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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시인이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 12. 16:55

 

한국 사회에서 시인이란?

 

 

대담자

김백겸 : 시인, 《시와표현》 주간

이동재 : 시인. 문학평론가

황정산 : 시인, 문학평론가, 본지 주간

이병금 : 시인,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사회자(편집자) : 먼저 한국 사회에서 시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등단제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등단 제도 무엇이 문제인가요?

 

김백겸 :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신춘문예와 저명 문인의 추천제도에 의해 문인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시집 출판이나 동인지 등의 형태를 통해 문인이 되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예비문인들은 신춘문예나 저명 잡지의 추천제도의 권위에 기대어 머리에 문인이라는 관사를 얹고 싶어합니다.

이러다 보니 문학적 가치나 미학의 판단은 심사위원 혹은 등단매체의 편집방향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작품집의 구입으로 이차 판단을 하게 되는데 과거에 문인들의 작품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문화의 선도 역할을 하던 시대에는 이런 이차 판단의 기회가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문학작품을 일반소비자들이 외면하는 시대입니다. 작품의 문학적 가치와 미학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심사위원들이 결정하는 독점구조로 굳혀졌습니다.

예비 문인들은 신춘문예 시의 경향이나 심지어 심사위원의 경향까지 예상해서 작품을 쓰는데 이는 자신의 문학적 소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비문인들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가 감추어지고 맙니다. 신춘문예를 통과해서 10년-20년 후에 현역으로 활동하는(소위 말해 살아남는) 작가의 수가 10% 정도라 합니다. (활동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매체에 작품을 일정량을 발표하거나 작품집을 내서 자신의 표현영역을 지키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습니다.)

치열한 등단이라는 신춘문예제도가 이 정도이니 잡지의 추천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작가의 역량 판단은 긴 세월이 필요한데 후보작품 몇 편의 작품으로 문학적 자질을 판단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양처럼 작품집 출판으로 시작하는 제도가 더 합리적인 제도라 생각됩니다.

신춘문예와 잡지 추천제도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등단 제도여서 현실적으로 이 제도의 변경은 단기간에 쉽지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현 제도를 운영하되 예비문인들은 응모에 모두 작품집 한 권의 분량을 제출하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문이나 잡지 매체에서 상금과 함께 책임지고 당선자의 작품집을 출간해 독자의 이차판단을 가미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제도와 서양의 합리를 모두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공부가 미처 안 된 후보자가 요행으로 작가가 돼서 본인의 문학공부와 한국문학 모두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등단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황정산 :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인이 되는 길은 관례적으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신춘문예와 문예지들의 신인상과 추천 그리고 시집을 출판하는 경우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를 빼놓고는 누군가가 신인을 심사해서 자격을 부여하는 형식입니다. 이런 제도는 너무 비합리적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시를 쓰는데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를 쓰면 그가 바로 시인입니다. 다만 그 시가 문학지에 실리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문예지의 편집진이 판단해서 실려도 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되면 실으면 그만입니다.

고시에 패스되듯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통과해야 시인이 되는 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표절을 해서라도 심사위원의 눈에 드는 한두 편의 작품을 만들어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몰지각한 시인들이 생겨나고 있고 실제 이런 일로 당선이 취소된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몇몇 중견 시인들이 신춘문예 당선을 위한 시창작 교실이 운영하고 있고 몇 분은 아주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획되고 만들어진 시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시인이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등단했는가 하는 레테르로 평가된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쓴 시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문이나 잡지로 등단했는지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는지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합니다. 그야말로 시가 시인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스펙이 그 시인이 쓴 시의 가치를 말해주는 현상이지요.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시단의 이런 간판과 레테르 문화는,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문화적 역량이 천박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옷의 디자인을 평가할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옷에 붙어 있는 레테르를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시를 평가할 예술적 소양이 부족하기에 그 시를 쓴 시인의 간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를 포함한 문예지 편집 관련자들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병금 : ‘한국사회에서 시인이란?’ 이 주제에 대해 제가 구성한 언어상황이 다시금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논문도 뒤지고 관련 책도 읽다가 인터넷에서 최종적인 답을 물었습니다. 거긴 말들이 많은 곳이니까요. 다시 길이 엉켜버렸지만, ‘등단登壇’이라는 어휘에서 물음을 시작해보았습니다. 단壇이 내포한 파장은 이렇습니다. ‘①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터. ②강의, 행사, 의식 따위를 행하거나 관람하기 위하여 주변보다 높게 만들어 놓은 자리. 단과 비슷한 말로는 무대.’

제사, 강의, 행사, 의식은 연극이라는 상징 속에서 공통분모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단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목렌즈로 수렴되든 볼록렌즈로 확산되든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이고요. 세상을 읽는 언어의 렌즈, 문학은 늘 새로운 방법론을 갈구합니다. 신문사의 신춘문예는 그들이 뽑아놓은 스타들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선 문예지에 국한해서 등단제도에서 문제되는 ‘무엇’을 생각해볼까 합니다. 시는 언어로 구축하는 집이라 집을 지을 터, 자리가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문예지를 중심으로 시단이 움직이고 있는 이유겠지요. 문예지를 착종된 의미의 기획사로 생각한다면 자본의 논리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 시장경제입니다. 문예지의 사장은 돈을 벌 목적이기보다 오히려 돈을 잘 쓸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냥,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게 좋아서 손해 보는 그 일을 한다고 하겠지요. 언어의 황금시대가 20세기 이래 영상매체로 넘어갔지만 언어로 지은 마을 전체가 사라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상산업이 확대될수록 그 뼈대 혹은 뿌리인 스토리를 말하는 방법론은 더욱 다양화할 테니까요. 연기자(작가)를 뽑는 기준 또한 무대에 연극이 상연되는 한, 각 기획사 내의 합의에 의해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경영난이 어려운 기획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 문을 닫는 상황이 벌어지겠지요.

