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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2. 16. 09:39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박제천

 

 

시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시창작에 관한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내가 시를 창작하는 틈틈이 대학의 시창작 교실이나 문학강좌에서 시인 지망생들에게 창작 실기를 가르치는 걸 업으로 삼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대표로 있는 문학아카데미는 이 나라 최초의 전문 문학사숙으로 시·소설·동화 부문에 있어 명실공이 그에 걸맞는 명성과 내용을 갖추고 있다. 이 모임의 시를 수업한 학생들 중에 80여명은 이미 시단에 진출하여 그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문학아카데미가 출범한 것이 1988년도의 일이니 매년 10여명의 신진 시인을 배출한 셈이다. 여기서는 시인지망생 뿐이 아니라 이미 신춘문예나 각종 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들도 워크샵이란 그룹을 만들어 시창작의 새로운 충전을 꾀하고 있다.

 

처음에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시쓰기를 어떻게 스포츠처럼 훈련받느냐며 거부반응을 보이던 많은 시인들도 이제는 이 일에 흥미를 보일 정도로 세태가 바뀌고 있다(그들 중에는 아예 시작 지도로 나선 이도 적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정서적인 자연발생의 서정시에 익숙했던 기존의 통념일 수도 있겠고, 또 나와 같은 연배의 시인들이 겪었던 습작시절의 엉성한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내 대학시절만 해도 시창작을 강의하였던 미당 서정주 선생은 작품의 우열이며 장단점을 지적하는 대신 시인들의 일화나 정신의 분위기에 치중할 뿐이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또 초기의 우리 시인들이 자연 발생적인 명시 한두 편을 생산해 내고는 시대적, 개인적 상황으로 인해 더 이상의 시업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에도 기인할 것이다. 가령 소월과 같은 경우 타고난 정서를 소진하고 난 다음의 「돈타령」과 같은 타작은 가슴의 시에서 정신의 시로 나아가지 못한 시인의 실례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시의 수련을 시작의 기본으로 생각한다. 가슴의 시는 열일곱 여덟쯤의 그야말로 순연한 시인의 보석과 같은 타고난 정서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살이의 때가 끼이고 나면 더 이상의 맑은 서정을 생산해낼 수 없다. 그때부터는 시가 우리 삶의 중심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른바 정신의 시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과 시인의 관계에서 갈등이 만들어지고 시인의 시력에 따라 하찮은 일에서조차 삶의 기운을 찾아내고 그 기운으로 새로운 세상을 스스로의 가슴에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나는 내 학생들에게 정신의 자유로움을 권한다. 시 예술은 이미 오래도록 발전해 오는 동안 모든 금기를 해제시켜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시인되려는 자들은 상식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이다.

 

또한 나는 그들에게 시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문의 구조와 시의 구조가 같다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은 실로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시라는 것은 특별한 시어 몇 개를 가슴에서 느끼는 대로 써내려 가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시가 산문과 똑같은 구조와 단어로 씌어지는 것임을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이 단계에서 탈락하고 만다.

 

