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뭇별이 들려주는 이야기(마음글)

타인의 삶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2. 11. 10:29

 

타인의 삶

 

심경호/고려대 문과대 교수·한문학

 

지난 26일 밤에 EBS TV에서 독일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2006)을 방영했다. 1984년,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의 대위 비즐러가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다가 두 사람의 삶과 사랑에서 감동을 느껴 양심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냉혈한이었던 비즐러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도청 헤드폰을 통해 드라이만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드라이만의 혐의를 은폐하기 위해 보고서를 조작하고, 크리스타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결국 반체제 예술가들을 와해시키기 위한 비밀경찰의 작전이 실패한 후 비즐러는 우편물 감시원으로 좌천됐다. 5년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는 우편집배원으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나갔다.

 

한편 드라이만은 자신이 동독 시절에 고초를 겪지 않은 것이 한 비밀경찰의 보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 만나려다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2년 동안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의 소설을 창작해 속표지에 그 비밀경찰의 암호명을 적어 책을 그에게 헌정한다. 비즐러는 마르크스 서점에서 그 책을 한 권 사서는, 이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라며 점원에게서 포장 없이 건네받는다.

 

악인으로 분류되는 사람의 내면에도 아름다운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영화는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2003년에 교토대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선배 일본 교수가 자신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기에, 깊이 공감한 일이 있다. 그는 중국문학의 자서전에 대해 책을 지었다. 나는 김시습 평전을 출간한 직후였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일을 전업으로 삼았기에, 우리는 과연 타인의 삶을 제대로 서술한 것인지 두려워했다.

 

실은 고전 인문학은 타인의 삶을 엿보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한 인물이 언제 태어나 언제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언제 좌절을 겪고 언제 저술을 하고 언제 죽었는지, 세세한 연대기를 작성하는 일이 연구의 출발이다.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고 내 내면의 ‘아름다운 영혼’이 깨어날 때, 고전 인문학을 선택한 보람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논어’를 읽을 때마다 조선후기의 이덕무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가슴속에 불만이 있으면 까닭 없이 슬픔이 생겨 탄식하게 된다. 그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어’를 읽으면 기분이 풀어진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성인의 기상이 천년 뒤에도 사람의 객기를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친구 김희문도 말했다. “형의 말이 어찌 그렇게 내 마음과 같은지! 지난해 북한산에 올라가 ‘논어’를 공부하다가 눈이 내린 뒤에 동쪽 성문에 올랐더니, 첩첩한 산봉우리는 뾰족하고 눈빛은 눈을 어지럽게 하여 마음이 매우 쓸쓸해졌어요. 급히 돌아와 ‘논어’를 읽었더니 마음이 가라앉았답니다.”

 

그들은 ‘논어’에 형상화돼 있는 ‘한 인간’과 교감했다. 사실 ‘논어’를 읽는 일은 ‘한 인간’을 배우는 일이다. 경구를 외워 교양을 쌓으려 하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술이’편의 이 구절은 어떤가! “공자는 남과 노래를 부르다가 그가 잘 부르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고 그와 맞춰 노래를 불렀다(子與人歌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고 而後和之러시다).” 공자는 이렇게 남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 수 있었던 온화한 인물이었다. 그 인격에 접하는 순간, 우리는 울근불근하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런데 고전 인문학 공부에서 가장 경계할 일은 ‘그 사람을 이미 알고 있다’고 간주하는 일이다.

 

명나라 말의 양명좌파 이지(李贄)는 ‘지불원의 공자 상에 쓰다’라는 글에서 공자를 대성인으로 여기는 선입견을 비판했다. “사람들이 공자를 대성인이라 하므로 나도 그를 대성인으로 여긴다. 모두 노자와 불교를 이단이라 하므로 나도 그것들을 이단으로 여긴다. 사람마다 정말로 대성인과 이단의 차이를 아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과 스승의 가르침을 익숙하게 들어서 그러는 것이다.”

 

고전 인문학에서만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타인을 규정할 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알아 나가고 타인의 영혼과 교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타인을 살피고 규정하고 비판하는 데 급급해한다면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도청 헤드폰을 통해 남의 언동을 훔쳐보는 쓸쓸한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영화 속의 비즐러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고는 마지막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은 영화의 완결된 구조 속에서만 가능할지 모른다. 실생활에서는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던 결단을 보상받지 못할 수 있다. 고전 인문학의 경우도 옛 사람의 삶을 살피는 것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옛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발견하고는 상우(尙友·옛 사람과 친구가 됨)의 기쁨으로 환한 미소를 띠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