2012년 12월, 인터넷의 댓글은 전반적으로 등단제도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지구상에 등단제도가 있는 건 일본과 한국밖에 없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격이었던 <매일신문>에서 처음 등단이 제도로 실시된 이래, 100여년의 관습을 한국문단만이 공고히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그 용도가 폐기된 상태에 있다. 등등.’ 올해로 등단제도라는 괴물은 99살, 대략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시 전문지가 한국처럼 많은 나라도 지구상에 없을 겁니다. 모더니즘보다 빨리 뛰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이 조만간에 다시 뒤처지면 좀 다른 상황이 벌어지겠죠. 수많은 문예지들이 문화다원주의의 양상을 보이는 지금의 문학 현실을 읽어본다면 각 문예지 내에서의 등단제도는 살기 위해, 더욱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문예지들의 경우 늘어진 배를 더 늘어뜨리기 위해 등단제도라는 입을 스스로 마비시키는 것이 문제겠죠.

 

이동재 : 문제가 있어야 하나요? 내 생각엔 제도엔 문제가 없습니다.(제도를 둘러싼 운영상의 문제는 있습니다. 특정 심사위원이 여기저기 심사를 동시에 하고, 수십 년 동안 심사를 하게 하는 식의 문제, 표절이나 대필작을 골라내지 못하는 문제 등이지요.)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이나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간지의 신춘문예나 월간지와 계간지의 신인상, 간혹 가다가 추천을 통해서 등단하게 되어 있는 현재의 등단제도가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등단제도가 없는 나라는 출판사의 편집자나 사장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터이니 어차피 누군가의 눈에 들어야 책도 내고 시인이나 소설가 대접을 받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다면 등단제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등단매체의 위상에 따라서 시인이나 작가의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단에서 등단매체는 우리 사회의 학벌 문제보다 더 심각합니다. 등단매체에 따라서 시인이나 작가의 등급이 자동적으로 매겨집니다. 잘나가는 매체로 등단한 시인은 어떤 시를 쓰든 잘나가는 괜찮은 시인이 되고, 그저 그렇고 그런 매체로 등단한 시인은 꽤 괜찮은 시를 써도 삼류 시인으로 대접받는 현실과 문단의 속물적인 습관적 풍토가 고쳐지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문제입니다.

따라서 등단제도의 문제는 등단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등단매체와 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의 편견과 속물적인 잣대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등단을 했건 안 했건, 시를 쓰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것이고, 좋은 시를 쓰면 좋은 시인, 별 볼일 없는 시를 쓰면 별 볼일 없는 시를 쓴 시인이 되는 거란 사실에는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등단한 적이 없는 어느 학교의 농업 교사가 쓴 시를 보며 나는 이 사람이 꽤 괜찮은 시인이란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시인에게 굳이 다시 술을 권하고 싶습니다.

 

술을 끊고 나니 아껴야 할 게 많다

말이 그렇고,

말을 하게 하는 감정도 그렇다

 

술을 끊고 나니 사랑해야 할 게 많다

남의 이야기가 그런가 하면,

스쳐지나간 주변의 소소한 일상이 그렇다

 

술을 끊고 나니 사라졌던 게 돌아왔다

희미해진 자존감의 기억이 피어오르고,

젊은 날의 꿈이 재생의 피를 흘린다

 

그래!

미몽의 세월을 바람에 날리우고

내 생명의 잉태가 지녔던 영원의 길을 회복해야겠다

마침내,

맑은 냇물에 몸을 씻고

열매 품은 햇살의 거룩함을 보듬어

아직 기다리고 있을 삶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야겠다

 

술을 끊고 나니

내 생의 상처에 새 살이 돋고

사랑했던 순간들이 수줍은 미소를 띠고

제자리를 찾아왔다

 

길을 잃고 흔들리던 거친 세월,

불안하게 떨고 있던 내 반생이

비로소,

남은 내 삶의 향그러운 거름이 되런가

―황덕명 작 「술을 끊고 나니」

                             (《산삶》-산마을고등학교, 2012. 가을 이야기 서른다섯 번째에서)

 

 

사회자 : 다음으로 문학상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말쯤 때면 각종 문학 단체 문예지 등에서 시상식 초대를 받습니다. 과연 이 많은 문학상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또 지금의 제도는 바람직한 것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동재 : 문학상은 받는 사람이 받고, 받은 사람이 받습니다. 이상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동인 문학상도 받고, 소월 문학상을 받는 사람이 김수영 문학상도 받습니다.

문학판에도 상승효과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뭔가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상마다 그 문학상이 기리고자 하는 문학정신이나 특성이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누구 누구 문학상의 이름으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인가 하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특정 문인의 이름을 내걸고 상을 주고받는 행위에 대해서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족이든 특정 매체나 단체 혹은 지자체든 자신들이 기념하고 싶은 작가를 내세워 후배 작가들에게 상을 주겠다는 걸 굳이 막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특정 작가의 이름을 내걸었으면 그 작가의 문학 정신이나 작품의 특색에 부합하는 작품을 쓴 사람에게 상을 주고, 또 받아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고호의 이름으로 피카소에게, 정선의 이름으로 김홍도에게 상을 주는 것이 과연 영광일까 욕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2011년 문화예술위원회 문예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엔 376개의 문학상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여기엔 신인상도 포함되어 있을 터이니 특정 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은 그보다 조금 적을 것입니다. 그래도 문학상이 너무 흔합니다. 문학상의 수보다 진짜 괜찮은 시인이나 작가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입니다.

