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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진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8. 24. 11:52

전남 진도의 여귀산 아래 탑립마을의 길이다. 간척지를 제외한 진도의 옛 마을의 길들은 마치 진도아리랑 가락처럼 논두렁을 끼고 이렇듯 유연하게 굽어있다. 이런 길을 장단을 맞추듯 걸어보면 섬의 시간이 육지의 시간보다 훨씬 더 느리게 간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논두렁 사이를 구불거리며 바다로 흘러내리는 진도의 길들이 마치 아리랑 장단 같습니다. 저물녘 진도 해안가의 허름한 식당에서 주인집 할머니에게 청해 들었던 애절하게 끓어 넘치던 진도아리랑의 한 소절처럼 말입니다. “…임이 죽어 극락을 가면 / 이내 몸도 따라가지 / 다려가오 잘 다려가오 / 우리 임 뒤 따라서 나는 가네…” 질러가지 않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진도의 바닷가 마을의 황톳길에서는 이런 유장하고 애절한 가락이 절로 떠올려집니다.

애써 둘러대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전남 진도. 이제는 쉽지 않은 여행지입니다. 그 앞바다에 속절없이 침몰한 세월호의 비극이 드리운 그늘 때문입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섬에서, 다 건져내지 못한 차가운 생명이 아직 잠겨있는 곳에서 무슨 풍경을 말하고, 무슨 먹거리를 말하겠습니까.

섬은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한창 휴가철 대목인데도 섬 안에서 가장 크다는 가계해변의 민박집은 텅텅 비었고 넓은 백사장에는 동네 아이 두 명만 덩그러니 놀고 있었습니다. 진도에서는 “육지 사람들이 진도에서 나는 해산물도, 이제는 농산물도 먹지 않는다더라”는 밑도 끝도 없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저희들 먹고 살 걱정부터 하냐’는 외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진도 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해 이런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진도 사람들의 이렇게 ‘안으로 삭여내던 아픔’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정유재란 때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에서 펼쳐진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의 빛나는 승전도, 진도 사람들에게는 패전한 왜군들에 의해 감행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무덤으로 기억됩니다. 고려 때 진도에서 결사항전을 하다 여몽연합군에 무릎을 꿇은 삼별초의 항쟁 때 진도 사람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비극의 기원은 모두 진도가 운명처럼 두르고 있는 거친 바다 때문이었습니다. 울돌목을 휘감는 거센 물살로 진도는 삼별초의 은거지가 됐으며, 그 물살이 명량해전 승전 뒤의 살육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끝내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의 거친 물살이 세월호를 삼키는 비극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래서 제 속으로만 삭여야 했을 비극과 한(恨)이야말로 진도의 뿌리입니다. 이 한이 비로소 노래가 되고 화선지 위의 그림이 됐습니다. 진도의 유장한 슬픔의 노래와 마른 붓질로 그려낸 거칠되 폐부를 찌르는 그림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도에 이제 또 하나의 슬픔이 새겨졌습니다. 세월호의 비극이 지나가고 있는 밤바다 위로 진도아리랑의 애절한 노랫가락이 출렁거렸습니다. “…임이 죽어 극락을 가면 / 이내 몸도 따라가지…” 진도에서 섬이 입은 상처와 거기 스며있는 한과 슬픔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에서 만났던 것은 처연하게 반짝이는 마치 ‘눈물의 결정’같은 것이었습니다.

전남 진도타워 아래서 내려다본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바다. 정유재란 때 이 울돌목 해협에서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대파한 명량대첩이 있었다. 바다 건너는 우수영이 있었던 해남 땅이다.



# 팽목항에서 만난 침묵과 혼돈

정면에서 얘기하자. 어차피 전남 해남에서 다리 건너 진도로 들어서면 세월호는, 그리고 팽목항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애써 외면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호기심으로 찾아가 볼 일도 아니다. 진도 사람들은 팽목항을 방문하려는 외지인들 앞에서 난감해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즈음 진도를 찾는 외지인들은 둘로 나뉜다. 팽목항을 가거나, 아니면 가지 않거나. 결정은 온전히 여행자 몫이다. 팽목항을 찾아가겠다면 지도 한 장 없어도 된다. 나뭇가지마다, 전봇대마다 나부끼는 노란 리본들이 팽목항으로 이어지는 길을 알리고 있으니 말이다.

진도에서 만난 시인 이평기(56) 씨. 그는 “팽목항을 가보겠다는 사람을 말려야 할지, 아니면 놔두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참담한 그 바다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도 걱정스럽다고 했다. 다들 그랬다. 팽목항에서는 누구나 침묵했다. 오래 묵은 방풍림을 두른 팽목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너머의 실종자 가족의 컨테이너 박스가 늘어선 포구에는 여태 슬픔이 고여있기 때문이었다.

