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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6. 2. 13:24

 

지금 우리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이응준 소설가 | 중앙선데이 제377호 | 20140601 입력

 

『대반열반경』이 전하고 있는 부처의 마지막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을 이렇게 타이른다. “슬퍼하지 마라.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 모든 것들은 다 변하고 소멸한다고. 변하고 소멸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문학과 대학원 시절이니 1990년대 중후반쯤이었다. 문예이론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날 수업은 존 케이지 등 전위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초청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키로 했다. 요셉 보이스의 백묵 낙서가 있는 칠판을 톱으로 잘라온 것, 통나무에 대못을 고슴도치의 가시들마냥 마구 박아댄 것, 요단강을 건너는 예수를 패러디하며 한 사내가 검은 양복을 입고 찍은 흑백사진 등이 아련하다.

 

한 시간 남짓 감상을 마친 우리는 카페에 둘러앉아 예술의 전위에 대한 토론을 나눴고, 그때 나는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저 작품들은 전위예술이 아닙니다. 저것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발표됐던 60~70년대 당시에는 아방가르드나 프로그레시브였는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흘러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 놓인 지금은 클래식이거나 화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잖아도 평소 악동으로 찍히기 일쑤였던 나를 교수님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아직도 나는 예술의 전위와 진보에 대한 나의 견해를 수정할 의사가 전혀 없다. 하물며 예술이 이럴진대, 인간사를 매 시각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이념의 외양과 내용이 고정불변할 리 만무하다. 만약 그런 정치이념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부처의 지적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결국 가짜라는 소리가 된다.

 

우리 사회는 통상적으로 진보라 하면 무조건 좌파 노선과 일치시키는 버릇이 있다. 특히 지식인들은 스스로 좌파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어울리지도 않는 좌파 행세를 하며 멋을 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와중에 그 반대편은 무조건 이른바 수구 꼴통 보수로 간단히 정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인문학적 이치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유사 좌파와 유사 우파만 판을 치는 대한민국에서 좌파와 우파는 서로 말이 안 통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며, 사상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마치 동물들처럼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개와 고양이로 분류돼야 더 과학적이다.

 

아무튼, 긴 군사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버린 탓인지 이 사회의 소위 좌파들은 소위 우파들 못지않게 치졸한 맹목을 거창한 정신이라고 착각하거나 위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탐구』의 맨 앞장에서 “무릇 진보라는 것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보이는 일면이 있다”는 오스트리아 희극작가이자 배우인 네스트로이의 말을 괜히 인용한 게 아닐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 이 사회의 유사 좌파를 진정한 좌파로 얼버무려준다 하더라도 진보는 좌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보는 “변하고 소멸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시대정신의 참다운 요구에 따라 변하고 소멸하는 끝에 다시 태어난다. 진보란 도덕적 고뇌 속의 용기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영명한 태도다. 그러나 야만적인 진영 논리만 난무하는 이 사회의 좌파에게는 앙리 레비, 에릭 홉스봄,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사유의 거울이 없다. 그저 박정희나 김대중, 박근혜나 문재인 같은 시대적 캐릭터들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좌파에게는 인간과 정치 본질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으니 그 올바른 적용 또한 없다. 한국 사민주의 정당들이 통일 대한민국에 대해 아무런 비전이 없는 게 그 좋은 예다. 한 사회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중재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지성이다. 파시즘에는 우파 파시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 파시즘엔 광기라는 마약에 정의감이라는 백설탕이 뒤섞여 있다.

 

나는 이념을 과신하는 자들이 무섭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욕심과 무지에 불과한 비극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고도로 농축된 고집과도 같아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념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회는 화약고와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속물은 언제나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의 거짓말보다 자기 거짓말을 더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좌파가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진보에 대한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이다. 갱신되지 않는 것들은 다 가짜다. 우리는 그것을 반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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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