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지음
민음사
668쪽, 3만원
평생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을 연구하고 다산 사상의 대중화에 힘써운 박석무(72)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쓴 다산 평전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다산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실천적 학자’로서의 면모다. 쓰러져가는 세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다산이 치켜든 무기는 ‘공렴(公廉·공정과 청렴)’이었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공렴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공렴은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뒤 공직에 나가는 자세를 다짐한 시에서 썼다. “둔하고 졸렬해 임무 수행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 원하노라”는 시다.
저자는 “다산은 자신이 살아가던 세상을 온통 부패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어느것 하나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거듭 개탄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까지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고 했다. 그런 시대를 산 다산의 개혁정신을 집약한 말이 공렴인 셈이다.
다산은 유년 시절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16세에 서울에 올라온 뒤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적 방향을 정했다. 이후 1783년 4월 소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유생으로서 대과를 준비해 1789년 봄 벼슬길에 나갔다. 대과 급제 이전이 수학기이고 급제 이후가 사환기다. 다산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국왕 정조의 사랑을 받았고 사환기에는 더욱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 국왕의 경학강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역시 뒤에 다산경학을 형성하게 하는 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여러 차례 천주교 시비에 걸려 1795년 가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으며 1797년 가을 곡산부사라는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1799년 가을에는 형조참의를 사직해야 했다. 1800년 6월 정조 서거는 다산의 이후 일생을 결정짓는다. 노론벽파 정권이 수립되고 1801년 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면서 다산의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18년간의 유배기간은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오늘날 다산을 기억하게 만든 원천이기도 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방대한 학문적 작업이 유배 시기에 이루어졌다.
유배가 해제된 이후 만년 다산의 행적에 주목한 것 역시 이 책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방대한 작업을 유배기에 이루었으면서도 다산은 해배 이후 다시 당대 최고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개방적 자세에서 자신의 저서에 대한 수정·보완 작업을 지속했다.
이 책에선 다산의 개혁 정신과 함께 아버지, 형제, 동료로서의 깊은 정과 민(民)에 대한 사랑을 느껴볼 수 있다. 다산 당대와 후대의 다산에 대한 평가도 수록했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서문에 썼듯 비판적 조명보다는 다산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쪽이다. 저자는 “거대한 다산을 제대로 설명해 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수준 높은 다산의 사상이나 학설을 후세의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겠는가”라며 평전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조성을 아주대 교수
조성을은
아주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사학과에서 정약용의 정치경제 개혁사상 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 『여유당집의 문헌학적 연구』 『조선후기사학사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