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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낭만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5. 11. 08:15

제주도로 간 사람들, 바뀐 풍경들

소설가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서 행복은 시작된다.” 제주에서 제때 자기 목소리를 듣고 낙향한 청춘들의 불편하지만 행복한 삶을 봤다.

더 트래블러 | 에디터 류진 | 입력 2014.05.09 14:15 | 수정 2014.05.09 15:04

 

 

제주에 내려간 도시인들은 짐작보다 훨씬 불편한 일상을 산다.

삶이 우리가 누리는 도시의 축복보다 더 행복해보였다.

 

제주에서의 삶은 행복할까? 섬으로 건너가 사는 이의 증가율이 정점이다. 지난해엔 2만 5245명의 새 얼굴이 제주도민이 됐다. SNS의 타임라인엔 제주에 내려가 사는 이들이 매일 매시간 올리는 삶의 예찬들이 넘친다. 꽃, 바람, 바다, 햇빛, 마당을 누리는삶. 그곳에 낭만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치만 서울 꽃나무는 끈덕진 추위에 봉오리를 닫아버렸는데 그 섬 꽃들은 헤프게 만개했다. 보이기론 천국이었다.

결국 내려가기로 했다. 평소 시샘했던 제주인이 된 이들에게 미리 만남을 청했다. 제주에 내려간 도시인들은 뭐 하고 살까? 그들이 도시 몰래 누리는 것들을 아주 잠깐이라도 겪기로 마음 먹었다.

 

호주의 유일무이한 섬, 태즈메이니아Tasmania에서 이상적인-내 생각엔-삶을 만난적이 있다. 라즈베리 농장과 카페를 운영하는 아줌마, 린디의 인생. 린디는 일주일에3일은 일하고 4일은 논다. 카페가 있는 크리스마스 힐Christmas Hill에선 근면한 삶을,별장이 있는 태즈먼 페닌슐라에선 유유자적한 삶을. 별로 예쁘지도 않고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던 린디는 피안에 들어선 달라이 라마만큼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제주에도 분명 그런 삶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삶을 멀리서, 혹은 깊숙이 만났다. 환상을 충족시켜준 이가 있었을까? 공천포 바다 앞에서 예쁜 카페를 하는 처자를 만났다. (결혼이 인생의 지상과제가아닌) 30대 여성에게 그녀의 일상은 로망에 가깝다. 오후 3시, 밥도 파는 카페가 가장한가한 시간에 거길 찾았다. 나는 그녀가 가게 앞 꽃무늬 의자에 앉아서 바쁜 점심 영업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한숨을 돌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못했다.

말간 볼을 가진 예쁜 아가씨는 끊임없이 문을 여는 손님을 받느라 가스 불 앞을 떠나지 못했다. 생업이 있는 한 제주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 앞에 서 빨갛게 익은 볼이 식을 틈도 없이 바쁘다. "그래도 매일 바다를 볼 수 있는 삶은 부러워요!" 바다 앞에서 살았던 이가 캔디 눈망울을 하고 있는 내게 쓴소리를 퍼부었다. "정신 차려요. 바닷바람에 실려온 소금기, 습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매일매일 비내리는 여름엔 집 안 곳곳 곰팡이 꽃이 만개합니다. 가구는 늘 소금에 절어 있고. 바람은 또 모래도 부지런히 실어다 날라요. 밥을 지었는데 막 뭐가 씹혀와 애초에 바다 앞에서 나고 자란 게 아니면 꿈도 꾸지 마세요."

어떤 청년은 몹시 외로워 보였다. "전 어차피 도시에서도 사람을 잘 안 만나요."라고 했지만 외로운 걸 즐기는 건 시 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웃들을 사귀면 되지 않느냐고?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나? 제주 사람들은 DNA에 '배타심'이 있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현국 현대사를 연구한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일찍이 그걸 알았다. "제주도민들은 철저한 분리주의자들로서 본토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소망은 자기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다."

칭기즈칸 시절의 몽골, 조선의 탐관오리, 일제강점기에 이어 근래의 '제주 골드러시'까지 섬사람들은 수십 세기에 걸쳐 변형된 형태의 침략과 수탈을 견뎌왔다. 텃세 뒤에 숨은 아픈 상처를 잘 모르는 '굴러들어온 돌'들은 못 견디고 떠난다. 너무 외로워서.그래도 내려가서 살고 싶다. 현실을 보고 듣고 겪고 왔는데 여전히 열망은 식지 않는다.

제주 생활의 불편함은 지금 내가 누리는 도시의 축복보다 아름답다. 제주의 자연은 감성이 느릅나무 뿌리 껍질처럼 버석하고 마른 이도 축축하게 적신다. 곶자왈과 같은 경이로운 대자연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당에 심은 해당화 한 뿌리, 점점이 떨어진 동백꽃이 장식한 흙바닥, 동네 어귀, 정체를 몰랐던 나무가 어느 날 밤 몰래 틔워낸 꽃망울 같은 것에 찬탄하는 매일들. 제주에서 또 하나 놀란 것은 섬사람 대부분이 햇빛의 이동을민감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11시쯤 저쪽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와요. 그러면 볕 쪼임을 좋아하는 꽃 화분들을 그쪽에다 옮겨둬요. 석양빛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의자에서 제일 잘 보여요. 제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우리가 오매불망 퇴근만 고대하느라 오후 5시 30분쯤의 햇살이 무슨 색을 가졌는지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사는 동안 섬사람 이들은 몰랐던 영역에서 기쁨을 찾아 누리고 있다.

요즘 제주는 옛날만큼 심심한 깡촌이 아니다. 제주에 홀린 듯 모여든 예술가와 크리에이터들이 모의하는 일들이 로컬과 이주자의 주말을 윤택하게 채운다. 문화예술공동체'쿠키'의 수장이자 건축가 이승택은 6년 전부터 월평리, 걸매마을과 같은 깡촌에 그림을 입히고 이중섭 거리에 예술벼룩시장을 만들며 폐허가 된 빈집에 가난한 예술가를불러 제주의 문화 예술 지수를 높였다. 그의 뒤를 이어 더 많은, 다양한 부류의 도시인들이 내려와서 심심한 섬에 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제주에 내려가서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은 혼자서도 오롯한 이들이다. 자기 바깥에서 사는 재미를 찾으려던 이들은 1년도 안 돼서 짐을 싼다. 제주의 자연이 아무리 압도적이고 다채로운들, 요즘의 제주에 서울 못지않게 흥미로운 놀거리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들, 인구 59만 명, 면적이 1825제곱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섬에서 취할 수 있는 즐거움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제주 동쪽 산촌에서 만난 한 유목민은 말했다."아무와도 관계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자기 자신과 닷새 이상 신나게 놀 수 있는 사람이면 여기서 살아도 될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굉장히 신나는 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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