전남 진도의 장전미술관 전시실에 걸려있는 작품들. 무심히 걸린 작품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의 대가들의 솜씨다. 사진 오른쪽 큰 그림이 다산 정약용의 ‘매화도’이고 왼쪽으로 순서대로 우암 송시열, 율곡 이이의 글씨, 석파 이하응의 시첩(위)과 난초, 공재 윤두서의 고목산수다. 그 옆으로 사진 밖에는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걸려있었다.

시인은 대뜸 지난달 초순 진도를 찾아온 성남 분당구의 새마을부녀회원들 얘기부터 꺼냈다. 마흔다섯 명의 회원들이 전세버스 편으로 진도를 찾았다고 했다. 면사무소에서 자매결연식을 갖고 어려운 처지인 진도의 농수산물을 사주기 위한 걸음이었다. 회원들은 행사를 마치고 팽목항을 가보겠다고 했다. 몇몇은 “도저히 눈물이 나서 갈 자신이 없다”고 물러섰다. 그들을 내려놓고 팽목항으로 향할 때 회원들이 ‘차를 잠깐 세워달라’고 했다. 그리곤 모두 검은 옷으로 갈아입더란다. 팽목항에서 혹시 유가족과 마주칠 수도 있을 테니 예의를 갖추기 위해 준비해온 옷이었다고 했다.

 

 

▲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 맞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진도의 남도진성 앞의 쌍운교. 돌다리 뒤쪽으로 성의 서문이 보인다.

진도 출신 시인은 그게 그렇게 눈물 나게 고마웠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이 아닌 진도 사람들이 고마워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호의 비극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한 진도 사람들은 그랬다. 안타까움은 더했고, 상처와 슬픔은 컸다, 하지만 어디 실종자 가족에다 비할까. 그들은 드러내놓고 슬퍼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사고 이후 섬을 찾아오는 발길은 뚝 끊겼고, 생업은 뒷전이었다. 그래도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네 달을 훌쩍 넘겼다.

 

팽목항을 끼고 있는 폐쇄된 서망해변 백사장에는 갈매기들만 제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 탓에 항구 쪽으로는 좀처럼 다가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진도를, 그리고 팽목항을 찾아와야 할 것인가. 주한외국인을 대상으로 여행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어드벤처코리아의 박갑정(42) 대표. 오는 10월 열리는 ‘명량대첩 축제’ 답사차 진도를 들렀다는 그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기부로 팽목항 주변에 ‘생각하는 의자’를 놓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 의자가 제도와 책임의식의 침몰, 그리고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가 가져온 비극을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다크투어리즘’. 재난이나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 체험함으로써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혼돈스러워했다. 섬 안에 고통의 기억들을 되살리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섬을 찾은 이들에게 ‘다 잊으라’고 하는 게 바른 것인지….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무책임함과 소외 사이로 “육지 사람들이 진도 수산물은 먹지 않는다더라”는 유언비어만 진도에서 빠르게 흘러다니고 있었다.

# 왜적의 죽음까지 거둔 진도 사람들

세월호 사고가 그렇듯이 진도에는 마음 편히 울 수도, 누구도 원망할 수도 없는 죽음들이 오래전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순신의 ‘명량대첩’이다.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수장시킨 영웅적인 승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진도사람들에게 명량해전은 한편으로는 처참한 비극을 뜻하기도 한다.

먼저 울돌목부터 둘러보자. 이즈음 연일 관객동원 신기록을 쏟아내는 영화 ‘명량’. 그 후광으로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좀 늘었다. 명량해전 현장을 보고 싶다면 진도대교 뒤편에 말끔하게 단장한 진도타워를 찾아가면 된다. 굳이 타워에 오를 것도 없이 칼을 빼 든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에 서면 20리까지 빠른 물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울돌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멀지 않은 벽파진에는 1956년에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가 서 있다. 거대한 바위로 거북을 깎아 그 위에 승전의 기록을 담은 비석을 올렸다. 비석에 새겨진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독특한 필체의 국한문 글씨가 특히 인상적이다.

 

진도 사람들에게 명량대첩이란 영화 속에 그려진 그것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울돌목에서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직후 진도의 비극은 시작됐다, 이순신 장군은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 신안의 당사도로 돌아갔다. 패전한 왜군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앞다퉈 진도에 상륙했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승전의 환호 뒤에 가려진 처참한 살육을 진도 사람들은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쌓인 죽음을 묻은 곳이 진도대교를 넘어 진도읍으로 드는 18번 국도변에서 만나는 ‘정유재란 순절묘역’이다. 확인된 것만 232기에 달하는 무덤이 아예 하나의 큰 언덕을 이룬 자리다.

