ‘인문’ 에세이 1 ─ 니체와 칸트

 

관점주의: 니체의 칸트비판[顚倒된 칸트주의]

박찬일

① [상징시대의 언어가 주사와 빈사가 일치하는 ‘물자체’의 시대였다. 이른바 시니피앙의 시대로서 善惡의 분별이 없는 시대였다] 벤야민이 잃어버린 상징시대의 대응으로서 알레고리구조에 의한 구제형이상학을 펼쳤고, 니체가 세계상실에 대한 복원으로서, 즉 ‘새로운 가치창조의 요구’로서, 관점주의를 말한다. 관점주의들이 상실의 시대를 ‘살만한 것’으로 하게 하는 힘을 준다.

 

─ 박찬일, 「사티로스합창단─구원과 치료의 형이상학」, 〈현대시학〉, 2013. 10, 239.

 

② ‘세계가치’가 우리의 해석에 놓인 점(─ 단순한 인간적 해석 이외 다른 해석들도 아마 어디선가 가능한 점 ─) 지금까지 해석들이 관점주의적 평가들로서 우리가 인생에서, 즉 힘에의 의지 속에서, 힘의 증대를 보존해온 점, 인간의 모든 향상이 편협한 해석의 극복을 수반하는 점, 힘의 강화와 힘의 확장이 새로운 관점들을 열고, 새로운 지평들을 믿게 하는 점 ─ 이것이 내 저작을 관류한다. 우리와 관계하는 세계는 거짓이고, 사실상황이 아니다. [수척한] 관찰들의 총합으로 말미암은 하나의 案出이고 마무름이다; 세계는 ‘흘러가는 강 속에’ 있다. 생성되는 것으로서, 늘 새롭게 延期되는 환영 같은 것으로서, 결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럴 것이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니체, 『유고, 1885 가을-1887 가을』, Ⅷ-1, 112.

 

③ 니체의 『비극의 탄생』(1872)이 칸트-쇼펜하우어-바그너에 많은 빚을 진다. 니체가 “독일음악과 독일철학의 [행복한] 일치”(『비극의 탄생』, Ⅲ-1, 124)라고까지 했다. 물론 칸트-쇼펜하우어-바그너를 나중에 다 부인한다. 칸트의 선천적-제한적 감성직관론, 선천적-제한적 오성개념론이 영향을 끼쳤고,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객관적 의지의 발현인 ‘이념으로서 예술관-음악관’이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처음 접한 것이 1865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886, 서문으로 덧붙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칸트철학의 순수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기존의 (기독교)형이상학에 대한 유비로 보고 칸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쇼펜하우어의 비극적 세계인식이 “삶의 부인에 대한 의지”로 귀결된 점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한 지지를 유보-철회했다. “삶의 의지에 대한 부인”(『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 70.장)과 ‘삶의 부인에 대한 의지’가 함의하는 것이 같다. [삶은 늘 삶의 의지가 부축 한다] 문제는, 삶의 부인이든, 의지의 부인이든, 이것이 “체념”(『비극의 탄생』, 1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 68.장)-“금욕”(『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 70.장)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 점이다. ‘삶의 의지에 대한 부인’-금욕 역시 (기독교)형이상학의 유비이다. 니체가 ‘몰락에의 의지’를 말했을 때 이것은 기독교형이상학과 다른 것으로,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충만함’의 표현이다. 몰락에의 의지는 ‘삶에의 의지의 고양’의 다른 말이다. [1888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와 『니체 대 바그너』를 내놓았다] 바그너의 음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 등)이 1872의 『비극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당대의 바그너에서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 비극의 再탄생을 감지했다. 『비극의 탄생』 20.장에서 “디오니소스적 삶 […] 과 비극의 부활”(128)이라고 할 때, 21.장에서 “음악적 비극”(134)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바그너음악극을 지칭한 것이다. 바그너에 대한 지지 역시 철회됐다. [1886 개정판에서 초판본에 붙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에 부치는 서문」을 빼고,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서문을 덧붙였다] 바그너오페라에서 디오니소스적 합창의 역할이 축소되었고(바이로이트 바그너축제에서 합창은 ‘현대적’ 오케스트라로 점차 대체돼갔다), 바그너에 대한 거부는 무엇보다도 바그너오페라 「파르지팔」(1882)의 기독교형이상학 경도 때문이었다.

 

─ 박찬일, 「아티카비극의 몰락─니체형이상학의 탄생」, 〈예술가〉, 2012 가을, 298-299.

 

④ 모든 인간이 눈 대신 녹색 안경을 가질 때, 그 녹색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들을 녹색으로 판단해야만 할 것이오. 인간의 눈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아니면 사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눈이 가진 어떤 것을 사물들에게 부가하는지, 결코 결정할 수 없을 것이오 […]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 아니면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결정 내릴 수 없다 이 말이오.

 

─ 클라이스트, 약혼녀 쳉에Wilhelmine von Zenge에게 보낸 편지(1801. 3.)에서.

 

⑤ 철학이 모든 선천적 인식의 가능성-원칙-범위를 규정하는 하나의 學이 필요하다 […] 감성계를 넘어서는, 거기에서 경험이 아무런 단서나 修訂本을 줄 수 없는, 바로 이러한 인식들을 향해 [우리] 이성연구가 놓인다. 이성연구를 그 중요도에 있어서 훨씬 탁월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최종의도에 있어서 훨씬 숭고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적 의미의 그 오성Verstand이 현상들의 영역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말이다. […] 순수이성 자체의 이 불가피한 과제들이 神-자유-불멸성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A3, B7) […] 오성은 자연에 관해 오로지 , ‘무엇이 거기 있는가’, 혹은 있었는가, 혹은 있을 것인가, 이런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A547, B575)

 

선천적a priori 인식들이 어느 정도 범위-효용 및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B7, A4)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 ‘순수이성비판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한 특수한 학문의 이념이 출현한다. 그럴 것이 이성이 선천적 인식의 원칙들을 손에 쥐어주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reine Vernunft은 어떤 것을 오로지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원칙들을 含有한 그 이성이다 […] 순수이성을 순전히 평가하는 하나의 학문을, 그러니까 순수이성의 발원지와 한계점을 순전히 평가하는 하나의 학문을, 순수이성 체계를 위한 입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한 학문은 순수이성의 독트린Doktrin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비판Kritik으로만 명명돼야 할 것이고, 그것이 소용되는 바는 ‘思辨[性]Spekulation을 참작해서’ 실제로는 단지 소극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성의 확장에 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의 해명에 쓰게 될 것이고, 이성을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다. 이것으로 벌써 매우 많은 것을 얻은 것이다.(B24-25) [강조는 필자]

 