 

김백겸 : 문학상은 등단 작가의 역량이 확보되고 어느 정도의 활동기간이 지나서 문학적 성취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행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 문학상이 너무 많아서 문학상의 권위가 없어졌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작가들의 현실적 보상이 미약한 한국문단에서 그나마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는 제도이므로 다다익선이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문학상도 크게 보면 작가 혹은 작품에 대한 포괄적인 비평행위입니다. 모 잡지의 겨울호 좌담을 읽어보니 출연자들은 문학매체들이 문학상을 통해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문학상 운영자들이 문학상을 내건 선배문인들의 문학정신과 후보자의 문학세계가 매우 다른데도 특정작가를 위한 수상을 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학상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몰리는 현상은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새로운 작가의 문학세계를 발굴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수상자의 지명도에 기대는 편한 심사를 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지요. 후보작품 혹은 작품집의 이름을 지우고 블라인드 심사를 한다면 결과가 매우 달라질 수도 있는 작품들이 수상작품으로 발표되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문학상제도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이유는 10년 후에도 이 작품들이 일반 독자들의 기억에 적어도 동업자인 작가들의 기억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회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상의 작가와 작품 수준은 결국은 심사위원의 문학적 시야와 해석의 수준으로 귀착됩니다.

여러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문학상제도는 작가들의 자존심과 창작의욕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상이란 여러 인연과 환경의 종합으로 결정되는 만큼 작가들은 당대에 인연이 없으면 사후에 평가받겠다는 자세로 초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상에 대한 뒷말은 작가가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신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신념이 없는 진리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병금 : 300여개의 문예지라는 극장, 연기자만 15,000명, 극장 종사자(연출자, 스탭…)를 제외하고도 언어라는 기호를 종이 위에 연출하는 기획사의 춘추전국시대라 하겠지요, 한국문단에서만 300여개의 문예지의 중소기업, 이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최소한 15,000여 명의 소비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훈련된 미적 감각의 수용자라 하겠지요. 아마 이들은 평균 2~3개의 잡지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원고료 대신 구독하는 형편이겠지만 경제사정이 좋아진다면 10개 정도의 문예지를 더 구독할 생각이겠죠. 이건 뭐, 그냥, 좋아서 한다고 해야겠죠. 그러나 정말, ‘이것이 미래일까?’라고 묻는다면 다시, 좋아서 한다고 대답해야겠지요. 차이가 반복을 만드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요. 한국사회의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어느 부분에서 문예지의 군웅할거, 작은 영웅들의 녹슨 칼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이 거대한 문예운동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요. 21세기의 르네상스라고 할까요? 여하튼 인간내면의 지층에서는 이미 폭발한 의식의 마그마? 이것이 21세기의 문화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 운동의 중심축에는 문학이 있습니다. 문학상에 대한 기존의 담론 역시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제가 느끼는 아주 사소한 부분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문학에 대해 20대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언어화할 수 없는 그들이 처한 슬픔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생존을 위한 미래는 너무 어둡습니다. 많은 부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일 텐데, 그들은 ‘나의 힘’이 부족하다며 스팩 쌓기에 목숨을 겁니다. 그런 괴이한 현상은 실체가 없기에 더욱 유령일 수도 있지만요.

그들에게 문학은 무엇이고 더구나 시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해줘야 하는데 그들 중 더러는 88만원에 스스로를 자폭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들이 미래의 시를 만들어가야 하는 생산자면서 소비자인데도 시단에서의 기성세대와 소통이 막혀 있습니다. 이런 문학 현장에서 지금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대응책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몇 명의 심사위원들이 많은 상의 심사위원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권위를 세우려는 거겠지요. 그러나 젊은 세대의 어두운, 찢겨진, 가볍고, 슬픈… 목소리를 어떻게든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학에 있어 기성세대의 젊은 세대를 향한 몸 낮추기는 절실합니다. 히피, 레게, 펑크, 힙합이 각각 특수한 시대적 산물일 텐데 세대 간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1등을 가린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1등을 한 사람이 여러 번 받는 경우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예지들이 마치도 씨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시단에서 문학상의 영예와 상금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은 권력의 계열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상금은 시집을 한 권 낼 정도의 금액으로 격려의 의미여도 충분합니다. 왜냐면, 의외로 시집을 내기 힘든 시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400만원 정도는 가문의 영광이겠죠. 심사위원의 선정은 문예지의 식구들이 최대한 많이 모인 연말이나 특별한 자리에서 모두에게 심사권을 주는 투표방식은 어떨까요? 이것이 민주주의의 합의를 위한 방식인 한에서 또한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최대한 투명하게 희망적인 선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굳이 문학의 완성도 문제에서 전문가적인 견해가 저해된다면 공동체에서 인정할 수 있는 심사위원들(20~30명 정도)에게 2표 정도의 권한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의 짐을 진 세대가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 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시인들은 충분히 위로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진정어린 의미에서 출간된 한 권의 시집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너무 이상적일까요? 권력의 중심에서 너무 오래도록 권력을 누려온 자들이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듯 만들어가는 줄 세우기의 문학상은 없어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400만원의 아이들 등록금을 대출받을망정 400만원의 출판비를 대출받기란 비현실적인 일이지요. 등단 십년이 지나도록 시집을 못내는 동료시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고요.