두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비교적 순항 일로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나의 지적에 약간의 거부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전면적으로는 나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의 시는 그들의 경험, 그들 정신의 자유로움, 정보의 충전이 되어 있는 만큼의 좋은 시를 보여준다. 나는 다만 그들의 작품에서 지적할 수 있는 표현의 결점을 지적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들의 상상력과 정신을 상승시킬 수 있는 조언을 해주게 된다. 이때의 조언은 문학 일반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예술과 인문학의 전분야는 물론 천문학이나 물리학, 동식물학의 일반 정보에 주력하게 된다. 나아가 나는 그들이 단지 시 쓰는 기계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 쓰는 방법 따위의 기능적인 제한을 극복함으로써 시를 그들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시의 생명력을 신명나게 즐기길 권하는 것이다. 시를 공부하면서 그들은 점차 부정을 긍정으로, 비관을 낙관으로, 갈등을 화해로 바꾸어냄으로써 그들 삶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버릴 수 없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나와 공부를 마치고 난 시인들이 문예지에 발표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대개는 만족해한다. 비슷한 시력의 다른 시인들보다 개성적이고 치열한 시정신을 불태운 작품들을 쓰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시는 대개 젊은 활력에 가득 차 있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같은 시인급의 여타 시인들보다 훨씬 안정된 구조와 상상력의 전개에 능숙하다는 것에 만족한다. 이것은 뒤집어 말해, 최근에 등장한 많은 시인들이 그 구조와 상상력에 결함이 많아 사뭇 불안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나에게 시를 배우러 오는 많은 학생들은 처음 시간에 구조와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개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시에서는 구조 따위가 하나도 중요할 게 없으며, 상상력 역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게 그들의 기초적인 상식임에 오히려 내가 더 당혹감을 가질 때가 많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학교에서 그들이 시를 배울 때 대부분의 교사들이 가슴의 시에 붙들린 채 정서적인 기능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교과서에 나오는 그 많은 명시에서 시인의 시정신을 이해하기보다도 그 내용을 감상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들 시가 본래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면이나 상상력의 증폭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죽은 시인들의 시만 배울 뿐, 살아 있는 시인들의 작품 변화와 같은 충격을 전혀 경험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무지일 수도 있다.

 

나아가 교과서의 시에 대한 입시방식의 표본적인 해석 역시, 그들의 자유로운 시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우식이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교과서와 참고서’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자.

 

참고서의 제일 앞에 실린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1)분류: 자유시, 서정시, 전통시, 낭만시, 민요시

 

2)운율: 내재율(7.5조가 바탕으로 된 민요조)

 

3)사상적 배경: 유교적 휴머니즘

 

이상은 소월시의 분석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만을 뽑은 부분이다. 김소월의 시연구에서 보면 오세영은『한국 낭만주의 시연구』에서 낭만주의 시로 김소월 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민요시로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낭만주의 시와 민요시는 같은 성질의 개념을 지닌다. 또 전통시라고 했는데, 시의 분류에서 전통시란 개념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전통시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전통시인지, 우리 시에는 전통시로서 무엇을 들고 있는지도 정확치 않다.

 

가령 김소월 자신이 민요시인으로 자신이 불리어지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면 그의 시는 일단 민요시로서 취급하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김소월의 시세계는 마땅히 다른 부문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모든 시들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두 갈래 속에 든다.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라고 일컬을 때는 서정시를 말한다. 서정시란 큰 그릇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를 담고 때에 따라 잡다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진달래꽃」을 나는 상징주의 시로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틀린 관점이겠는가.

두번째 김소월의「진달래꽃」을 내재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대시의 율격을 지닌 시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괄호 안에는 ‘7·5조가 바탕으로 된 민요조라고 하고 있다. 이 말 자체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참고서에는 7·5조란 부언하여 설명하기를 7·5조는 일본시가의 율조다. 일본 시가의 율조인 7·5조가 우리 시에 쉽게 수용된 것은, 그것이 7·3, 2·3조 또는 3·4, 3·2조 등의 음절 수로 분래되어 우리 전통 시가의 율격과 쉬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5조는 우리 동요의 기본 율조가 되어 있을 만큼 이제는 우리의 전통적 율격으로 편입되어 있는 실정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7·5조가 일본 시가에서 온 것이라면 민요조가 될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민요조와 동요조는 또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학계에서는 소월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음보격으로 시의 율조를 이해하려고 한다. 시조도 3·4조의 자수율의 특징아닌 방향으로 가듯이 소월시도 3음보격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 째로는 사상적 배경이 유교적 휴머니즘이라고 한마디로 못박고 있는 것도 불만스럽다. 참고서의 작품 해설 어디에서도 이 말의 근거가 될 말을 찾으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가 ‘유교적 전통사회의 여성으로서의 인종과 체념이 깔려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유교적 휴머니즘이라는 말인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의 해설은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했는데 그것을 일컬음인가. ‘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이라 했는데 이것은 불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더욱더 못마땅한 것은 ‘학력평가문제’라고 하여 4지선다형적인 문제로 시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그 한 예로 들어보았다. 참고서가 이러하니까 학생들은 시를 난도질하여 O, X로 감상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학교에서도 그 비슷하게 배운다고 친다면 시교육의 문제성은 여간 큰 일이 아닐 것이다.

