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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행궁' 과거와 현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0. 27. 18:59

조선시대 '행궁' 과거와 현재

[중앙일보] 입력 2013.10.24 00:29 / 수정 2013.10.24 00:29

전란 대비, 왕실 자료 보관, 왕의 휴양 별궁 … 용도따라 천차만별

1 1904년 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북한산성 행궁의 당시 모습. 경사지를 따라 지어진 건물이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다.

행궁(行宮)은 왕이 궁궐을 떠났을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입니다. 행궁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됐는데 조선시대 들어 제도화되면서 다양한 용도의 행궁이 전국 각지에 세워집니다. 전란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됐지만 수원화성행궁과 남한산성행궁이 복원된 데 이어 최근에는 북한산 기슭 북한산성행궁 복원이 한창입니다. 조선시대 행궁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봅니다.

이영희 기자

# 무엇에 쓰는 행궁인고

조선시대 행궁에는 여러 용도가 있었다. 가장 큰 목적은 전쟁이나 내란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남한산성행궁(광주행궁)이나 북한산성행궁(양주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등이 이런 목적으로 지어졌다.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 등 왕실의 귀한 문서와 물건을 보존하는 공간이었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임금과 대비가 강화행궁에 피란했고 병자호란 때는 세자를 비롯한 왕실 일가족이 강화행궁에서 생활한 기록도 있다. 강화행궁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왕실의 귀한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장녕전(長寧殿)에는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모셨고 정조 때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중요 서적을 보관했다. 병자호란 당시 왕족은 강화행궁에 머물렀지만 인조는 남한산성행궁에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했다. 북한산성행궁은 실제 왕이 피란처로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실록의 사본과 의궤 등 귀중한 자료를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행궁은 왕이 능행이나 휴양을 위해 도성 밖으로 이동했을 때 머물던 거처로도 쓰였다. 왕실 가족의 묘가 있는 경기도 일대에는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등이 있었다. 임금의 휴식을 위해 지어진 대표적인 곳이 온양행궁이다. 온천을 중심으로 한 온양행궁은 세종 때 건립되었는데 세종이 손수 도면을 보며 건축을 감독했다고 전해진다. 왕이 온양으로 행차하면서 잠시 쉬어가는 용도로 과천과 시흥에도 작은 규모의 행궁이 마련됐다.

 

2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영괴첩`에 실린 ‘온양행궁도’. 3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4 경기도 수원화성 행궁 전경. [사진 문화재청·경기문화재단]
# 행궁 건축의 특징

 행궁은 위치나 용도에 따라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임금이 머무는 곳이었기에 궁궐 건축의 특징을 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행궁 건물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행궁터의 발굴 조사와 문헌 연구, 남아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장 위쪽에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내전이 있었고, 그 주변이나 아래쪽으로 임금이 신하들과 국정을 돌보는 외전이 지어졌다. 규모가 큰 행궁에는 궁궐의 종묘 역할을 하는 좌전(左殿)과 행궁의 사직단인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여러 관청건물과 군사시설이 들어선 곳도 있다.

 요양을 목적으로 지어진 온양행궁의 경우 구조가 독특했다. 『영괴첩(靈槐帖)』에 실린 온양행궁도 등에 따르면 행궁 중앙에 정전(正殿)에 버금가는 규모의 큰 온천욕실이 있었다. 왕이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 머물며 치료와 나랏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홍문관(弘文館)·승정원(承政院)·사간원(司諫院) 등 왕을 보좌하는 여러 국정 기관도 갖추고 있었다. 온양행궁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조선 후기 현종대에 이르러 어실 6칸, 온천 방 6칸을 비롯해 약 100칸 규모로 성대하게 다시 지어진다. 그러나 1904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온양행궁이 온양온천주식회사로 바뀌고 다시 신정관(神井館)이라는 온천 숙박업소로 변하면서 행궁의 흔적은 사라졌다.

