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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승효상 <건축은 삶을 짓는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5. 2. 23:29

건축가 승효상 <건축은 삶을 짓는 것> 

 우먼센스 | 입력 2015.04.16 09:08





살랑대는 봄바람이 불던 날 건축가 승효상을 만났다. 그가 지은 집에서.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동숭동 언덕을 오르다 보면 녹슨 강철로 마감한 건물이 눈에 띈다.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이다. 주택이 밀집한 동네에서도 큰 이질감 없이 우뚝 자리한 이곳에선 산이 보이고 새 소리가 들린다. 미로 같은 건물을 한 바퀴 돌아 지하로 난 계단을 내려갔다. 놀랄 정도로 멋진 서재와 적당한 조도의 조명, 차를 따르는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건축계의 거장. 승효상이다.

승효상의 건축 인생을 지탱하는 명제 '빈자의 미학'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이들의 미학'이라는 뜻이에요. 돈이 있지만 스스로를 절제하고 검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지칭하죠. 집을 지을 때도 남보다 작은 집을 짓고, 남하고 나눌 수 있는 집을 짓는 게 바로 빈자의 미학입니다."

'빈자의 미학'은 한국의 달동네를 답사하면서 구체화한 생각이다. 우연히 달동네를 지나는데 그가 어릴 때 살던 동네와 기억이 겹쳐졌다. 가난하니까 작고, 나눌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골목길이 곧 마당, 놀이터, 창고가 되는 빈자들의 공동체. 그곳에서 승효상 건축의 지표가 시작된 것이다.

애초에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북에서 내려온 가족의 장남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은 그가 돈을 못 벌까 봐 걱정했던 것. 입시를 앞둔 그에게 누나가 권유한 건축이 평생의 밥벌이이자 과제가 될 줄은 몰랐다.

"지금도 그때 누님의 권유를 고맙게 생각해요. 누님도 건축을 잘 알아 권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어찌 됐든 잘 모르는 건축과에 가게 됐죠."

사실 승효상 하면 고 김수근(건축가, '공간' 사옥 건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승효상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그는 15년간 김수근의 문하에서 일하며 건축가로서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는 매 순간 김수근 선생을 이기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어요. 악을 쓰며 나를 방어하고 또 변호하며 저항했지만, 그 싸움은 언제나 처절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1986년 회사를 맡아달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승효상은 '공간'의 대표가 됐다. 하지만 공간 대표로 있던 3년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대표직이란 중압감과 30억이라는 큰 빚도 안아야 했다. "당시엔 내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무척 힘들었어요. 선생이 돌아가시자 일은 줄었고, 큰 빚에 직원 노조까지 상대해야 했죠. 지금 생각하면 저를 단련시킨 시간이었어요. 여러모로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체질이 된 거죠. 그 이후론 겁이 없어졌어요."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는 나눔, 채움보다 비움이 중요하다

"지금의 저를 만든 데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었죠. 빈에서의 유학 시절 '아돌프 로스'라는 이를 알게 됐어요. '장식은 범죄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근대 건축가죠. 그 이전의 세계 건축은 관습과 전통의 답습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의 등장으로 건축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죠. 감히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파격적이었어요. 철학자 칼 막스, 발터 벤자민, 하이데거 등도 저에게 영감을 줬고 지금도 유효해요. 요즘은 우리 가족의 힘이 가장 세고요.(웃음)"

가족 이야기가 나오니 웃음부터 내비친다. 장성한 자녀들이 바쁘다 보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며 겸연쩍게 웃는다. "미워하면서도 닮는 게 자식이라고, 어릴 땐 바쁜 아버지를 '취급'도 안 해줬어요. 지금은 이해도 해주고 모르긴 몰라도 저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즈음 이로재를 둘러봤다. 그의 작업실은 서재와 구별 없이 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직원들에게도 오픈되어 있는 열린 공간, 누구나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 책은 특별해 보였다.

"책은 저자가 만든 하나의 역사입니다. 그에 비해 책에 매겨지는 가격은 매우 저렴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일생을 불과 몇 만원으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책을 볼 때면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 싼값에 그들의 인생과 역사를 섭렵하는 거니까요."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이로재 작업실은 그에게 끊임없이 좋은 에너지를 전달한다. 든든한 지식소 안에 있는 느낌은 존재 자체로 큰 위안을 준다. 그에게 서재란 자신이 하는 건축 본연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또 지지해주는 실질적인 자산이라고도 덧붙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것 같은 그에게 요즘 읽는 책과 함께 추천할 만한 책이 있는지 부탁해봤다.

"제가 수십 번 읽은 책은 <성경>이에요. 종교의 경전이라는 걸 떠나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잘 알려주죠. 그리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침묵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언어죠. 이는 건축론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추천하고 싶네요. 이 책은 1854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우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읽는 책은 <불안의 서>라는 꽤 두꺼운 책입니다. 저는 네댓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이에요. 한 권만 읽으면 경도될 우려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 집과 사무실 혹은 화장실에다 두고 읽는 책을 따로 두어요. 이를 두고 '난독'이라고 하죠. 읽는 속도도 꽤 빠른 편이에요. 읽다가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넘어가요. 그래도 알게 모르게 우리 머릿속에 잠재적으로 남아서 필요할 때 꺼내지곤 하니까요. 그 네댓 권의 장르는 겹치지 않는 게 좋아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동시에 읽다 보면 밸런스가 맞는 사고 체제를 유지할 수 있거든요. 물론 운이 나빠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꽂히는 책도 상당합니다.(웃음)"

이제껏 그의 약력을 채운 직함은 꽤 다양하고 화려하다. 파주 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에 이어 최근엔 서울시 총괄 건축가 보직을 맡게 되었다. 지식인으로서 또 건축가로서 이런 자리들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부담스럽죠.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 있어요. '인간의 고매한 인격은 고독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광장과 같은 공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즉 공적인 봉사를 통해 인격이 완성된다고 했으니 그런 자리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더불어 남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보람도 있죠."

