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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이 인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17. 20:33

돈벌이 인문학

[중앙일보] 입력 2013.06.17 00:53 / 수정 2013.06.17 00:53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인문(人文)의 바람이 드세다. 대학마다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단기·속성의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기업들은 경영과 인문학을 접목시키는 궁리에 골몰한다. 산업화의 물신(物神)과 이념의 도그마에 지친 한국 사회가 인문학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으려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필수적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진정한 선진문화는 인문정신에서 솟아난다. 삶에 대한 성찰, 균형 잡힌 역사의식,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화적 갈증, 관용과 상생의 열린 정신…, 그 은은한 인문의 향기가 나라의 품격을 드높인다.

 공동생활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는 시장이나 기업 또는 과학기술에 인문의 지혜가 녹아들어 사회의 경제적 체질을 개선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예컨대 인문에 감화된 경영철학으로 상품이나 용역에 따뜻한 인간미를 불어넣을 수 있고, 노사관계를 보다 인간적인 틀로 바꿔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기능이 아니라 가치다. 인문은 ‘인간다움’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온 말이다. 한마디로 ‘사람됨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문학은 사회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성하는 일개 부속품이 아니며, 시장권력의 도덕적 자기 합리화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애플의 창의적 제품을 만들었다”고 호언했지만, 그의 현란한 마케팅 뒤에서 애플 협력업체의 근로자들은 혹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시달렸다. 거대한 산업자본에 실용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인간다움을 획득할 수는 없다.
 인문의 가치는 개인과 사회를 자기 성찰의 자리로 이끌어 역사적 안목과 문화적 감수성, 책임 있는 공동체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오늘의 인문학 열풍에는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다. 인문학이 인간다움을 위한 고뇌를 내팽개치고 부(富)의 창출이나 취업의 도구쯤으로 전락된 듯한 느낌이다. ‘노장사상과 주식투자 기법’ ‘예수의 마케팅 전략’ ‘인문학으로 스펙 쌓기’ 등의 생뚱맞은 조어(造語)들이 인문학의 대중화를 내세우며 유행처럼 떠돈다. ‘인문을 배반한 인문학’이라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일류 호텔의 와인과 스테이크를 곁들인 교양강좌에서 만나 말재간 넘치는 인기 강사의 ‘간추린 인문학’ 강의를 들은 뒤 우르르 해외 골프 여행에 나서는 모습을 흔히 본다. 골프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이 부자들의 사교 클럽에 ‘교양의 외투’를 걸쳐주는 도우미처럼 비쳐 씁쓸할 따름이다.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逸話) 시리즈나 문학·철학의 말랑말랑한 토막 이야기 몇몇 개에 인문학의 깊고 너른 바다를 간추려 담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질식할 듯한 중세사회에 인문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었다.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은 역사를 되짚어 그리스·로마의 신화와 고전에서 자유롭고 진실한 인간상을 발견했다. 그들은 옛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냈다. 종교개혁자들은 근원(根源)으로 돌아갔다(Ad Fontes). 그들은 제도종교의 경직된 교의(敎義)를 버리고 성서의 살아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루터는 알았다. 성서에는 교황이 고귀한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을.”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에 쓴 말이다.

 인문학은 논리체계가 아니다. 논리를 뛰어넘어 직관(直觀)으로 나아간다. 인문의 영역을 문학·역사·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가장 뛰어난 직관인 종교와 예술이 ‘사람됨’의 길에 빠져서야 될 말인가. 그동안 인문학의 쇠퇴, 가난한 인문학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인문학은 본디 가난한 법이다. 종교와 예술은 더욱 그럴 것이다. 신앙이나 문화의 이름으로 호의호식하는 어떤 사람들이야 생각이 다를 테지만.

 인문학은 무슨 요령을 가르쳐 주거나 쓸모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식 보따리가 아니다. 오래도록 묵히고 삭힌 지혜의 바탕자리, 그 ‘오래된 새로움’이다. 인문학은 어떤 해답이 아니다. 삶과 실존에 대한 엄숙한 질문이자 궁극(窮極)의 자리를 향하는 관조(觀照)의 눈길이다.

 개발경제 시대에 정신문화를 제2경제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오늘의 인문학 열풍이 혹시라도 경제성장의 종속변수 구실이나 찾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인문을 배반한 인문학’이 돈벌이로 쓰이는 사회는 반인문적이다.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인문학이 잘 팔린다는 이즈음이야말로 진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닐까.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