 

황정산 : 문학상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말하고들 합니다. 문학상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문학상을 제정한 주체가 가진 사회적 힘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위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상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문단권력이 강화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문학상들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몇몇 단체나 출판사가 문단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매체가 다양해지고 문학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더 이상 소수의 문단 권력이 문학판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발전이면 발전이지 결코 우려할 사항은 아닙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문학상의 객관성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객관적 기준을 정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타당한 주장처럼 들립니다. 또한 최근 몇몇 수상자의 면모를 떠올려 보고, 해당 매체 중심으로 자기 사람에게 돌아가며 상을 주는 풍토를 생각해 볼 때 이해가 가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학상을 주는 데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는 것일까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상을 줄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 이기고 골을 많이 넣거나 점수를 많이 얻으면 상을 받습니다. 보험 외판원이 많은 가입 건수를 올리면 역시 상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이나 예술에 이런 기준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해진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양산한 작가가 상을 받아야 할까요? 그 작품을 읽은 독자수를 파악해서 상을 주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모든 잡지나 출판사를 등급 매기고 A급 잡지나 출판사에 작품을 게재하거나 출판한 건수를 점수화해서 점수가 많은 작가나 시인에게 상을 내린다면 객관성이 보장될까요? 이런 객관적 기준이 문학이나 예술에 적용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더 이상 문학도 예술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90점짜리 시인, 88점짜리 소설가들만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문학상의 문제는 앞서 설명한 권위의 하락이나 객관적 기준의 부재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위의 두 문제를 지적하며 비판들을 하지만 문학상이 객관적 기준을 확보하고 예전에 가졌던 권위를 회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문학상이 그런 것보다는 상업성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점을 다들 알기 때문입니다. 잘 팔릴 작가에게 유명한 상을 주어 그것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상업적 성공으로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작가에게 상을 줌으로 해서 상을 주는 문예지나 출판사의 인지도를 높여 상업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 시인의 경우에는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문예지에서 자기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상금 액수를 묻고는 수상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쯤해서 상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상이란 국어사전에 따르면 “잘한 일을 칭찬하기 위해 주는 표적”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 일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고 칭찬해 줄 누군가의 판단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육기관에서 상을 내립니다. 또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면 그 성과를 판단하는 회사에서 상을 주어 보상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상을 주기 위해서는 그 상을 받는 대상 위에 존재하며 그것을 평가할 절대적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상은 항상 교육과 하사의 의미를 가집니다. 자기보다 높거나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따르게 하고 기존 사회 관계에 편입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상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학이나 예술에 상이라는 제도가 필요하고 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두 가지 경우라면 문학상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기 위해 시나 소설을 쓰는 경우입니다. 잘 팔리는 시나 소설을 써서 출판사나 작가자신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다면 그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합니다. 목표로 했던 것을 잘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기법으로까지 작용할 수 있으니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강력한 문학적 이념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들어가야 자신의 문학적 가능성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그 집단에서 요구하는 문학적 경향을 착실히 수행하여 그 집단의 인정을 받고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바로 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문학하는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회자 : 최근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새로운 매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체들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환경에서 시는 어떤 변화를 해야 하는지요?

 

이병금 : ‘새로운 매체의 발전에 따라 시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로 읽어보겠습니다.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은 정보시대의 단계적인 혁명이라고 해야겠죠. 2012년 왕좌에 있는 매체는 3차원의 시공간을 2차원에 녹여내는 영상이라고 하겠지요. 얼마나 빠른 속도와 많은 용량으로 한꺼번에 흘러가는지, 난무하는 이미지들은 과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남은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요. 사실 과잉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언어로 미처 다 읽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홍수를 과잉으로 읽는 건 언어 쪽에서 읽기 때문이겠지요. 그럼, 이미지 쪽에서 언어를 읽으면 어떨까요. 흘러가는 것, 사라지는 것에 의미를 찾으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요. 이미지들이 엇섞인 무늬, 물결, 주름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물의 속, 투명한 빛.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들에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이미지들이 너무 빠르게 탄생 소멸을 거친다고 하겠지요. 사실, 눈이 너무 피곤합니다. 어쩜 장님이 될 수도 있다는 극단적 공포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은 시각에 의존적이지요. 시각의 독점화가 어느 정도 지양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은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이 하루의 생존을 위해 길에서의 이동시간이 대개 2~3시간쯤 소요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7시간이 걸리는 이동에 의해 생산공정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유목의 하루 속에서 환호할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마트폰의 재림이죠. 이동 자체가 수단이 될 때 6~7시간을 견딘다는 건 그야말로 고문일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동이 목적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건 제 경우인데요. 이동 중 버스에서 대개 인터넷강의를 듣습니다. 해드셋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클래식에서 대중음악까지 철학강의에서 미술, 기체조강의까지 정말 귀와 눈이 화려하죠. 달리는 버스에서 흐르는 좌석 한 칸이라는 방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유목생활의 필수품, 스마트폰은 요즘 가장 사랑을 받는 매체라 하겠지요. 버스에서 90% 이상의 승객은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를 접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듣지요. 유목의 현대인들에게 이동하면서 가능한 것은 청각이 더 강조됩니다. 제 경우는 대개 피곤한 눈을 감고 인터넷강의나 유투브를 통해 음악을 듣는데 이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시집을 귀로 읽고 싶다고. 간절하게 상상을 시작합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질척거리지 않고 너무 건조하지도 않는 목소리로 시를 읽어주는 남자라면 어떨까. 시집을 출판할 때 귀로 읽는 시집을 판매하는 건 어떨까요? 시는 노래, 목소리의 울림이니까요. 시를 지은 작가가 읽어주는 시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몇 십 년이 지난 뒤 그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에서 그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는 건, 가장 손쉽게 재연되는 시간의 공간화, 예술의 현재성을 보여주니까요.