 

새삼스럽게 시는 다의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을 거론할 것도 없이, 강우식의 글은, 죽은 시인들의 시를 배우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게 우리 교육의 실정임을 밝혀주고 있다.

 

다시 말을 모으면, 이런저런 여파로 인해 독자와 시인들의 상당수는 시는 산문과 다르므로 구조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쓰고 읽으면 된다는 소박한 생각과, 그 감정에 걸맞은 아름다운 시어와 조어를 만들어 쓰는 것이라는 별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시가 문학예술의 핵심이고 문학을 예술의 중심이라 하는 것은 모든 예술의 동력이 되고 있는 상상력을 시각화(문자화)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언제 어디서나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그 상상력을 전달하고 그 설득력을 공감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필연적인 내부구조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모든 작품에는 발단이 있으며, 그 전개와 변화를 거쳐 비로소 마무리를 짓는다. 이러한 흐름이 필요한 것은 갈등을 고조시킴으로써 화해의 감동을 고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복잡다단한 구조를 쉽게 살펴보기로는 시만한 것이 없다. 우리 시나 한시가 갖고 있는 기승전결 4단계의 기본적인 구조가 그것이다.

 

구조는 대체로 3단, 4단, 5단으로 나눌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을 입체화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는 흐름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한 구조를 택하거나 그 흐름을 단순화하거나 역류시킬 수도 있다. 예컨대 발단이나 결말 부분을 더욱 세밀하게 나누어 4단구조로 쪼개어 볼 수도 있고, 결말만 확대시킬 수도 있다.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창출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자유로운 구조 변환은 기본적인 구조를 체득한 다음의 일이다. 초심자의 경우 구조를 모른 채 작품을 써대므로 자기가 쓰는 작품의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작품 쓰기에도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좋은 시인들의 시작품을 보면 그 중에는 그 내용의 확산을 위해 나름의 구조를 창안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 때문에 변형 구조를 못 알아본 채 명작시에도 구조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시인도 많다. 기본 구조를 알아야 변형 구조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아예 구조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망발이 아닐까.

 

또 하나의 문제는 상상력에서 제기된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구조가 표현의 형식이라면 상상력은 표현의 내용이고 날개이다. 상상력은 상상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실제적인 것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 점이 공상과 구분된다. 정신병자의 망상은 한마디로 말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며 일반인의 공상은 실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상력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은 실제적인 것, 즉 오브제의 채용에서 나온다. 오브제란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는 태반이다. 상상력 자체는 보여지거나 만져질 수 있는 실체가 없으므로 실재하고 있는 오브제를 통해서만 그 힘을 극대화할 수가 있다.

 

예컨대 ‘사과’라는 오브제를 채택한 세 시인의 작품을 보자. 사과와 같은 흔한 오브제의 하나가 시인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어떤 속성을 골라내는가, 어떻게 해석되는가, 어떤 상상력의 날개를 다는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눈이 부신 그의 몸 속으로 손을 뻗어 사과 하나를 따서 먹었다 사과는 그저 혀 끝에서 달고 새콤하게 사라졌다 나에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를 따서 먹었다 또 하나 하나씩…… 사과 속에는 색이 들어 있었다 사과 속에는 향이 들어 있어 내 몸 가득 번져 나갔다 어느 날부터 사과를 따서 먹으면 내 눈이 열린다는 것을 사방에서 선명한 색깔들이 알려 주었다

 

내가 다 따버린 엉성한 사과 나무가 가지뿐이더니, 빛무더기처럼 희미하더니 서서히 안개가 내리고 사과 나무가 묻혀 버렸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내 몸 속으로 손을 뻗어 사과를 따기 시작하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곽정례「사과 속에는 색이 들어 있었다」

 

곽정례는 사과에서 ‘색’이라는 미세한 속성을 집어낸다. 그리고 ‘사과를 따서 먹으면 내 눈이 열린다는 것을 사방에서 선명한 색깔들이 알려 주었다’고 시침을 뗀다. 사과의 색을 뒤집어 강조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과 오브제가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이다. 사과로 인한 상상력은 마침내 시인 스스로가 사과나무로 변신하는 극적 전환을 통해 한꺼번에 놀라움과 깨우침이라는 마무리를 짓는다.