⑥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주부에 술부가 이미 포함된 것으로 분석명제-분석판단[해명판단]이다. ‘처녀가 애를 뱄다’는 주부에 술부가 반드시 포함되지 않으므로, 지식을 제공하는 차원이므로, 종합명제-종합판단[확장판단]이다.(『순수이성비판』, B10-11 참조); 문제는 ‘처녀가 애를 뱄다’가 경험에 의한 종합판단이라는 점이다. 경험에 의하지 않는, 즉 “‘선천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B19),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중요한 과제”(B19) 중의 하나이다. 칸트는 이를테면 ‘7+5=12’를 선천적 종합판단에 依한 것으로 본다. 5에 감성직관과 오성개념화가 작용했고, 7에 감성직관과 오성개념화가 작용했고, +에 감성직관과 오성개념화가 작용해서 12라는 인식, 즉 선천적 종합판단에 의한 선천적 종합지식이 나왔다. [7에 12가 담지되지 않았고, 5에 12가 담지되지 않았다] [“7이 5에 부가되어야 하는 것을 나는 7+5의 合의 개념에서 생각하기는 했으나, 이 合이 숫자 12와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산술적 명제는 그러므로 恒時 종합적이다; 이것은 비교적 큰 숫자들을 取할 때, 더욱 분명하게 이해된다”(B16)] 칸트에 의할 때, 여기에 경험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 형식이 작용했다. 공간과 시간이 [감성]직관형식으로 사용됐고, 인과성이 크게 대변하는 범주형식이 오성개념화에 사용됐다. 칸트는 경험에 依하지 않고 보편성과 필연성을 감당하는 인식을 학문의 조건으로 본다. 이것을 자연과학과 수학에서 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질량보존의 법칙’(“‘물체세계의 모든 변화에서 물질의 양이 변화하지 않는다’”)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운동의 모든 전달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恒時 서로 동일해야 한다’”)이 선천적 종합판단에 의한 선천적 종합지식이다.(B17 참조); 역시 “‘형이상학에’ […] ‘선천적 종합인식이 함유되어야 한다’”(B18) [강조는 필자]

 

⑦ 인과론은 ‘우주론적 神-증명’의 절대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본질 중의 본질로서 神’을 증명하는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어왔다. 스스로가 원인인, 움직여지지 않는(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그러나 최초의 움직임(플라톤-토마스), 그러니까 ‘움직여지지 않는 최초의 움직임erste unbewegte Bewegung으로서 神’을 최고존재자로 확보하게 했다. 플라톤형이상학 이후의 神증명은 인과론적 신증명이 대세로서 그 안에 존재론적 신증명과 목적론적 신증명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안셀무스-토마스-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완전성은 실존를 포함한다.’, 말하는 式이다. 인과론에 의한 神증명은 ‘무한한 후퇴’의 부정을 전제하는 점에서 명목론의 칼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한한 후퇴[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 사다리]는 ‘무한한 후퇴의 부인’을 포함한다. 무한한 후퇴는 최종원인을 상정한 ‘것으로서 개념’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후퇴의 부인은 플라톤의 이데아론, 혹은 무전제론[전제Hypothesis에서 전제로 올라가 무전제Anhypotheton까지 가는 것]에 잇대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가시화되었다. 무한한 후퇴regressus in infinitum는 [유비적] 존재자들을 ‘근본 없는 자식’으로서 설명 불가능하게 한다.(박찬일, 「형상과 디오니소스─전도된 플라톤주의」, 〈현대시학〉, 2013. 8, 233 참고)

 

 

⑧ 순수이성에 의한 인식은 선천적 형식에 의해 제한된다.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순수이성[사변이성]에 의한 영혼-세계-神들, 소위 종래의 형이상학적 諸이념 증명이 불가능하다. ─실질적 인식의 대상은 경험세계[현상계]에 국한된다. 물자체와 형이상학적 이념들은 비동질적 유비이다. ?순수이성비판? 끝 ‘초월적 방법론’이 순수사변이성에 이념의 지위를 부여(혹은, 순수사변이성이 스스로 이념이 되어), 일반적allgemein 도덕률에 부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이른바 ‘범주적 명령[정언명령]’의 선취이다. 순수사변이성이 變하여 실천이성이 될 것을 미리 알린다. “이성개념들, 즉 오로지 이념들”(A771, B799)로서, 神-세계-영혼들이 무시될 때, 이것이 보증하는 도덕원칙 또한 무시될 수밖에 없다. 하이네가 던진 한 마디: ‘칸트가 神을 앞문으로 쫓아내곤 뒷문으로 불러들였다.’

 

⑨ “순수이성의 철학이 [첫째] 모든 선천적 순수인식의 고려 下에 이성의 능력을 탐구하는 ‘예비학’(예비학습)으로서, 일컬어 ‘비판’으로 명명되거나, [둘째] 순수이성의 체계(학문), 모름지기 체계적 상호연관 下에 순수이성에서 비롯한 전체적(眞正하고 그럴 법해 보이는) 철학적 인식으로서, 일컬어 형이상학으로 명명된다.”(『순수이성비판』, A841, B869); “형이상학, 그러니까 자연형이상학 및 윤리형이상학이, 무엇보다 ‘예습으로서’(예비학적으로) 앞서나가는, 즉 자기자신의 날개로 날기를 감행하는 이성비판이, 오로지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B878, A850); 철학의 하위범주로 ‘예비학으로서 이성비판’과 형이상학을 말한다. [순수]이성비판이 먼저이고 형이상학 건축이 나중이다.

⑩ ‘순수이성의 규범’ 章에서 순수이성이 제공하는 원칙이 실천이성의 사용을 위한 원칙이다. 두 가지로서, 신의 현존과 불멸성이다. “그러니까 神, 그리고 내세의 삶은 순수이성이 부과하는 구속력으로부터, 동일한 이성 원칙에 의할 때, 분리될 수 없는 두 전제들이다.”(『순수이성비판』, A811, B839) [『순수이성비판』 마지막 ‘초월적 방법론’에서 이념으로서 ‘神’과 ‘내세의 삶’이 구제되는 진경이 펼쳐진다. 구제하는 것이 ‘이성[원칙]’이므로 이성원칙 역시 神-불멸성과 같은, ‘이념으로서 이성원칙’이다. 순수이성이 變하여 이념이성이 되었다] “윤리적 명령은 동시에 나의 준칙인 관계로(윤리적 명령을 준칙으로 요구하는 것이 도대체가 이성이라는 것), 나는 불가피하게 神의 현존과 내세의 삶을 믿을 것이다.”(A828, B856) [순수이성이 부과하는 ‘구속력[도덕적 행동의 요구]’의 전제로서, 즉 ‘윤리적 명령’의 背面으로서, 神의 현존과 내세의 생을 말한다. [순수]이성이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神의 현존과 내세의 생이 是認된다. 이른바 도덕형이상학으로서, [“내재적”(A819, B847)] 도덕신학Moraltheologie의 확립이다. ‘자연신학natürliche Theologie’의 하위범주로서, 도덕신학이 “모든 도덕적 질서와 완전성”의 원리로서 最高 예지자Intelligenz’의 현존을 말하고, 물리신학Physikotheologie이 “자연 질서와 완전성”의 원리로서 最高 예지자의 현존을 말한다(A632, B660)] 칸트의 도덕신학이 ‘우리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진 곳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부들,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초월적 변증론에서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진 곳이 [위의] ‘초월적 방법론’을 포함해 이후의 『도덕형이상학정초』-『실천이성비판』에서이다. 세 질문(A805-B833 이하) 모두 ‘철학적 주요 관심의 영역’으로서, 철학제국의 직속구성원들이다. [『판단력비판』이 ‘무관심의 영역으로서 美’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⑪ 칸트에서 구원을 말할 때, 그것은 도덕형이상학에 의한 구원이다. 도덕형이상학이 자유이념은 물론, 神이념-영혼이념을 구제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가슴에는 도덕이 반짝반짝─ 도덕이 느껴지는 것으로서, [신비로운 윤리로서] 도덕이 신비스럽다. 도덕에서 ‘구원이 느껴진다.’ 구원의 음성이 진리 중의 진리로서, 즉각적 수용된다. 대답질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응당 수용해야 하는 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다. [진리에서 대답질할 시간이 없다]

⑫ 비트겐슈타인이 침묵해야 하는데 침묵하지 못하고 말한 것─‘말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신비스러운 것이 있다.’

 

1) 윤리적인 것이 신비스러움─윤리적인 것이 사태가 아니나 나타난다.

