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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시와 라틴 아메리카의 발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6. 22. 11:35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파블로 네루다 시와 라틴 아메리카의 발견

 

 

 

지리적 거리는 마음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라틴 아메리카는 우리나라의 대척점에 놓인 대륙이다. 이 대륙에도 6억명에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다. 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이 100명이라면 8명 내지 9명 정도가 라틴 아메리카인들인 셈이지만, 우리에겐 아무래도 먼 대륙으로 느껴진다.

 

라틴 아메리카를 생각하면 누구를 먼저 떠올리게 될까?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아니면 브라질 축구선수였던 펠레나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메시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가 우리에게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까운 대륙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라틴 아메리카가 우리나라와 닮아 있는 점이 적지 않다. 후발 산업화 국가라는 것도 유사하고, 식민지 경험과 군부독재를 경험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는 한때 대표적인 ‘제3세계’였고, 브라질 등과 함께 ‘신흥공업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 시선>, 정현종 옮김 | 민음사 제공

  라틴 아메리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지역 출신의 한 시인 때문이다. 그는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다. 라틴 아메리카가 낳은 뛰어난 소설가 마르케스는 네루다를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다소 과장했지만, 네루다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루다를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예술 양식으로서의 시가 갖는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노래하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노래로서의 시가 가장 오래된 예술 양식의 하나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는 우리 인간이 갖는 사랑과 슬픔, 삶과 죽음, 사회와 자연에 대한 느낌과 생각에, 정지된 사물들에게까지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네루다는 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1964)에 실린, 작품 제목인 ‘시’의 첫 부분이다. 목소리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 무엇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느낌과 생각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시가 되어 나타났는지를 네루다는 이렇게 생생히 묘사한다.

 

네루다는 1904년 칠레 남부에서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에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발표해 그의 이름을 라틴 아메리카에 널리 알렸다.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지상의 거처> 1·2·3 등을 발표해 스페인어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 됐고,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정치적 성향은 좌파였지만,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탁월하게 구사해 인간의 보편적인 느낌과 생각을 형상화함으로써 1973년 세상을 떠난 후에도 지구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애송돼 왔다.

 

둘째, 같은 제3세계인으로서 네루다에 대한 공감이다. 라틴 아메리카나 동아시아 모두 서구의 모더니티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어릴 적부터 내면화되는 서구중심주의는 그 관심을 주로 미국과 서유럽에 고정시킨다.

 

 

2014년 6월에 열리는 브라질 월드컵은 우리에게 ‘라틴 아메리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할 것이다. 그 대륙에는 삼바나 축구, 아마존 열대우림 이외에 당연하게도 다양한 삶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심해유전 개발권을 외국기업에 넘기는 것을 반대하는 브라질 시위대들. | AP연합

 

 

나의 경우 검은 눈이 아니라 파란 눈으로 세계를 독해하고 삶을 구성해 간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서야 비로소 우리 안의 서구중심주의를 돌아보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네루다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시인이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같은 폴란드 시인을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네루다의 시에는 서구적 사유와 그 방법에 구속되지 않은 인간 및 세계에 대한 자연스러운 그 무엇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세계가 복합적이듯 인간의 느낌과 생각 역시 복합적이다. 그 복잡미묘한 감성과 이성을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게 네루다의 시다.

 

네루다의 시는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인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동시에, 전문화된 추상주의를 넘어서 쉽고 분명한 언어로 우리가 대면한 구체적인 삶과 사회를 노래한다. 낯선 이미지들이 충돌하는 초현실주의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민중의 정서를 다채롭게 담아내는 그의 시들은 진정 경이로운 세계를 선사한다.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 난센스, / 아무 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 순수한 지혜; /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 풀리고 / 열린 / 하늘을, / 유성(流星)들을, / 고동치는 논밭 / 구멍 뚫린 어둠, / 화살과 불과 꽃들로 / 들쑤셔진 어둠, /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시’의 또다른 구절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동과 언어다.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노래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 양식이 다름 아닌 시다.

 

불현듯 우리 삶을 방문한 시, 새로운 하늘과 별과 밤과 우주를 펼쳐 보이는 시, 우리나라와 대척점에 놓인 먼 대륙 라틴 아메리카의 네루다가 이렇게 노래한 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느낌과 생각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같은 인간으로서의 연대감을 공유하게 한다.

 

  2014년 올해 지구적으로 가장 큰 행사의 하나는 6월에서 7월까지 이어지는 브라질 월드컵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다시 질문을 던지면, 라틴 아메리카를 생각하면 무엇을 먼저 떠올리게 될까? 아마존 열대우림, 잉카 제국, 이과수 폭포, 또는 삼바나 탱고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왔고, 네루다와 같은 시인들의 사랑과 슬픔, 희망과 좌절 또한 존재해 왔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