 

이동재 : 문학의 생명은 변화입니다. 세상의 본질 자체가 변화에 있으니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지요. 문학의 매체와 장르도 끊임없이 변화해 왔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구전에서 문자 인쇄로, 문자 인쇄에서 영상으로 매체와 유통 방식이 변화해 왔으며, 그에 따라 장르도 변화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장르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매체뿐만이 아니겠지만) 좀 더디지만 문학의 매체나 장르도 변화의 연속이었습니다. 최근의 가장 큰 변화는 디지털 영상매체의 광범위한 보급과 변화에 따른 인쇄매체의 영향력 축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확산에 따른 매체와 유통 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란 장르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화가 있다면 매체와 유통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과 총체적인 환경 변화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김종광의 「낙서문학사 창시자편」이란 소설은 시, 소설, 평론, 수필, 희곡의 시대가 가고 낙서문학이 대세가 된 21세기의 어느 지점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다.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화자의 진단입니다. 이 소설은 기존의 장르가 다 한물가고 바야흐로 낙서가 문학의 대표 주자가 된 시대, 디지털 매체의 보급과 확산으로 글쓰기 민주화가 실현되어 각종 리플과 악플이 난무하는, 모든 글쓰기가 낙서로 전락한 이 시대에 대한 환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디지털 매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요?(이 소설의 초점도 물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책 읽어주는 라디오’가 있습니다. 하루종일 시, 소설, 수필, 동화 등 각종 장르의 작품들을 읽어줍니다. 현대판 전기수지요. 눈으로 읽는 책의 맛과 귀로 듣는 책의 맛이 사뭇 다릅니다. 눈으로 읽었던 책을 귀로 다시 듣는 과정에서 작품의 내용과 의미는 더욱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집니다. 인쇄매체인 책과 라디오란 매체가 적절히 결합하여 새로운 문학의 유통 방식을 창출해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와 변화가 기본적인 문학의 성격과 본질, 특히 시의 본질이나 성격을 변화시키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매체의 보급과 확산이 작품의 유통과 소비 방식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올 것은 틀림없지만 시의 형태와 내용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시에 다양한 음악적, 회화적, 연극적 요소가 결합되는 방식으로 유통되고 소비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살펴볼 때 매체의 변화가 장르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문학사적 사실들을 무시할 순 없지만, 시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는 종합적인 인간의 생존 조건의 변화와 정서 및 미적 취향의 변화와 좀 더 많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김백겸 : 영상 산업 등의 매체에 독자들을 빼앗김으로써 문학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 같습니다. 서울의 어느 모임에서 후배 평론가가 ‘문학은 망했습니다’라는 탄식을 하길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문학의 황금시절이라 말하는 일제시대로부터 문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았던 6-70년대와 80년대 각광을 받은 리얼리즘 문학까지 알려진 문학작품들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본래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 내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독서를 통해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했기에 교과서나 강단에서 거론하는 작품들에 대한 프리미엄의 해석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시 장르만을 놓고 볼 때 『한국시인 100선』에 들어간 작가들의 시선집을 어쩌다 보면 그 작품들이 지금의 작품들보다 사유와 미학적 성취 혹은 시적긴장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 생각인지 모르나 어떤 의미로는 배울 게 별로 없습니다. 서구와 중국의 고전에 비해서는 사유와 심미 양쪽의 지평에서 한참 못 미칩니다.

시 자체만을 보면 지금의 현역시인들의 잘 쓴 작품들이 시적 시야로는 훨씬 진보한 작품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들이 일반 독자들에게 멀어진 이유는 작가들이 전위적으로 새로움의 차별화를 위한 창작을 수행하고 문화적 총량의 절대수치가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본의 자기축적과 물적인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정보사회의 인프라를 구축한 시기가 대충 88 올림픽 이후입니다. 이때부터 컴퓨터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보의 기하학적 축적이 시작되었습니다, 2000년 이전에는 정보가 매 10년마다 배증했으나 21세기 넘어선 지금 시점에서는 정보의 축적이 매 2년마다 배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학이 주도적 위치를 상실한 시기와 대충 일치합니다.

기호의 축적과 관계망의 연동이 문화의 패턴과 질의 변화를 촉발하는 인식구조와 달리 시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시인들 자신의 평가와는 별도로 일반인들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낮아졌습니다. 과거에는 문학이 인식의 계몽과 더불어 문화적 즐거움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지금은 문학이 과학과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문화적 즐거움도 영상이나 게임 등의 감각적 즐거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요.

디카시 운동이나 영상과의 혼합으로 문학적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지만 종합영상예술의 하부구조로서 문학이 장식으로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과거에 오페라와 결합한 문학작품들이 그 증거입니다.