 

2) 삶-생명이 신비스러움─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생명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있다. (이것은 작금 덜 유효한 것 같다)

 

3) 자아가 신비스러움─주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늘 ‘파악되지 않은 것이 있다’) (작금 ‘초월적 자아’를 말하는 것은 덜 유효한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인류가 없어도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안간힘 써 동의해 보는 것) ‘신비스럽다’하더라도 주체의 실존이 논란되지 않는다. ─이 단서에도 동의해 보는 것.

 

4) 세계가 있는 것이 신비스러움─신비스러움은 세계가 어떻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사실이다. (왜 차라리 無가 아닌가?Warum gibt es eher etwas als nichts? ─‘라이프니츠’를 댓글로 달아보는 것.)

 

5) 세계의 의미가 신비스러움─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있어야만 한다.’ (요청이므로,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다 신비스럽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18, 8; 1921)와 칸트의 ?순수이상비판?(1781;1787) 사이에 ‘섬’이 있다.

 

1. 혁명으로서 칸트-『순수이성비판』 1─인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순수이성비판』(1781-A판, 1787-B판)의 혁명性이 우선 두 가지이다. 첫째, ‘감각기관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으로서 인식구조를 밝힌 일이고(‘감성직관+오성개념[화]=인식구조’), 둘째, 인식불가능한 세계로서 물자체가 설정된 점이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 문제는 ‘의식’, 곧 ‘수용성과 자발성으로서 지향성’이다. 바깥의 대상은 ‘나’의 의식이 구성한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독일 관념론은 자기의식에 대한 칸트의 통찰에 의해 큰 탄력을 받게 됐다. [자기의식에 대한 통찰을 ‘코기토의 연장선’에서 본다] ‘바깥의 대상이 의식이 구성한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주체가 분명히 강조된 것으로서, 칸트철학을 또한 주체철학의 확립으로 말하는 근거이다.

 

데카르트의 사유작용으로서 코기토[내가 思考한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를 부정할 수 없으나, 칸트에게 ‘나’는 사유작용의 결과로서 나가 아닌, 그의 형식논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사유작용으로서 나’이다. 사유작용으로서 나의 강조는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에 대한 중립적-객관적 자세에서도 나타났다.

 

현상들이 사물들 그 자체를 표상으로 견인하지 않는다 […] 문제는 공간과 시간이 사물들 자체의 규정들Bestimmungen이 아니라, 현상들의 규정들인 점이다. 사물들 자체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없고, 알 필요가 없다. 나에게 사물이 현상 이외에서 전혀 나타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A276-277, B333) [강조는 필자]

 

[공간과 시간이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규정한다. 인간이 똑같이 녹색 안경을 쓰고 있다. 공간-시간이 주관형식인 이유이다] “공간과 시간”에 규정된 나는 이미 제한된 나로서 ‘물자체’와 무관하다. ‘사유작용으로서 나’는 “사물들 자체”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물이 현상 이외에서 전혀 나타날 수 없는 것”으로 말할 때, 현상세계에 대한 칸트의 ‘집착’을 읽는다. ‘사유작용으로서 나’가 현상세계에 고정돼 있는 것을 말할 때, 프리드리히 니체가 물자체를 ‘제2세계’의 유비로서, 즉 ‘고전형이상학-기독교형이상학’의 유비로서 일방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사유작용으로서 철학’이 먼저이고, ‘물자체로서 철학’이 나중이다]

 

‘물자체’가 문제시 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세계는 에덴동산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善惡果’로 존재한다. ‘물자체 문제’는 선/악 ‘분별’ 이후의 소산이다. 천지창조시대-에덴동산시대가 상징언어 시대로서 주부Subjekt와 술부Prädikat가 합치되는 물자체의 시대였다(이 글 모토 ⓵). 물자체를 말하지 않는 시대였다.

 

『순수이성비판』 제2판 머리말에서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유했다(BⅩⅥ-ⅩⅦ). 아이러니가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탈중심화로서 탈지구적’을 요청하는 것인 반면, 칸트적 대전환이 ‘재중심화’로서 인간중심주의인 점이다(이 글 각주 26). 칸트가 철학적 관심을 대상이 아닌, 주체의 수용적 능력과 자발적 능력에 뒀기 때문이다.

 

칸트는 감각대상에 대한 인식을 ‘경험적 인식’과 ‘순수한 인식’으로 [중요하게] 구분한다. 순수한rein 인식이 선천적 인식이고, 경험적empirisch 인식이 후천적a posteriori 인식이다. 플라톤에게 감각대상에 대한 인식이 경험적 인식[후천적 인식]일 뿐이고,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순수한 인식[선천적-선험적 인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事實차원에서 형상이 1차적이나[전체가 부분보다 이르지만], 인식차원에서 질료가 1차적이고 형상이 2차적이다. 개별자가 먼저이고 보편자가 나중이다. 제1실체-질료가 먼저이고 제2실체-형상이 나중이다. 제2실체에서 제1실체가 생기는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문제기는, 비록 수사적rhetorisch’ 의문제기일지라도, ‘플라톤주의’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제2실체에서 제1실체가 생기는 것은, 질료형상주의의 특성으로, 질료, 혹은 질료因에 의한 ‘개별화원리’ 때문이다. [인식에 있어서 질료가 1차적이나, 事實에 있어서 형상이 1차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후천적 인식단계와 선천적 인식단계는 상이한 인식방법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경험적 인식 테두리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사실 실재하는 것은 질료-형상으로서 제1실체뿐이다. 이른바 질료형상주의Hylemorphismus이다. 칸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라진 것은 선천적 공간-선천적 시간에 對한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천적 공간-시간에 對한 사유가 없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플라톤과 달라진 것은 감각세계에 의한 것을 열등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이데아와 감각세계의 관계를 에피스테메와 독사doxa의 관계로 말하지 않고] 더구나 감각세계도 관계하는 순수한 인식[선천적 인식]을 주창한 점이다. [선천적 제한조건으로서, 순수직관형식으로서 공간-시간을 말한 점이다] 그리고 ‘본질’을 구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인식방법을 문제화-전경화시킨 점이다.

 

‘본질’에 대한 인식방법의 우위를 말하는 것은 ‘칸트’에서 볼 때 제한적으로 타당하다. 칸트에서 ‘가능성으로서 진리-본질’을 말할 수 있다. 칸트에서 진리-본질은 감성 및 오성에 의한 자기활동Selbsttätigkeit이 전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선천적 인식주관으로 해서, 즉 ‘선천적 형식들로서 공간-시간-범주들’에 의해 제한된 인식주관으로 해서, 칸트는 ‘선천적 종합판단’을 자연과학에서, 이를테면 ‘질량불변의 법칙’이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가능한 것으로 봤다.’ 물자체에 대한 인식을 유보하는 조건 下에, 형이상학에서 ‘선천적 종합인식’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이 글 모토 ⓺) [여기에서 형이상학은 1.부와 2.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감성론’과 ‘초월적 분석론’에서 말하는 ‘초월형이상학’이다. ‘물자체를 유보하는 조건’이 벌써 형이상학으로서, 형이상학風이다. 3.부 ‘초월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모든 학문의 여왕”(AⅧ)으로서 전통적 형이상학’의 諸이념들을 불가능으로 말한다. 형이상학의 諸이념들의 불가능이 형이상학의 불가능이다. 형이상학이 구제되는 곳이 4.부 ‘초월적 방법론’에서이다.] 선천적 종합지식의 가능성이 학문의 조건이다. 초월적 변증론 및 여기에서의 ‘神증명’은,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의 연장선上에 있다. 그 동안의 神증명의 부당성을 말하는데, 이유가 현상계-경험계에 依하지 않은 것이고, 결과가, 따라서, 증명불가능성이다. 인과론적[우주론적] 神증명은, 인과론이 현상계의 인과론인 것으로 해서, 최초의 원인으로서 자기원인인 神 증명에 쓰일 수 없는 것이었다. 神이 현상계의 神이 아니라, ‘현상계 밖의 神’이다. ‘우주 밖의 神’이다(이 글 모토 ⓻).