그는, 자신은 적이 많다고 웃으며 말했다. 특히 서울시의 건축에 대한 자문뿐 아니라 정책 결정과 시행에도 관여하는 서울시 총괄 건축가를 맡으면서 매일같이 적을 양산하는 자리임을 확인하는 중이라고.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건축 정책을 총괄하는 것이 지금 제가 맡은 역할이에요.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곳곳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미 법규로 정해진 부분을 파헤쳐보면 절대 가만히 놔둬선 안 되는 것 투성이에요. 가령 도심 재개발 문제도 그렇고요. 결국은 용적률이 쟁점인데 이 때문에 개발업자들과 많이 부딪히고 있어요. 그들이 이익을 조금만 양보하면 많은 혜택이 시민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빤히 보이니까 제가 세게 나가는 부분도 있죠. 저의 목표는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복귀하는 거예요. 아마도 지금 맡은 '서울시 총괄 건축가'란 명패가 마지막 보직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의 손과 머리를 거쳐 탄생한 것들을 두고 혹자는 '지침서'라고 표현한다. 미술학자이자 그의 오랜 친구인 유홍준의 자택 '수졸당'을 비롯해 '수백당' '웰콤시티'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 '파주 출판단지' '퇴촌주택' 등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큰 잣대가 되는 작업물이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럼에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애를 먹인 작업은 무엇인지 물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어요. 매 작품이 실수투성이기 때문에 뒤돌아보기 싫었죠. 그럼에도 제가 항상 뒤돌아봐야 하는 건축이 하나 있어요. 처음 제 이름을 걸고 만든 '수졸당'이죠. 그 집은 제가 기억해야만 해요. 그래야 제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큼 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수졸당'은 저에게 그런 존재가 될 겁니다."

디자인이란 개인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집단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떤 작업방식을 고수할까? "뻔한 소리일 수 있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어쩌면 디자인이란 건 독재적이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결국엔 마지막 최종 결정자, 한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세상에 민주적인 디자인은 없어요. 물론 다수가 참여하고 그들이 낸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좋아요. 문제는 여러 사람이 결정하다 보면 책임 또한 분산된다는 거예요. 섣부른 민주주의를 빙자해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하기보다는 고독한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은 인문학을 비롯해 많은 학문과 닿아 있는 공부다. 다른 학문에 매력을 느낀 경우는 없는지 물었다. 대답은 단호했다. 건축을 하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학은 여전히 매력적이죠. 모태신앙이기도 하고요. 건축은 또 다른 형태의 신학이에요. 신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건축은 실제적인 공간을 다루고 종교는 형이상학이지만 결국엔 밀접하게 닿아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선 건축이 곧 부동산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건축은 문화적 창조 행위인데, 우리는 이를 사고파는 부동산으로 인식해왔다는 것. 그는 이것을 죄악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자신이 건축가로서 존재해야 하는 타당성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부동산 개발로 경기가 크게 부양되는 시절도 이제는 끝났다고 봐요. 앞으론 경제 성장이 큰 폭으로 이루어지기도 힘들 겁니다. 이제 이에 맞는 도시 설계가 필요해요. 제가 내린 답은 '도시의 재생'입니다."

지금은 독립체로서 건축대학이 존재하지만 예전엔 건축학과가 공과대학 혹은 예술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건축을 어떤 학문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건축은 건축이에요. 인류가 태어나서 집이 먼저 있었지, 절대 예술이 먼저가 아니잖아요? 기술 또한 마찬가지고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해요. 기술과 예술이 없던 시대에도 집은 있었어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집이란?

"인격체죠. '어떤 집에 사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주어진 틀이 아무리 열악해도, 의지가 있다면 본인의 생활 공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우리도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구나' 대강의 느낌이 오잖아요." 그는 옛 선비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사랑방 혹은 가구가 없는 빈방에서도 '문향'이 느껴진다. 문향은 '그 사람의 인격이 머무는 공간에서 배어나오는 향'을 뜻한다. 그렇기에 공간을 경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는 질문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였다. 현재나 미래나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집'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 명장이 생각하는 좋은 집에 대해 물었다.

"우리 속에 내재된 선함과 진실함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해주는 집이죠. 좋은 풍경이 있는데 그걸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과연 좋은 집일까요? 태양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뜨는데 그걸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게 하는 집과 볼 수 있는데도 차단하는 집이 있어요. 자,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는 뻔하잖아요.(웃음) 혹 옆집에 사는 이웃이 있다면 그들과 친밀하게 교통할 수 있는 집, 가족과 함께하는 집이라면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히 강화해주는 집, 저는 그런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낯선 동네일지라도 그곳에 난 길과 집을 보면 동네의 색과 성격이 보인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직접 고른 안경과 셔츠 같은 아이템을 비롯해 그가 말할 때의 손짓, 그리고 목소리 등에서 인생이 묻어나는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몸을 의자에 뉘며 여유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간에 잔뜩 예민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분명한 잣대가 필요한 때와 명분의 자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승효상이 만든 공간이 여전히 기대되는 이유다.

취재_박지현 객원기자 | 사진_ 이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