# 깊은 산속의 요새, 북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은 지난해 시작된 발굴 조사로 차츰 그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행궁터는 사적 제479호로 지정돼 있다.

 북한산성은 숙종 38년(1712)에 지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연이은 외세의 침입을 겪으면서 강을 건너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행궁의 필요성을 절감한 숙종이 강한 의지를 갖고 완성한 행궁이다. 행궁이 계획되던 당시 북한산의 산세가 험준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는 이유로 많은 신하가 축성 반대 상소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병조판서 최석항은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해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하니 불편하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은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지키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며 공사를 강행했다.

 일제 강점기까지 남아있던 행궁은 1915년 7월 홍수로 인해 건물의 상당수가 쓸려나갔고 나머지는 산사태로 매몰됐다. 경기문화재단이 진행 중인 발굴 조사에 따르면 행궁은 왕이 집무를 하는 공적 공간인 외전과 왕이 거처하는 내전 두 구역으로 되어 있다. 1차 발굴 조사룰 통해 산사태로 매몰된 내전의 구조를 알려주는 바닥 시설이 확인됐는데 내전은 좌우 두 개의 온돌방과 마루를 포함해 28칸(가로 7칸, 세로 4칸) 규모다. 건물 앞쪽으로 대문으로 이어지는 어도가 있으며, 좌우에 궁녀나 내시들이 머물던 행각이 딸려 있다. 1745년 편찬된 『북한지』를 보면 북한산성행궁은 전체 115칸 규모로, 내전과 좌우 행각, 청, 중문, 대문, 수라소, 측소로 구성돼 있다.

 북한산성행궁은 북한산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국립공원 내에 위치해 산사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됐다. 조사팀은 “북한산성행궁은 남한산성행궁 축조 이후 90여 년이 지나 조성된 행궁으로, 17~18세기의 건축 기술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행궁터의 훼손이 크지 않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북한산성 행궁지 내전 영역.

# 슬픈 역사의 흔적, 남한산성행궁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행궁은 인조 2년(1624년) 7월에 착공해 1626년 11월 완공됐다. 병자호란 당시 임시 궁궐로 사용됐다. 전쟁에서 패한 후 인조는 남한산성행궁에서 나와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행한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에도 남한산성행궁은 함락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지리서 『택리지』에는 남한산성에 대해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 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

 왕의 처소이자 집무실로서 300년 넘게 쓰인 행궁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의병들의 거점이 됐고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1999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돼 10여 년에 걸친 공사를 거쳐 지난해 복원이 완료됐다. 전각과 정자 등 건물 252.5칸을 복원하는 데 총 215억원이 들었다.

 행궁은 상중하의 세 단으로 이뤄져 있다. 위쪽의 상궐은 임금의 처소인 내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행각을 포함하면 그 규모가 70여 칸에 이른다. 아래쪽 하궐에는 왕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관할하던 광주유수부의 관아가 있었다. 숙종37년(1711)에 행궁의 종묘인 좌전과 사직단인 우실을 갖추었고 정조22년(1798)에는 하궐 앞에 한남루(韓南樓)라는 정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행궁은 오랜 역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용됐던 기록도 많아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2007년 사적 제480호로 지정됐다. 경기도는 행궁을 포함한 남한산성일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 왕조 문화의 절정, 수원화성행궁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수원화성행궁은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부왕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러 이동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조 20년(1796)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했다. 정조는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을 기해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경의왕후)를 모시고 화성에 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화성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奉壽堂)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은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대 최고의 예술과 음식이 함께한 이 회갑연은 조선시대 왕실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그 전말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圓幸乙卯整理儀軌)』에 남아 있다.

 화성행궁은 건축적 가치뿐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와 사회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1996년 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아 행궁 복원공사가 시작됐고 2003년 봉수당을 비롯한 행궁의 주요 부분이 옛 모습대로 복원됐다. 1997년 행궁을 포함한 수원화성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참고 :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효형출판),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김일환), 문화콘텐츠닷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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