 

칸트 이전의 ‘철학함philosophieren’은 주지하다시피 대체로 ‘대상’의 본질을 묻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의 본질을 다른 데서 구하는 일이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안셀무스-토마스-쿠사누스의 행로가 그것을 말한다. ‘인간인식의 수용적/자발적 능력이 없을 때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해 대상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 충분히 혁명性이다.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으로서 칸트철학을 말할 때, 칸트철학이 ‘아이러니’가 아닌 것이, 발상의 전환으로서 ‘세계설명’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관찰자를 움직이게 해서 천체운동을 보다 잘 설명하게 했듯이, 칸트 역시 ‘관찰자로서 나’를 움직여서, 대상의 본질을 다른 데서 구하지 않고, 대상을 ‘나’의 인식능력에 따르게 하였다.

 

2. 혁명으로서 칸트-『순수이성비판』 2─요컨대 철학적 혁명

 

칸트의 혁명성이 인간이 ‘감각기관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에 따라 ‘물자체Ding an sich’를 다만 현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한 데 있다? 후반부/전반부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나? 주지하다시피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종합한 칸트. 감각을 강조하는 경험주의철학과 오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철학을 넘어, 칸트는 감각과 오성이 인간 인식의 두 가지 공명조건이라고 보았다. [“내용 없는 思考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이 맹목이다”(A51, B75)] 감각과 오성이 인간 인식의 두 가지 조건이라고 한 것이 칸트철학의 첫 번째 혁명성이다. [고전형이상학과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인식내용(dass)이 아니라, 인식방법(wie)을 문제 삼은 점이다] 확고부동한 인식방법에 의해 데카르트-라이프니츠-볼프의 독단론과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의 대립을 지양시킨 점이다. 플라톤과 관계시키면, 이데아계와 ‘이데아계의 수직적 유비로서 감각계’의 대립을 지양시킨 점이다.

‘초월적 대상으로서 물자체’, 곧 ‘타자성으로서 물자체’를 설정한 것이 칸트철학의 또 하나의 혁명성이다. ‘알 수 없는 물자체’에 대한 소문이 동시대인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순수이성비판』이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으로부터 초월적 변증론으로 진행한다.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의 결과로서, 동시대인들이 ‘물자체의 알 수 없음’에 주목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을 말할 때, 거꾸로 열거하면, 먼저 초월적 변증론의 대상인 영혼-세계-神이 있고, 다음 초월적 감성론과 초월적 분석론의 ‘결과’인 물자체가 있다. [‘형이상학으로서 물자체’의 승전가이다] 마지막으로, 따로 말하는 것으로, 초월적 변증론과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 모두에 관여하는 공간-시간-인과성들이 있다. 영혼-세계-神이 증명불가능하고, 물자체가 알 수 없고, 선천적 제한조건들이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전제의 대상이다. 요컨대 철학혁명이다.

 

초월적 변증론의 사변이성이 앞의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의 순수이성과 달리 물자체를 말하지 않으나, 순수사변이성에 의한 諸이념들의 증명이 불가능성으로 드러났을 때, 그 이념들은 [알 수 없는] 물자체와 비동질적 유비이다.

 

 

3. 혁명으로서 칸트-『순수이성비판』 3─‘인식론으로서 실재론’

 

칸트는 B판 394-395에서, 더해진 有名한 注에서, 형이상학의 본래적 연구목적으로 오직 세 가지 이념, “神-자유-불멸성”을 말한다. 이 이념들에 대한 통찰은 “신학과 도덕, 그리고 이 양자의 결합인 종교”에 대한 것으로서, “오로지 사변적 이성능력”에 의한 통찰이 될 것을 천명한다. 형이상학의 확고한 영역으로서 신학-도덕-종교가 언명됐다; 神-자유-불멸성을 “종합적 순서”로 말하면서 그 전제로 종합적 순서를 뒤바꾼 ‘영혼론-세계론-神인식’으로 전진하는 “분석적 순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초월적 변증론의 대상, 즉 “초월적 이념들의 세 항목” 下의 “순수이성개념들”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핵심부들”이 ‘초월적 변증론’의 핵심항목들이다.

 

이 학문들의 순전한 초안마저도 오로지 순수이성의 순수하고 진정한 산물 내지는 문제이다. …… 모든 초월적 이념들의 이 세 항목 아래 순수이성개념들의 어떤 종류의 양태들modi이 있는지 다음 핵심부들에서 완벽하게 논증될 것이다.(B392, A335)

 

인용문 前에서 초월적 영혼론-초월적 세계론-초월적 神인식 등이 각각 이성적 심리학-이성적 우주론-초월적 신학에 해당될 것으로서 세 가지 ‘학문들’을 알렸다. 형이상학의 하위범주들로 영혼론[심리학]-세계론[우주론]-神인식[신학]을 분명하게 했다. 주목되는 것이 영혼-세계-神이라는 초월적 변증론의 항목들이, 즉 심리학-우주론-신학이라는 학문들이, ‘순수이성개념들’을 가진, “순수이성의 순수하고 진정한 산물 내지는 문제”라는 점이다. 순수이성이 없을 때, 초월적 이념들이 없으므로, 순수이성이 ‘무지막지한 자아’인 셈이다. 무지막지한 자아이므로 그 자아를 또한 초월적 이념으로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칸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뜻이 그 자아 때문 아닌가? 칸트는 그러나 순수이성개념을 갖춘 ‘영혼-우주-神’이 ‘경험 뒤-경험 內에 있는 순수오성개념’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험 중에서 지시될 수 있는-직관화될 수 있는 그러한 [오성]개념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순전한 초월적 이념의 대상은 그것에 관해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념이 전적으로-필연적으로 이성 안에서 이성의 근원적 법칙들에 의거해서 생산됐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럴 것이 이성의 요구에 적합하다 간주되는 어느 대상에 관해서 사실은 어떤 오성개념이, 즉 가능한 경험 중에서 지시될 수 있는-직관화될 수 있는 그러한 개념이, 가능[기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적 개념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예외로 하고] 하나의 이념에 상응하는 객체에 관해 어떤 인식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말할 때, 덜 오해받을 위험성이 표명되는 것인지 모르겠다.(A338-339, B397)

 

“하나의 이념에 상응하는 객체에 관해 어떤 인식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말”하려는 것은 ‘주관주의철학으로서 칸트의 인식론’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실재’에 있는 것을 말해준다. [듀란트Will Durant가 「임마누엘 칸트와 관념철학론」에서, 칸트에 대한 최종평가로서, ‘思考의 법칙과 실재의 법칙을 동일시하는 칸트사상’을 짚은 것은 아주 타당하다] 영혼의 실재를 문제 삼는, 神의 존재론적 실재를 문제 삼는[“존재신학Ontotheologie”], 神의 우주론적 실재를 문제 삼는[“우주신학Kosmotheologie”(A632, B660)] 칸트철학은 ‘인식론으로서 실재론’이다. 기왕의 형이상학의 부정으로서, ‘초월적 변증론’이 ?순수이성비판?의 화룡점정 格 以上이다.