인문의 철학도 세계해석의 지평을 과학에게 거의 내주고 언어와 미와 심미를 다루는 예술철학의 분야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정신분석과 심리학도 정신의학의 기술발달에 영역을 내주고 문학과 언어비평으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라깡이나 들뢰즈의 문학에의 침투가 본보기입니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들이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으니 이를 본보기로 문학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해석지평을 위해 예술철학 혹은 문학 철학 등의 고급한 시야와 결합해야 문학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고 최근 우리시의 주류가 되고 있는 분열적 의식과잉의 시들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김백겸 : 특정 현상은 모두 원인과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시인들이 내면의식을 생경한 문법으로 드러내면서 시작한 시들이 있고 한때 ‘미래파’란 이름으로 유행했습니다. 젊은 시인들이 기존의 시작법 대신 이런 형식이 당대의 물리와 심리적 현실을 더 잘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서구의 예술사조에서 유사사례를 찾아본다면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등의 운동에서 기존의 예술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내겠다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미래파’ 시운동은 산업문명의 기계적 속도에 반한 허무와 퇴폐의 가치를 내세워 기존의 예술 가치를 전복하고자 했던 다다이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나마 젊은 시인들의 내면에서 건져 올린 분열적 의식과잉의 시들은 초현실주의 운동과 방법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정신의 해방과 자유를 현실세계가 아니라 상상력세계의 초현실성에 두는 태도는 예술을 이미지의 몽타쥬나 프로타쥬, 데칼코마니의 등의 수법에 두는 우연성에 의지합니다. 서구에서 지나간 과거의 수법이 한국의 21세기에 있는 젊은 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사회의 현실혁명이 이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스마트기기들의 결합으로 가상의 문화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증강현실이 다가오는데 한국문학에는 미처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작가들은 자신이 배운 문학기법과 사유에 안주해서 증강현실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인생경험이 적은 젊은 작가들은 증강현실의 크기를 종합과 통찰로써 예술적 비전을 표현하기에는 무리이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내부현실의 상상력에서 이미지를 건져 올려 현실변화에 대처합니다. 그러다 보니 꿈이나 환상과 마찬가지로 현실시공간의 논리적 연결이 없는 감각적 연결만을 가지고 창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 현상의 배후에는 새로움과 낯섬에 대한 현대자본사회의 과도한 미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방가르드와 키치가 고전의 규범과 전범을 무시한 상태에서 전위만을 쏟아낸다면 가치평가가 어려운 새로운 예술들만 산더미처럼 쌓이게 됩니다. 역시 현실독자의 외면으로 문화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상품이 될 염려가 있습니다. 사회소비문화의 형식에 편승한 혐의가 짙지만 이 운동이 시단에는 어느 정도의 충격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불변한 시 형식이란 없으며 시어의 확장효과에 함께 독자(시인)에게 시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진 점을 일깨운 점입니다.

 

이동재 :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본래부터 분열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시인들의 작품에서 분열 증상이 보인다고 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열적 의식과잉’이란 말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분열된 존재라니 ‘분열적’이란 말이 이상할 것도 없고, 글이란 게 원래 인간의 의식의 산물이니 ‘의식’이란 말도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남는 건 ‘과잉’이란 말인데, 의식과잉이라니 의식의 과잉은 수다를 낳을 것이고, 수다의 과잉은 언어의 과소비를 의미할 것인데, 게다가 분열적이라니 분열적인 수다란 결국 횡설수설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는 곧 소통이 되지 않는 난해하고 장황한 언어의 과소비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시적 현상이 자연스런 사회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결과라면 그 이유나 의미를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으나 단지 시인들의 작위적인 시작의 산물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시가 언어 예술이고,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이 소통에 있다면 언어 예술인 시도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합니다.(미적 소통 정도가 되겠습니다.) 소수든 다수든 소통이 되지 않는 분열적인 수다 시를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시가 있다고 해서, 혹은 그런 시만을 쓰는 시인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으나 그런 시가 시의 주류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주류로서 대접받는 것도 곤란합니다. 전위가 주류가 되면 이미 전위가 아닙니다.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시인의 시적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병금 : 과잉이란 말은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과잉이란 어느 한쪽에서 바라볼 때 성립하는 단어이니까요. 의식의 주된 작용을 언어활동으로 바꿔볼 수 있을 겁니다. 그 경우 의식의 과잉이라는 말은 언어가 너무 많다는 말인데. 이건 언어의 기능을 의미화로 수렴하려는 리얼리즘의 입장에 선 발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현실을 거울처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던 리얼리즘의 반영론에 대한 견지에서 이젠 누구도 언어가 투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며 변형시킨다고 생각하지요. 하나의 기의에 일치하지 않는 기표들의 미끄러짐, 차이에 의해 의미가 생성된다는 말이겠죠. 주체의 부재 쪽으로 옮겨가는 후기구조주의의 방법론에서 언어를 분열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방법론이라고 하겠지요. 그럼, 후기구조주의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물음 자체도 결과론적이지만요. 언어에 의해 구성된 자아라는 것의 실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겠죠. 이것은 신기하게도 불교의 선적 방법론과 일치합니다. 선에서 언어도단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화두수행은 언어로 언어 너머를 건너가기인데. 결국 최종적인 지점은 텅 비었다, 언어에 의해 구성된 주체조차 텅 비었다는 지점이죠.

이런 논리를 밀고 간다면 자아는 부재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환영의 세계란 말이겠죠.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요? 시간이 어떤 흐름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흔들립니다. 방향이 없는 이 시간의 뭉텅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비누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언어라는 놀이를 즐기는 건데요. 살아 있다는 것이 유희라면 자폐적, 분열적, 환상적인 시들을 충분히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겠죠. 설명되어질 수 없는 내 안의 타자성을 과잉적으로 혹은 폐쇄적, 몽환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거대한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이라는 부속품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지요. 스스로의 방으로 돌아와 혼자 중얼거리고 자해하고 자위하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확인을 해보는 거죠. 우리가 가진 것은 언어밖에 없으므로 최대한 언어 실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언어가 의식이고 의식은 언어의 조합, 배합에 따라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기에 무수한 실험을 거쳐야만 언어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텅 비었다는 것을 언어로 구성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오래된 미래의 목소리들을 다시 현 시점에서 내 목소리로 발화하는 것이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요?

