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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윤리의 윤리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2. 4. 02:02

 

탈윤리의 윤리성

 

황정산

 

 

시를 많이 쓰지도 잘 쓰지도 못하지만 시인 모임들에 나다니며 시인으로 행세한 지 십 년이 가까이 된 것 같다. 내게 부여된 그 어떤 직함보다 시인이라는 호칭이 가장 듣기 좋다. 그래서 시인들끼리는 ‘박선생’, ‘김교수’ 이렇게 부르지 않고 서로 서로 ‘황시인’, ‘변시인’ 이라 부르며 좋아라 한다. 시인이라는 호칭이 주는 충만감과 자긍심을 시인들만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자랑스러운 시인이 되고 난 이후 “시인이 뭐 이래.” 이런 힐난을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런 힐난에는 서로 상반된 견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시인의 행실이 조금 불량하거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일 때 가차없이 “시인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이렇게 나무란다. 반대로 시인이 너무 반듯하고 모범적이어도 “당신 시인 맞어? 그래서 시를 쓰겠어?” 라고 빈정댄다.

 

이상한 일이다. 비도덕적인 시인을 욕하다가 착한 시인을 보면 시인이 너무 반듯하다고 또 뭐라 한다. 하지만 시인을 폄하하거나 시인을 옥죄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적에 사실은 진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단 시인은 윤리나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시인이기에 더 높은 정도의 윤리나 도덕을 요구받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나 도덕은 좀 특별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 시인들이 왜 시를 쓰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지 시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 시로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창조의 기쁨이 우리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언어에 의해 표현되어 왔던 세상과 삶을 새롭게 다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한 삶의 성찰이 바로 시를 쓰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인의 윤리성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는 아주 막연하고 광범위한 것이다. 시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이다. 시를 통해 삶과 세상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시인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모범적인 시인을 폄훼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좀 불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서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해명해보고자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왜 꼭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어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량해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는 폼나게 불량해지는 방법으로 시를 썼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가난한 지방 소도시의 답답함과 당시 학교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과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껏 불량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모자를 삐닥하게 쓰고 교복 단추를 몇 개 풀고 운동화 뒤축을 밟아 신는 것만으로는 불량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방 안에 자전거 체인을 넣고 다니거나 몰려다니며 패싸움을 벌이는 대범함을 원래 타고 태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가 가장 효과적인 불량기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시를 쓰는 이후로 그 지긋지긋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비실비실 웃을 수 있었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5.16이 어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사회 수업을 빠지고 백일장 대회에 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를 쓰면서 중국집 2층에 모여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가끔은 그 술값을 국어 선생님이 내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폼나는 불량함을 선사해주는 시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면서 나는 무엇인가를 안 하는 불량함을 누리고 있다. 시를 쓰면서 나는 아이의 성적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불량한 아버지이고, 집안 살림에 얼마나 돈이 드는지는 시를 쓰는 동안 생각할 겨를이 없어 불량한 가장이 된다. 공권력이 힘없는 자들을 짓밟거나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권리가 덧없이 무너져 가도 나는 시를 쓰면서 아니 시를 쓰니까 애써 외면할 수 있었다. 시를 쓰면서 나는 건실한 가장과 건전한 시민이기를 포기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이렇듯 시는 내가 불량해지는 핑계이고 또 원천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시와 시가 주는 불량함이 내게는 너무 소중하다. 그것으로 나는 세상을 견디고 또 다른 불량한 인간들과 소통을 한다. 그래서 그 불량함이 건전한 세상과 굳건한 정신에 흠집을 내고 착한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킬 것은 지키며 착하게 살라는 모든 권력의 강요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나의 불량함이 세상에 불온한 공기를 퍼뜨리고 있다는 즐거움에 젖어 있다. 이렇게 불량함을 전파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고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인은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쉽게 말해 불량함이 윤리가 되는 존재이다. 세상의 가치에 반하고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권력이 쳐 놓은 질서를 애써 거부하는 불량함을 통해 삶과 세상을 성찰하는 윤리를 실천한다. 바로 비윤리 또는 탈윤리가 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고 규범화된 윤리를 맹종하는 시인은 비윤리적이라 단언할 수 있다. 더러 그러한 시인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안주하며 위안을 느끼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거나 권력의 시혜를 얻어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규범의 강요에 신음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교의를 설파하고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갖게 하는 것은 시인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갖지 못한 또는 시인이 이미 버리고자 한 권력의 역할이다. 시가 권력에 복무할 때 시인은 타락한다. 시인이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교의나 정의로운 정치적 이념을 전파한다 하더라도 그때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권력의 입이 된다. 시인은 권력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불량하게 대들고,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꿈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시는 자유의 다른 말이다. 때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시와 시인은 비윤리적이다

 

『우리시』 황정산 서재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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