 

[감각세계에 오성은 “규칙들Regeln의 능력”으로 마주하고, 초감각세계에 이성은 “원리들Prinzipien의 능력”(B356)으로 마주한다(원리의 예가 수학에서, 예를 들어 “두 점 사이에 하나의 직선만이 있다”(A300)이다. 앞의 오성이 ‘초월적 분석론’에서 설명된 ‘오성개념화’의 그 오성이고, 뒤의 이성이 ‘초월적 변증론’의 ‘[순수]사변이성으로서 이성’이다; 이를테면, ‘오류추리로서 영혼론’이 부정된다. 추리는 ‘삼단논법에 의한 추리’이다. ① “주부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주부로서만 실존하고, 그러니까 실체이다.” ②. “思考하는 존재자는 오로지 그러한 것으로 고찰될 경우, 주부로 생각될밖에 없다.” ③ “그러니까 思考하는 존재자는 역시 오로지 그러한 것으로서, 다시 말해 오로지 실체로서 실존한다.”(B410-411); 思考하는 존재자ein denkendes Wesen가 소위 자아로서, ‘영혼’이다. 실체-실존의 다른 말이 실재이다. 영혼증명을 위한 삼단논법에 의한 추리를 더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주어가 실재한다. ② 영혼이 주어이다. ③ 영혼이 실재한다. 문제는 소전제 ②에서이다. ②는 직관과 무관하다. 대전제 ‘인간은 죽는다’에서 이어지는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는 직관형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반면, 소전제 ‘영혼이 주어이다’는 직관형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진리가 ‘회의하는 자아’였다. 칸트에서 ‘증명불가능성으로서 자아-영혼’이 ‘동쪽으로 간 뜻’은?[이 글 7.章 2) 절 ‘생각하는 자아에 대하여’ 참조]

 

4. 칸트철학의 수용과 거부 1─물자체와 정언명령

 

비극Tragödie의 목적이 ‘비극적 세계인식’에서 ‘비극적’을 빼는 일이다. 세계의 현존을 미적 현상으로서 是認시키는 행위이다. 미적 현상은 가상이다. 『비극의 탄생』(니체)의 ‘이 세계의 현존이 미적현상으로만 是認된다’는 ‘명제’는 그러므로 ‘이 세계의 현존이 가상’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비극이 세계인식에 가상을 선물한다. 비극의 목적이 가상으로서 세계인식이다. ‘生老病死의 잔혹성’―‘喜怒哀樂의 변덕성’이 실재가 아니고 가상이라는 것은, 이 세계의 현존이 가상이라는 인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존(재)로 번역한 다자인Dasein은 인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인간은 가상인가, 실재인가. 기독교형이상학-불교형이상학 등 종교형이상학에 의하면, 종교형이상학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가상이다. 인간은 이데아의 그림자이고(플라톤형이상학), 인간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피안-이데아이며(기독교형이상학-플라톤형이상학), 인간은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차안을 희생해야 하며(神-자유-불사성을 믿어야 하며)―혹은 공덕을 쌓아야 하며(소크라테스-플라톤형이상학, 기독교형이상학, 혹은 불교형이상학), 인간은 초월자에 의해 “예정조화”(133)된 가장 좋은 세계에서 살[아야 하]며(라이프니츠형이상학) 등등. 칸트에게도 이 세계는 가상이다. 선천적 제한에 의해 물자체를 현상으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가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 또한 가상철학에 합류하는 거 아닌가. ‘초인간이 금방 오는 것은 아니다. 원시인류가 여기까지 온 시간만큼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라는 단서를 달았더라도(“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도 더 원숭이이다.”, 『차라투스트라』, Ⅵ-1, 8). 니체가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초인간까지의 인간은 과정적 존재인가. 인간이 가상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인간이 가상이라는 것—고전형이상학 이래의 오랜, 형이상학의 내용이다. 니체가 플라톤-칸트-쇼펜하우어를 포함한 기존의 형이상학을 일체 부인한다. 니체가 기존의 형이상학-존재론과 다른 것은 가상을 넘어서는 ‘발판’을 마련하지 않은 점이다. [이데아라는 발판-내세라는 발판-공덕이라는 발판 등] 니체는 물자체를 부인한다, 현상 그 자체를 是認한다. 가상을 가상으로써 是認시키는 것―이것이 니체의 형이상학이다. ‘장엄한 소박성’이다. 『비극의 탄생』 서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니체가 자신의 철학 本色을 가리켰다.

 

도덕 자체를 현상Erscheinung세계 속에 옮겨놓고, 끌어내리려는, 아니, ‘현상들’ 속으로뿐만 아니라(관념철학 용어 의미에서), 가상, 착종, 오류, 설명, 장식, 예술 등 ‘여러 속임수들’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철학.(Ⅲ-1, 11-12)

 

’현상과 물자체를 대립시킨 『순수이성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철학”은 니체 본인의 철학이다. “도덕”은 “가상, 착종, 오류, 설명, 장식, 예술 등 ‘여러 속임수들’”과 ‘마찬가지로’ 是認의 대상이다. 현상으로서, 是認의 대상이다.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현상과 물자체의 경계를 말했다. 감각적 직관 및 오성개념화의 대상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을 말하고, 경험 밖에 놓인 ‘경험초월대상’으로서 물자체를 말했다. 칸트에 의할 때, ‘도덕’은 선천적 제한조건[직관명령-범주명령], 혹은 이념과 같은 것으로서 ‘명령의 범주’에 있다. [‘관념론적 의미로서 도덕’ 또한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서 세계 안에 있는 그 현상과 같지 않다. ‘늘’ 요청으로서 도덕 아닌가?] 이른바 칸트의 ‘관념도덕으로서 도덕형이상학’이다. [칸트가 도덕형이상학의 창건자이다] ‘관념도덕으로서 도덕형이상학’이라는 명명이 니체에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우선, 니체가 도덕을, 의도적으로, 물자체의 영역이 아닌 “현상들 속”에 “끌어내리려는” 것은, 기독교형이상학을 의식한 것으로 기독교교리를 부정하는 태도이다. 『비극의 탄생』 본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느껴볼 것을 권면한다.

 

아마도 이런 반도덕적 경향의 깊이는 이 책 전체에서 기독교가 취급되는 은근한 방식, 즉 조심스럽고 적대적 침묵에서 가장 잘 간파될 수 있다. ─ 기독교,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도덕적 주제의 가장 첨예한 구체화로서 기독교.(Ⅲ-1, 12)

 

?비극의 탄생?이 니체철학의 저수지인 이유이다. 둘째, 칸트의 물자체에 對한, 나아가 칸트의 이념인, 요청으로서 ‘도덕행동’에 對한 비판이다. 니체는 ‘물자체’ 및 ‘요청된 도덕행동’에서 기독교적 심급행위와 유사함을 간파했다; ?유고 단편들. 1887 가을-1888. 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니체. “본능”과 “도덕” 간의 싸움의 역사로서 그 동안의 역사를 “비도덕성”의 역사라고 한다. 도덕에 對한 본능의 압도를 견인하는 것이 진정한 ‘힘에의 의지로서 도덕’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유럽 역사의 ‘공통성’은 ‘도덕적 가치들’이 모든 다른 가치들에 대한 지배권을 견인하려는 시도이다: 결과, 도덕은 생활의 지도자나 재판관이어야 했을 뿐 아니라, 1. 인식의, 2. 예술들의, 3. 국가적 노력 및 사회적 노력의, 지도자나 재판관이어야 했다. 유일한 과제로서 ‘개선’, 그 외 모든 것이 이를 위한 ‘수단’이다(또한 혼란-장애-위험: 따라서 이것들이 절멸될 때까지 투쟁하는…… […] (그럴 것이 ‘삶의 기본본능과 도덕 간의 싸움’의 역사는 그 자체가 지금까지 지상에 있어왔던 것들 중 가장 큰 비도덕성이기 때문이다…… (Ⅷ-2, 93)