 

황정산 : 앞서 많은 분들이 얘기를 해서 저는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통의 가치와 이념이 해체된 시대에 솔직한 정신적 번민의 표현이며 이미 우리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기존의 시어에 대한 반성이고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시들은 전위적이기도 하고 또한 혁명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전위적인 시들에 ‘미래파’라는 이름이 붙은 후에 갑자기 우리 시단의 미래를 이끌 주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전위는 주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류가 되면 전위는 없고 오직 수많은 아류들만 양산하게 됩니다. 지금 현재 우리 시단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자기 분열적이고 요설적인 언어의 시가 주류가 되면서 모든 시인들이, 때로는 문단의 원로라고 스스로 무게를 잡으시는 어르신들마저 그들 시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가 열풍을 불면 모든 사람들이 그 열풍에 휩쓸리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촌스러운 사람으로 평가받는 우리 문화 전반의 풍토와도 관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성이나 내적 고민 없이 자기도 모르는 언어들을 거칠게 내뱉고 자극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면 그게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만이 시라고 생각하고 따라하는 의식 없는 시인들이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흔히 요즘 시를 난해하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난해해서 독자들과 소통이 되지 않고 그래서 결국 시가 외면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지요. 물론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를 쉽게 쓴다고 갑자기 시의 독자들이 많아질까요? 지금도 쉬운 시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시가 어려워서 독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전반적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이지요. 저는 원래 시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지 않으면 시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적인 언어나 기존의 지시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정서나 새로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시를 쓰려면 시를 쓸 것이 아니라 대중가요 가사를 써야지요.

 

사회자 : 마지막으로 최근 서정시를 다시 부활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극서정시’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하고 ‘신서정 운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서정시 부활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동재 :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적 장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정 앞에 뭔가 다른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어색합니다. 구서정이든 신서정이든, 전통서정이든 극서정이든 다 개소리입니다. 더군다나 서정 뒤에 붙이는 운동이란 말은 말도 안 됩니다. 서정은 운동의 대상이 아니지요. 인간의 정서는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물이지 의식적인 운동의 결과물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사를 뒤적이다 보면 항상 마주하게 되는 전통서정이란 말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몇몇 고대 가요와 김소월, 만해, 서정주, 박목월 등의 시를 들먹이며 전통 서정 운운하는 식의 말에 대해 저는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자들이 말하는 전통서정의 내용이란 것이 대개는 이별이라든가 한恨이라든가 농경정서의 어떤 편린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우리 민족의 전통서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민족만의 고유 정서일 리도 없고 몇몇 시인들의 시에 그러한 정서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전통서정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전통서정 운운하면서 들먹이는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정서란 것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하기엔 검증해야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시에 나타난 정서는 대개 식민지 백성의 한이거나 농경시대의 정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특정 시대의 정서적 산물인 몇몇 시인이나 시를 두고 전통서정 운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의 결과거나 평자들의 안일한 언어적 습관일 뿐입니다.

시 또한 시대의 산물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삶의 조건과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인간의 정서도 바뀌고 시에 나타난 정서도 그에 따라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농경을 주로 하던 시대에 자연을 대상으로 한 정서적 감응의 산물은 구서정이고, 산업화 시대 이후의 복잡한 인간의 내면적 정서나 도시의 정서를 노래한 것은 신서정인가요? 불필요한 구분일 뿐입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삶의 환경이 변함에 따라서 인간의 정서도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나 거기에 무작정 ‘신’과 ‘구’식의 수식어를 붙여서 구분할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서정이란 말 뒤에 운동이란 말까지 붙여서 사용할 일은 아니지요.

시는 항상 당대 인간들의 삶의 애환과 정서를 노래해왔습니다. 어디가 신이고 어디가 구란 말인가요? 신서정 운동? 그저 당대 인간들의 삶의 정서를 충실히 담아내자는 소리로 알겠습니다.

 

이병금 : ‘신서정 운동’을 하나의 운동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시기를 1995년 안팎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정이란 인간 몸의 구조물에서 심장으로도 상징할 수 있겠는데 이 믿을 만한 박동체계를 특별히 의식했다는 것은 뭔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이 되겠죠. 서정의 몸이 싸워야할 침입자들을 살펴본다면 정치적으로는 1990년 러시아의 공산주의 붕괴일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장기복역수가 감옥에서 풀려난 상황이라 하겠죠. 정보체계에 있어서는 컴퓨터와 휴대폰의 보급이죠. 또 경제적으로는 1993년의 우루과이라운드와 1995년의 WTO를 앞세운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경험일 것입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이 세 가지 변화는 시간의 균질화, 공간의 획일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촌 사람들은 높거나 패인 지형을 허물고 실시간이라는 평평해진 화면으로 하루에도 수천 건의 뉴스를 보고받습니다. 수백 명이 죽어간 소식이나 모 연예인의 결혼소식을 균질하게 접합니다. 감정을 끌어내기에는 접해야할 소식들이 너무 많거나 빠르기에 화면의 색감과 형태에 국한해서 소식들을 소비하기까지 합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신은 샌들이 바로 다음날 검색어에 뜨는 시대, 그런데 왜 이런 변혁의 시기에 신서정의 시들이 운동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심장이 잠시 그 용량을 키우기 위해, 혹은 인공심장을 이식하기 위해,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요. 1995년은 이미 ‘시간’이라는 영화의 휘감긴 스토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서정은 시라는 몸에서 하나의 장기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심장이라는 서정의 장기가 멈추면 시가 죽겠지만요. 복잡한 인간의 몸, 컴퓨터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세계를 향한 열린 창이며 2010년 업그레이드됩니다. 폭발적으로 일상화된 스마트폰은 이동이 자유롭고 생각하자마자 접속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어디를 가든 컴퓨터를 손 안에 들고 다닌다는 말인데 이것은 유목민으로서 서정(감정)을 공간화(의식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제시됩니다.