 

 

5월의, 사과나무 꽃으로 가득한 과수원엘

가 보았네

 

사과나무 가지마다 찬바람이 스쳐간 자국

마디마디 흰 꽃으로 핀 바람의 향기를

맡아 보았네

 

꽃 무더기 속으로 길이 사라지고 꽃이 떨어진 곳에

길이 열려도 꽃 그늘 속에서 환히

웃으시는 아버지는 물이 고여 있는 울퉁불퉁

크고 작은 길에 떨어진 말씀의 향내를 쓸어내는

법이 없었다네

 

꽃보라로 온통 뒤덮인 72.6×90.6cm

오지호의 사과밭을 보다가 나는,

문득,

꽃잎꽃잎 떨어져 나간 자리에

푸른 시간의 열매가 맺히는 걸

보았다네……보았다네

 

― 김영「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김영은 사과꽃을 선택하되 개화가 아니라 낙화에서 의미를 찾는다. 3행의 ‘사과나무 가지마다 찬바람이 스쳐간 자국’은 세심한 복선이다. 도입부의 개화와 향기를 노래하면서도 마무리의 전환을 예비한 것이다. 또한 전환은 ‘오지호의 사과밭’을 내세움으로써 실제의 현실이 아님을 강조하는 동시에 ‘푸른 시간의 열매가 맺히는 걸’ 설득력 있게 마무리 짓는다.

 

… 상략 …

물컹물컹해진 썩은 사과에서는 잘 익은 술냄새가 난다

그것은 또 다른 향그러움

살을 썩히고 제 썩은 살에 담겨 있는 까만 씨앗에서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내 바깥에 나가 새 어린 사과나무가 되어라)고 재촉하는 속삭거림이 들린다.

그렇게 사과 한 알은 무너져 내려 씨앗들을 땅 위에

내려놓고 있다.

그렇게 너와 나의 살은 썩어가고 있다.

술냄새 푹푹 풍겨대며

밤사이 깊은 숙취에서 잠깨어 눈뜨는 이른 새벽

지끈거리는 머리속으로 속눈썹으로

(어서 깨어나라, 어서 깨어나라)

햇빛들이 사정없이 들이친다.

 

― 이나명 「썩은 사과에서는 향기로운 술냄새가 난다」

 

 

 

 

이나명의 시에서는 썩은 사과와 씨앗이 두 속성으로 나타난다. ‘살을 썩히고 제 썩은 살에 담겨 있는 까만 씨앗에서(눈을 떠라, 눈을 떠라, 내 바깥에 나가 새 어린 사과나무가 되어라)고 재촉하는 속삭거림이 들린다.’가 절정 부분이다. 마무리쪽의 ‘숙취’가 연결성이 약해서 그 증폭을 상승시키지 못한 흠이 있다.

 

따르릉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다 에미냐?

아 어머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별일 없으시죠?

으 응 그래그래 너희들도 별일 없지?

네 네 한번 찾아 뵙는다는 게 죄송합니다 어머님

괜찮아 작은애들은? 별일 없겠지?

그놈 요즘도 그 짓이냐?

아직도 남대문이 쥐구멍만 하고 하늘이 돈짝만 하데냐?

어쩔려구 그런다니 나이가 얼만데?

그놈 귀신 붙은 거 아니냐?

안되겠다 그냥 두었다간 나라 팔아먹겠다

그 삐삐 번호 좀 대주거라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따그닥 전화가 끊어졌다

 

어머님 어머님?

아니 그럼?

무덤에서?

한 밤 중 에?