 

5. 칸트철학의 수용과 거부 2─‘현상세계로서 물자체’

 

현상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를 구분한 칸트. 후자가 물자체, 즉 ‘초월적 대상’의 세계일 때, 전자가 ‘현실적 대상’의 세계이다. 넓은 의미의 현상세계는 인간의 인식능력과 실체세계의 국경에서 성립한다. [실체세계를 알 수 없더라도 실체세계에 대한 사유가 가능하다] 실체세계가 인간의 감성을 움직이나, 실체세계를 인간이 인지할 수 없다. 니체가 칸트철학을 인정하는 것은 칸트에 의한 선천적 제한조건의 토출, 이로써 칸트가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을 말할 때이다. 니체가 칸트철학을 부정하는 것은, 특히 이후의 칸트수용자들에 의한 것으로서, ‘물자체 세계’의 인식불가능성을 강조할 때이다. ‘비장하게’, 우리 모두 물자체는 알 수 없고, 현상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토설할 때이다. 니체에게 주안점은, 늘 그렇듯, 물자체의 세계가 아닌, 현상세계이다.

 

‘물자체’가 의미를 거스른다. 내가 모든 관계들, 모든 ‘고유 성질들’, 모든 ‘행위들’을 하나의 사물에서 빼놓는다 생각할 때, 그 사물은 남아나지 ‘않는다’: 물성Dingheit은 논리적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표시나 이해의 목적으로 있는 것이지, ─ ─ ─는 ‘아니다 […](Ⅷ-2, 93)

 

선천적 주관인식에 의한 것으로서, “물성”-“물자체”를 감각의 수용성 및 오성의 자발성에서 제외시킨 것을, “논리적 필요에 의해” 만든, 즉 “날조된 것”으로 단죄한다. 사물은 “표시”의 목적-“이해의 목적”으로 있는 것이지 물성-물자체를 놓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로서 사물’은 인간의 현상세계에 대한 지식-경험을 통해 事後에 개념화[抽象化]한 것이다. ‘물자체’는 없다. 현상 너머의 세계, 즉 물자체로서 초월적 세계를 얘기한 칸트의 모습에서 니체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기독교형이상학으로 이어지는 본질철학-내세철학의 흔적을 보았다. 현상세계를 그대로 긍정한 철학자 니체. ‘후설현상학’의 시조로서 니체를 본다. 현상학의 모토 ‘사물 자체로Zur Sache selbst!’는 말 그대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심이지 칸트의미에 있어서 그 不可知의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다. 노에시스[의미작용]에 의한 노에마[의미]를 말할 때, ‘나’라는 것도 지향성의 결과로서 事後에 만들어진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가 함의하는 것에 관해 니체가 처음 환호한 것은 “단순한 현상인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높이고, 그것을 사물들 가장 안쪽에 있는, 진정한, 본질의 자리”에 두었기 때문이다. ‘현상의 본질 대체’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물자체를 다만 현상으로als Erscheinung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명제를 특유의 관점다원주의에 의해 간단히 내파시킨다. 칸트에 의할 때 인간은 모두 같은 안경을 쓰고 있으나, 선천적 제한조건에 똑같이 걸려있으나, 니체에 의할 때 이것은 동일성의 사유로서 보편자철학의 횡포-기독교형이상학의 횡포와 같은 것이다. 물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 제한조건에 관심 없는, 진리부정이 텃밭인, 관점주의가 있을 뿐이다. 관점주의는 예를 들어 ‘가상으로서 예술’을 통해, 아폴론적 예술충동-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상된다. 관점주의는 늘 삶을 넘어가는 방식으로서 관점주의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주의이다(이 글 모토 ⓵). 니체 특유의 A를 A로 대응하는 방식을 말할 수 있다.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에 對해 물자체를 부정하는 현상주의로 應하는 것이다. 물자체를 부정하는 ‘현상주의로서 관점주의’로 應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서두를 웅장하게 수놓은 것으로서, 신의 죽음에 對해 자발적 몰락의지로 應하는 것이 A를 A로 대응하는 방식의 모범적 예이다.

 

6. 칸트철학의 수용과 거부 3─자연과학적 형이상학

 

 

‘증명’될 수 있는 것이 모든 세계구조물들이 의인화된 人性들Anthropomorphismen이라는 점이다: 칸트가 옳을 경우, 그래 모든 학문들이 그렇다, 여기에 물론 하나의 순환적 결론이 존재한다 ─ 학문들이 옳을 경우, 우리가 칸트의 토대 위에 있지 않다: 칸트가 옳을 경우, 학문들이 옳지 않다. …… 칸트에 여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그의 모든 명제들을 용인하더라도, 昨今 풍족한 ‘가능성’을 붙박이로 말하는 것에 對해서이다, 세계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대로 그렇게 있는 것에 對해서이다. 더구나 인간의 차원에서 전체적 입각점이 불필요하다. 이러한 회의주의에서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 우리는 이러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그 회의주의를 ‘잊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가 이 세계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가! 예술, 그 理想 형상, 그 기온. …… ‘인식’에 있지 않고, ‘만들어내는 것’에 우리의 안녕이 있다! 최고의 가상物에, 최고의 고귀한 격동에, 우리의 위대성이 있다. 세계가 우리를 상관하지 않을 때, 우리가 그 세계를 경멸할 권리를 가질 것을 의욕한다.(?유고 단편들. 1872 여름-1874 末, Ⅲ-4, 47)

 

현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지 물자체는 알 수 없다? “학문”이 “의인화된 人性들”의 토대 위에 서있다? 학문이 ‘짜가’이다? 칸트의 물자체-“회의주의”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다. “세계구조물들”이 [인간이라는 안경에 의해] 모두 의인화된 것들이고 정본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물은 것이다. 칸트의 ‘전체를 포괄하는 입장’이 “풍족한 ‘가능성’을 붙박이로 말”할 수 있을까? 아직 파악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파악될 때, 이의 제기를 넘어 칸트의 “전체적 입각점”, 즉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말과 사물?의 말미에서 ‘고전주의가 만든 인간형’이 어느 한 순간 바닷물에 모래알이 쓸려가듯이 사라질 것이라고 위협한 푸코. 파악되지 않은 것이 많다, 이렇게 말할 때마다 ‘칸트’가 점점 무력해진다. 파악되지 않은 것이 드러날 때 ‘칸트위기’의 희생자들이 애도의 대상이다. 분명히 말할 때, ‘물자체-회의주의’는 그를 위해 사용된 공간-시간-인과성을 포함하는 그 자연과학적 형이상학에 의해, 즉 바로 그 자연과학적 형이상학物의 해체에 의해, 함께 해체될 운명에 처해 있다.