이쯤 해서 ‘왜덕산’에 얽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다. 순절묘역에서 5㎞ 남짓 떨어진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 동쪽에 야트막한 야산인 ‘왜덕산’이 있다. 명량해전 당시 진도 사람들이 떠내려온 왜군의 시신을 거둬 묻었던 곳이다.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산 이름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라 했다. 애초에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유실되고 절반쯤만 남아있다. 진도 사람들은 대체 왜 칼날을 겨눈 적군들의 시신까지 거둬서 묻어주었던 것일까. 세계 전사에서 적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경우가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아마 바닷가 사람인 진도 사람들은 떠내려온 시신들을 차마 그냥 두고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건져내 묻었을 것이었다. 진도 사람들은 적의 죽음마저도 버려두지 않고 거뒀다. 일본인들에게도 그건 감동이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던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고향 주민들이 해마다 진도의 축제에 참석하고 이곳을 찾아와 한·일 양국이 다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이 없도록 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깊은 상처가 만들어낸 한이 예술로 피다

 

▲ 이순신 장군 동상
진도 사람들의 죽음과 한의 이야기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740여 년 전, 그러니까 명량대첩이 있기 320여 년 전의 일이다. 몽골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이곳 진도 벽파진으로 내려왔다. 삼별초는 진도에 성을 쌓고 자주와 평등세상을 기치로 내걸며 또 하나의 고려정부를 세웠다. 삼별초가 진도를 택했던 건 쉽게 건널 수 없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울타리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온 지 불과 아홉 달 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장군은 임회면 굴포리 포구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삼별초가 새로운 왕으로 세운 온왕도 의신면의 논수골에서 잡혀 죽었다. 궁녀들은 창포리의 궁녀둠벙에 몸을 던졌다. 그 흔적이 진도 땅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임회면 굴포리의 포구에는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제당이 있다. 경주 배씨 문중에서 제당 앞의 비석에 새긴 문장은 손이 델 듯 뜨겁다.

기록에는 뚜렷하지 않지만 삼별초가 무너질 때 또 얼마나 많은 진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삼별초가 당도한 때부터 진도는 곧 ‘반역의 땅’이었으니 주민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는 익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런 수많은 죽음과 남은 자들이 가슴 치는 한(限)은 진도가 마치 운명처럼 두르고 있는 거친 바다로부터 시작됐다.

세월호도, 명량대첩도, 삼별초도 진도의 거친 물살이 아니었다면 맞닥뜨리지 않았을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억울한 죽음. 그리고 포말을 일으키는 거센 물살이 나눈 육지와 섬의 경계. 진도의 소리에 스며든 한의 정서는 거기서 자라는 것은 아닐까. 비통한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가슴 치는 억울함이 그 탁하고 짙은 진도 소리로 빚어진 건 아닐까.

진도에 가면 그 깊은 상처가 만들어낸 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진도에서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국악상설공연이 열린다. 이 중에서 오는 23일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는 ‘재생 씻김의 굿’을 주제로 한 무대가 열린다. 판소리, 고풀이, 씻김으로 이어지는 진득진득한 진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다. 소리뿐만 아니라 진도에는 그림도 있다. 진도의 옛 속담 중에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는 게 있다. 탄광마을이나 흥청거리는 어촌 등에서는 개가 물고 다니는 건 늘 ‘1만 원짜리 지폐’지만 진도에서는 돈 대신 ‘붓’이다.

조선말기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거처했던 운림산방이야 진도를 찾는 이라면 누구든 들르는 대표적인 명소. 장전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다. 작고한 서예가 장전 하남호가 생전에 세운 이 미술관에는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율곡 이이, 공재 윤두서, 석파 이하응, 이당 김은호에 이르기까지 조선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대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여기다가 소치 허련, 미산 허은,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의 그림이 보태진다.

미술관에서 차를 되돌려 돌아오는 길. 그제야 한여름의 진도 소나무들이 마른 붓질로 빠르게 그린 추사의 세한도 속의 추운 겨울 소나무와 닮았다는 걸 눈치챘다. 추사는 권세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인심이 바뀌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진실한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진도의 비극 앞에서, 그 깊은 슬픔 앞에서 어떻게 진실해질 것인가.

진도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 목포나들목에서 나와 영산호 하굿둑과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를 지나 77번 국도로 갈아타고 해남 우수영을 지나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 땅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즈막한 망금산 정상에 지난해 새로 지은 7층 규모의 진도타워가 있다. 울돌목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진도타워에는 전망대를 비롯해 진도군홍보관, 역사관 등의 전시공간이 있다. 동선으로만 본다면 여기서 시계방향으로 벽파항, 용장성, 운림산방 순으로 보는 게 효율적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진도의 대중숙박시절은 읍내의 모텔이 고작이지만 대부분 낡았다. 가족단위라면 펜션을 택하는 편이 낫다. 금갑리해수욕장 부근의 팔도한옥펜션(061-544-7316)을 추천할 만하다. 한옥 형태지만 실내는 최신 설비로 꾸며져 있다. 진도의 낙조 풍경은 세방낙조전망대 부근 지산면 가학리의 ‘낙조펜션’(061-542-3006)이 좋겠다.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 왼편으로 ‘임하기사식당’(061-535-3121)은 한상에 7000원짜리 밥상을 내는데 푸짐한 반찬이 펼쳐진다. 진도대교를 건너 우회전하자마자 우측에 있는 ‘진도통나무집’(061-542-6464)의 1만8000원짜리 간장게장 정식은 진도 사람들도 알아주는 맛이다.


진도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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