 

― 하시현「무선전화」

 

하시현의 시에서는 어머니와 전화라는 이중 오브제를 쓴다. 단일 오브제의 두 속성이나 연결성이 밀접한 이중 오브제의 두 속성은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어머니에 관한 표현은 대개 효과를 보기 어려운데, 하시현은 대화라는 장치로 그 단조로움을 벗어난다.

 

방울새 기억만큼이나 우리네 삶은

이다지도 더딘가

데리다는 그래서 아마도

差延을 얘기했나보다

아들과의 약속은 또 지연된다

남발된 부도수표들이

온 집안을, 온 우주를 떠돈다

주말엔 꼭 서부로 가서 아이맥스 영화를 보자고.

해저 구만리로 부자가 함께 가 보자고

새순같이 약속을 해 놓고는

낙엽처럼 또 어기고.

마흔 일곱 시간밖에 안간다는

방울새의 기억처럼 우리네 삶은

이렇게 언제나 지연되기에

沙翁은 광대의 입을 빌어서 말했던가

맹세를, 약속을 하지 말라고

그것은 필경 기억의 종살이니까

 

― 고명수 「방울새 기억만큼이나 우리 삶은」

 

고명수의 시는 중심어가 ‘약속’이다. 추상적이므로 단조로울 수밖에 없으나 방울새로 도입부와 마무리를 삼았을 뿐 아니라 복선의 구실까지 맡겨 초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또한 약속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철학자 데리다와 작가 세익스피어(사옹) 등의 인명을 첨가해 읽는 재미를 돋구면서 의미를 심화시켰다.

 

 

물을 먹었더니 소리가 났다.

식도를 지나 위에서 소장으로

손을 넣어 배를 꾹꾹 누르자

출렁거리며 파도 소리가 났다.

나는 내가 먹은 물 속에 빠졌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추워서 오돌오돌 떨고 있다.

입 안으로 짠물이 올라왔다.

 

의사는 물에 빠진 나를 쳐다보면서

물약을 주었다.

방안으로 넘치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에게 의사가 말했다.

“이 약을 먹어야 해, 먹으면 괜찮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물을 억지로 참으며

할 수 없이 나는 그 말을 믿고 물약을 먹었다.

그때 노란 파도가 얼굴을 때리며

나는 단번에 터져버렸다.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운을

빨아 입고 옆방으로 갔다.

나는 꿰매지도 못하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그냥 방바닥으로

스며들었다.

 

― 신기린「가운을 입은 사람」

 

신기린의 시는 실제와 상상을 교직시킴으로써 일상의 물을 알레고리로 바꾸어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1연은 물과 물에서 연상된 파도를 대입시켰고, 2연과 3연에서는 ‘의사’를 등장시킴으로써 초점을 모았다. 그러나 ‘터져버림’(2연)과 ‘꿰맴’(3연)을 병열시킴으로써 마무리가 약화되었다.

 

 

따라서 한편의 시는 그 도입부에서 오브제를 보여주고, 전개부에서 오브제에 걸맞는 상상력을 전개하며, 전환부에서 오브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갈등을 보여주고, 결말부에서 그 갈등을 시인이 풀어낼 때 형식과 내용이 일체화할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시의 구조란 이렇듯 단순하다. 시에도 구조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의 작품이 그 발단과 이어짐, 전환과 마무리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은 최소한의 평균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 오브제에게서 찾아낸 새로운 발상이 담겨지고 상상력을 따라 그 내용이 증폭된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이들 신진시인들이 물론 나의 사숙 학생들의 대표는 아니다. 무작위적으로 근래 나온 작품집에서 골라본 것이다. 이들이 써내는 작품은 하나같이 요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담겨 있고, 그 삶에서 건져올린 진국이 있다. 이들이 얼마나 더 고도한 전문 시인으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쓰고 읽는 이런 시인들의 바탕 위에서 우리 시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하고많은 시인들이 대학의 시학 교실이나 이론서에서 전문적이고 추상적이고 난해한 해외 시론에 감염돼 좋은 시의 기본 구조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소설과 같은 시나 관념적인 유희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재능의 낭비인가. 이제부터라도 유치원으로 돌아가 시의 구조며 상상력, 오브제와 같은 기본사항부터 따져볼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