 

공간-시간이, ‘감성직관형식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즉 ‘주관형식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도 선고될 수 없다. 확실해야만 하는가? ‘확실’이 요청수준 아닌가? 이 글 모토 ② 마지막 문장, “그럴 것이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침묵하지 않고 말한 것 중의 하나: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놓여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할 때, 그것은 아무 가치를 가지지 않은 것이다.”(?논리-철학 논고? 6.41)[이 글 모토 ⑫]

 

다시 말하고 싶은 것; 칸트가 인식의 공식을 말하면서 인간이 모두 같은 안경을 쓴 것으로 본 것은 그의 탁월한 관점 중의 하나이다. ‘인간이라는 눈’을 절대적 눈으로 말하지 않은 관점이 있다. 스핑크스라는 눈이 있고 부엉이라는 눈이 있다. 인류는 혼자인가? 예스! 그 인류는 혼자이지만 어딘가에서 역시 ◯◯는 혼자인가? 묻는 종이 있을 수 있는 것. 영혼-세계-神에 대한 증명 가능성이, 특히 ‘우주’에 대한 증명 가능성이, 138억 년이라는 숫자가 나왔더라도, 16개의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힉스입자가 나왔더라도,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 점 또한 칸트의 ‘가능성으로서 탁월한 식견’으로 말할 수 있다. 우주의 95%로 말하는 암흑에너지-암흑물질에 대해서는 아직 추론 단계이다. [인류는 필연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신을 증명 불가능성으로 말한 것은 현대 자연과학으로 볼 때 타당으로서 타당하다. ‘자아의 증명 불가능성’을 지금의 인지과학자들에게 말할 때,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겠지만. 물론 칸트가 ‘초월적 변증론’에서 ‘증명불가능성’을 말할 때 이것은 ‘자연과학 형이상학’的 천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변증법적 이성추리들dialektische Vernunftschlüsse’, 곧 “초월적 ‘오류추리Paralogismus’”(영혼), “순수이성의 ‘이율배반Antinomie’”(세계), 그리고 [“모든 존재자들 중의 존재자”에 대한 추리로서 “순수이성의 이상Ideal”(A340, B398)으로 부르는, ‘초월적 오류추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삼단논법Syllogismus(B141 注 참조)이 그 표상인] “選言的disjunktiv 이성추리”(神, A576, B604 이하)들에 의한 것이었다. 당대의 기계론적 역학주의의 영향 없이 세 가지 변증법적 이성추리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 또한 말해야 한다; 앞의 니체 인용 맨 뒤의 문장, “세계가 우리를 상관하지 않을 때, 우리가 그 세계를 경멸할 권리를 가질 것을 의욕한다.”가 『비극의 탄생』의 많은 부분을 함축한다. ‘의욕한다’는 벌써 니체철학의 핵심이다. 인용문은 유고로서, 기간을 좁혀 말하면, 1872 여름과 1873 初 사이 써졌다. 『비극의 탄생』이 써진 때가 1871. 2月, 간행된 해가 1872. 권력의지를 담은 『차라투스트라』 2.부가 1884에, 영겁회귀론이 드러나는 3.부 역시 1884에, 영겁회귀론을 담은 4.부가 1885에 출간됐다. 『비극의 탄생』이 니체철학의 저수지인 것이다.

 

7. 나가며: 칸트와 니체

 

1) 인식이 대상을 따른다: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다! 인식이 대상을 따른다─ 대상이 인식을 따르지 않는다. [‘인식주관으로서 선천적 제한조건’이 철회되고, ‘自然’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의 문제 또한 철회된다] 대상이 색깔이 다른 안경을 썼다/벗었다 벗었다/썼다 하므로 인식이 거기에 따라 안경을 썼다/벗었다 벗었다/썼다 한다. 안경점에 드나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안경 하나만 있으면 됐던 좋은 시절이 갔다. 주객전도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상이 주체로서, 안경을 썼다 벗을 때마다 철옹성이던 ‘인식’이 요동을 친다. 인식은 근거율[선천적 제한조건]이 무얼 말하는지 모른다. 인식주체가 무얼 말하는지 모른다. 안경 바꿔 쓰느라 정신이 없다. 한 세상이 이렇게 저무는 것이다. [인식의 안경이 아니라 대상의 안경이 있다]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이 많을 때, 그것은 많은 경우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 대상에 인간이 포함된다면 이것은 칸트 式이다. 칸트 또한 인식[인간]을 현상의 바다에 띄워 놓지 않았는가? 거기에서 선천적 인식형식들을 보지 않았는가? 칸트의 힘은 여기까지였다. 칸트는 ‘주관주의로서 현상주의’를, ‘현상주의로서 주관주의’를, 밀고 나갔다. 감성직관과 오성개념화에 의한 인식주체로서 ‘선천적 종합판단-선천적 종합지식으로서 학문’(이를테면 수학-심리학)을 낙관했다.

 

2) 생각하는 자아[‘나’]에 대하여: 엄밀히 말하면 ‘생각[思考]하는 자아’가 물을 수 없는 것으로서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생각하는 자아를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자아의 생각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다. ‘생각하는 자아를 끝장내고 싶다’, 이 역시 생각하는 자아의 내용이다. 생각하는 자아의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하나, 생각하는 자아의 그물망에 대해 묻지 못한다.

 

왜 생각하는 자아인가? 이것은 자연과학적[생물학적] 질문이다. 물론 생각하는 자아는 ‘對象化하는 자아’로서 인류학적 고찰의 대상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영역이다. 인류학적 고찰이거나 철학적 인간학의 영역이더라도 이것들이 생각하는 자아를 인간의 특성으로 말할 뿐이지, 왜 ‘생각하는 자아인가’에 對해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을 요약하면 늘 ‘인류는 대상화의 기적’이다, 이것이 그들의 ‘말말말’이다.

 

인지과학에 의한 ‘생각하는 자아’의 분석적 연구가 우스운 것은 예측되는 결과 때문이다. 이러이러하니, 혹은 신경전달물질로 해서 ……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아이다, 이런 式이다. 결론은 마찬가지 버킹검으로서, ‘생각하는 자아’이다. 뇌의 이곳에서 생각하고[느끼고] 저곳에서 생각한다[느낀다]. 우습지 않은 것은 ‘물질적 대상으로서 생각하는 자아’이다. 인간을 ‘피와 살의 덩어리’로 본 벤G. Benn의 시집 『시체공시소-기타』(1912)의 표명과 같다.

 

익사한 맥주배달원이 테이블 위에 받쳐져 있었다./ 그의 이빨 사이에는 누군가 꽂아둔/ 담자색 과꽃 한 송이가 있었다.

 

─ 벤, 「작은 과꽃」 부분

 

갈대밭에 한 소녀가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소녀의 입을 무언가가 갉아먹은 듯했다.

 

가슴을 열었을 때 식도에는 구멍이 많이 나있었다.

 

마침내 횡경막 아래 한 亭子에서

 

 

 

어린 쥐들의 보금자리를 찾아냈다.

 

작은 암컷 쥐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 벤, 「아름다운 청춘」 부분

 

‘피와 살의 덩어리로서 쥐’, 그보다 좀 나은 지능을 가진, 대뇌피질이 발달한, 인간이해이다. 인류는 혼자인가? 예스! 인류는 혼자이다. 인류 이전의 돼지이거나 인류 이후의 호문쿨루스이거나 생각하는 흙이거나, 뒤로 가는 빛이거나, 예스! 혼자십니다. 인류는 혼자이다. ─사실 이것은 ‘138억년이면 긴 세월인데 그들은 왜 안 오는가?’에 對한 대답이다. 니체의 ‘스승’, 다윈의 명제, ‘인류가 고정된 것도 [더구나] 영원한 것도 아니다’를 범례로 보는 것이다. 니체 死後 15년 뒤 출발한 일반상대성원리의 멜로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를 또한 범례로 보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對象化의 기적’이다. 칸트가 對象化의 경로를 말했다. 영혼-세계-神 역시 對象化의 경로를 통해 증명불가능을 내용으로 알렸다. ?순수이성비판?이 형식의 혁명이고(특히 ‘초월적 감성론’-‘초월적 분석론’에서), ‘형식과 내용’의 혁명이다(특히 ‘초월적 변증론’-‘초월적-방법론에서).