목적을 갖고 시간을 수단화하는 삶이 아닌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이 최종 목적이 되는 패턴, 직선적인 세계관에서 중심이 와해되었다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놀이, 축제라고 하겠지요. 1995년 출발한 신서정의 운동이 15년이 흘러온 지금, 이 운동은 ‘신서정 운동’이라는 고유명사로 도약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왜일까요? 문태준이나 박성우의 시들을 신서정 운동의 예로 들 수 있다면, 그들의 시가 세계 전체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서정이 상징하는 심장만으로는 거대한 2010년대의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몸 전체의 총체적인 시가 축제를 벌이는 문학판을 그려봅니다. 시가 현실을 반영하는 해상도가 꽤나 선명한 매체인 한, 그것은 충분한 언어실험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혼종, 이종, 잡종, 통섭의 문화 현상이 벌어지는 지구라는 균질한 판을 문학의 큰판으로 볼 수는 없는지요. 한국사회가 견지한 모든 시간의 축적을 고스란히 안고 변화의 세계를 걸어가는 겁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는 더 멀리 깊게 보려는 인간 의식의 연장된 몸인지도 모릅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첨단의 기계를 장착하고 언어라는 1차원의 길을 공간화하는 시가 미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집이 팔리는 세상은 이미 지났지만 평가에 있어서 우위에 있었던 진정성, 주체성, 리얼리즘, 민족주의는 실험대 위에 올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언어로 도시를 구축하고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언어의 연급술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타 장르의 움직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현대시조가 현대시의 문법을 받아들인 것처럼요. 미래파의 시의 몸에서 읽혀지는 다성성, 환상성, 자학성, 자폐성, 폭력성, 중얼거림, 넋두리, 외래어, 핸드폰 문자 등등은 세계의 복잡한 중층구조를 통과하려는 언어의 새로운 진정성은 아닌지요… .

 

김백겸 : 신서정이란 신낭만주의라는 용어처럼 과거의 서정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혹은 내용)의 서정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제가 용어의 개념을 잘 몰라서 편집부에 문의한 바 극 서정시운동을 염두에 둔 용어라 합니다. 극서정시 입장에 의한 시들을 몇 본 바로는 일본의 하이꾸처럼 짧은 시형에 농축된 서정을 담겠다는 의도인데 이 운동은 요즘의 산문화되는 시 형식에 대한 반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대시는 자유로운 형식의 창조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산문 형식에 의한 ‘분열적 의식 과잉의 시’들이던 짧은 형식에 운율을 강조한 ‘극서정시’이든 모두 시를 통해 예술적 심미를 확보하면 성공한 시들이 됩니다. 요컨대 예술적 심미의 확보가 문제입니다.

인간의 미의식과 가치 판단은 그리스시대의 객관미학이 약 이천년, 칸트의 심미 형식에 대한 주관미학이 약 이백 년 이어져 왔습니다. 프로이트 이후 예술을 무의식의 승화로 보는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 표현 미학과 언어상징의 기호론적 미학이 등장하고 최근에는 생리기전에 의한 신경미학까지 등장했다.

내 생각에는 2만 년 전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그린 수렵인들과 그리스시대의 조각들과 현대의 추상 화가들의 사물에 대한 미의식이 그토록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추상화나 개념미술을 이해하는 현대인의 눈에 과거의 예술품이 동일한 미의식을 불러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정서와 심미는 시대마다 문화 형식이 달라도 기본구조는 같다는 생각입니다(정서와 미를 결정하는 신경구조가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는 헤겔의 생각에 따르면 정반합의 전개 과정을 거쳐 변모합니다. 변모가 헤겔의 생각처럼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이던 마르크스처럼 실천적 인간의 합리적 해결에 이르는 과정이던 문화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축적이 다양해집니다. ‘분열적 의식과잉의 시’와 ‘신서정의 시’ 모두가 문학의 종합과 자양의 심화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보르헤스는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는 불행한 존재이지만 독자는 자신의 심미를 만족시키는 작가를 선택하는 행복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 문학의 모든 형식 논쟁에 대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 필자 약력

 

김백겸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기상예보」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山 하나』, 『북소리』, 『비밀방』, 『비밀정원』, 시론집으로 『시적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 등을 상재했다. 계간 《시와표현》, 웹진 《시인광장》 주간. finance8@naver,com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평론 활동 시작. 2001년 《현대시문학》을 통해 시 발표. 평론집으로 『주변에서 글쓰기』가 있음. 본지 주간. 대전대학교 교수. rivertel@hanmail.net

 

이병금 :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저녁흰새』 등이 있음. 본지 편집위원. leebg204@hanmail.net

 

이동재 : 1998년 《문학과의식》에 시, 2007년 《정신과표현》에 소설로 등단. 시집으로 『민통선 망둥어 낚시』, 『세상의 빈집』, 『포르노 배우 문상기』, 소설집으로 『파워 인터뷰』, 평론집 『침묵의 시와 소설의 수다』, 연구서 『20세기의 한국소설사』 등이 있음. westisland@naver.com

 

 

 * 월간 『우리詩』 2013년 1월호 「신년 특집 지상 대담」으로 게제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