 

3) [전도된 플라톤주의자]-전도된 칸트주의자, 니체: 니체에 대한 칸트의 영향은 인식론에 대해서이다. 더 정확히 말할 때, 공간-시간-인과성에 의해 조건 지워진 ‘경험적 실재empirische Realität’를 말할 때이다. ‘가상으로서 경험적 실재’를 말할 때이다. 『비극의 탄생』 「인식비판적 서문」에서 “‘현상들’(관념철학 용어의미에서)”(12)을 말하고, 이어서 칸트의 도덕론을 비판적으로 개진한 것은,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에 관한 니체의 정확한 숙지를 방증한다. 칸트에서 현상과 물자체가 상호경계적이다. 칸트는 감성직관 및 오성개념화에 의한, 인식가능한 ‘현상’을 말하고, [선천적 제한조건이 그 조건인] 모든 경험에서 제외된, ‘초월대상으로서 물자체’를 말한다. 니체에게 생각이 상호경계적 ‘현상과 물자체’가 아니라, 공간-시간-인과율 등 선천적 제한조건 下에 있는 ‘물자체로서 현상’에 가 있다. 현상이 물자체인 것이다. 니체에게 생각이 ‘물자체로서 현상인 가상’에 가 있다. 칸트의 물자체와 니체의 물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르다. 니체에서, ‘경험적 실재’가 말하는 것이 바로 ‘물자체로서 현상’이고, ‘물자체로서 가상’이다. ‘가상으로서 현상’이 물자체이다. 물자체를 말할 때, 니체는 ‘전도된 칸트주의자’이다. 칸트가 물자체를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경계화-‘신비화’(?)시켰을 때, 오히려 니체는 물자체를 현상으로서 是認시켰다. 다음은 『비극의 탄생』 4.장 부분이다.

 

내가 그러니까 자연에서 전면적 예술충동을 감지하면 할수록, 그 예술충동들에서 가상을 向한, 즉 가상을 통해 구원받기를 向한 열렬한 동경을 감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나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진정한 존재자[근원-일자]가 영원히 고통스러워하는 자 및 모순이 가득한 자로서, [동시에] 매혹적 환영 및 즐거운 가상을 그의 지속적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리라는 형이상학적 가정 말이다. ‘가상으로서 우리’는 완전히 그 속에 결박돼 있고, 그것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는 그 가상이라는 것을 진정 비존재자로서, 즉 시간-공간-인과성 안에서 이뤄지는 지속적 생성으로서, 경험적 실재로서 느껴야만 할 것이다.(34-35) [강조는 필자]

 

인용문 끝의 “경험적 실재”, “시간-공간-인과성”은 칸트용어-쇼펜하우어용어이다. 경험적 실재는, 간단히, 그것이 경험을 통해, 주체에게 주어지는 한, 현상들-사물들의 객관적 효용Gültigkeit으로 이해되기 쉽다. 칸트에게 경험적 실재가 그게 아닌 것은 현상들-사물들이 실제적이 아닌. 공간-시간이라는 직관형식들에 의해, 그리고 12가지 오성범주들에 의해 제한-규정되는 점이다(이 글 각주 10, 각주 5). 직관형식 및 오성범주는 ― 경험에서 제외된 ― 선천적 범주로서, ‘認識 인간’에게 일종의 같은 색깔의 안경으로서,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경험적 실재로 보이는 현상’은 가상이다. 칸트에게도 현상은 가상이나, 적어도 니체 입각점에서 볼 때, 구원을 기대하는 그 가상이 아니다.

 

4) ‘가상의 가상’에 의한 구원: 니체에게 경험적 실재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실제적 실재가 아닌 가상-현상이나, 그 가상-현상이 물자체를 전제로 한 가상-현상이 아니다. 니체에서 ‘물자체가 부인되는 점을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가상은 구원을 필요로 한다. [‘물자체’에 형이상학이 없고, 가상[현상]에 형이상학이 있다] 위의 인용문대로 가상의 “필요”가 “형이상학적 가정”인 것은, 그대로 말할 때, 형이상학적인 것은, “진정한 존재자”[“근원-일자Ur-Eine”]가 “영원히 고통스러워하는 자 및 모순이 가득한 자”로서, “지속적 구원”을 갈망하는데 그 표상이, ‘전제가 선천적 제한조건으로서 물자체’가 아닌, 현상으로서 가상이기 때문이다. [물자체에 형이상학이 없고 ‘현상으로서 가상’에 형이상학이 있다] 니체는 그 가상을 “매혹적 환영” 및 “즐거운 가상”으로 말한다. 니체가 “가상을 통해 구원받기를 向한 열렬한 동경”을 말할 때, 이것은 ‘가상의 가상’으로서, “훨씬 고차원적인 충족”(35)인 아폴론적 꿈예술에 대해서이다. 예술이 구원인 셈이다. 그 자신 가상적 존재인 가상은 가상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 [가상이 가상을 보장하는 式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 「[그리스도] 변용」을 예로 든다.

 

자신이 저 불멸의 “소박한” 예술가 중의 하나인 ‘라파엘로’가 한 비유적 회화에서 가상이 가상으로 弱化되는 것, 즉 소박한 예술가 및 아폴론적 문화의 근원과정을 동시에 재현했다. 작품 「변용Transfiguration」의 하단은 귀신들린 소년, 절망하는 운반자들. 속수무책 불안해하는 사도들, 즉 세계의 유일한 근거로서 영원한 근원고통을 放映한다. “가상”은 여기서 영원한 모순, 요컨대 만물의 아버지의 반영이다. 이 가상에서 이제 감미로운 향기 같은, 환영 비슷한, 새로운 가상계가 솟구친다. 첫 번째 가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새로운 가상계에 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 최고로 순수한 열락 및 커다란 눈에서 나오는 고통 없는 관조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유하는 [새로운] 가상계.(Ⅲ-1, 35) [강조는 필자]

 

“귀신들린 소년”-“절망하는 운반자들”-“속수무책 불안해하는 사도들”은 ‘가상’으로서, ‘바다 가운데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않아있는 자들’로서, 개별화원리의 표상들이다. ‘개별화원리’는 가상으로서, 가상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화원리는 “가상”으로서, “가상”에 의해 “弱化Depotenzieren”된다] ‘그’가 이제 “바다 가운데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고요히 앉아있다.”(36); 속수무책 불안해하며, 벌벌 떨며,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있다; 니체는 이를 “개별화원리의 신격화”(35)로 명명한다. 前提가 ‘진정한 존재자로서 근원-일자’이고, 또한 前提가 ‘근원-일자로서 그’가 영원한 고통-영원한 모순을 가상으로 보는 점에 있다. 근원-일자는 고통을 겪고-모순을 겪는 근원일자이다. [아폴론은 숭고한 몸짓으로 고통의 세계전체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우리에게 알린다] 고통의 세계가 없을 때, 구원이 없다. 근원-일자에 의한 고통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 없을 때, 근원-일자에게 ‘가상의 가상’에 의한 구원이 없다. 뒤의 가상이 아폴론적 가상으로서 꿈예술이다. ‘마야베일’이 가상으로서, 세계가 가상인 것을 알렸다. 자꾸 말해도 안 질리는 마야베일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진술: 아무렇게 던져놓은 밧줄인 줄 알았으나 똬리를 튼 뱀이었던 것. 똬리를 튼 뱀인 줄 알았으나 아무렇게 던져놓은 밧줄이었던 것. 꿈인가/생시인가. 살았는가/죽었는가.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의 대응이 ‘현상으로서 가상’이다. ‘현상으로서 가상’이 물자체이다]

 

* 『시와표현』기획특집-2014년 봄호(박찬일의 ‘인문’ 에세이 1 ─ 니체와 칸트 )

* 박찬일

1993년 〈현대시사상 등단>

시집 『모자나무』, 연구서 『독일 대도시시 연구』 외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