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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8. 5. 11:36

 길 위에 서다

                                   이 연 희

그러니까 1월의 어느 주말이었지.

무료함을 털어내려고 나섰던 길이었어.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에 들렀어.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목 사매면에 있어. 삼십 년이 더 지난, 긴 세월의 강을 건너 임의 숨결과 향기를 흠향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흔적을 더듬었지.

내가 여고 1학년생 때였지. 말하자면 산골소녀가 대처로 유학 나온 해였어. 아지랑이가 아른대는 봄날, 나는 선생과 첫 조우했어. 최명희 선생은 생머리를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보일 듯 말 듯 맴돌던 미소와 부드럽지만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었지. 높지도 그렇다고 아주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하며 간간이 시를 낭송하곤 했지. 그녀의 은은한 미소와 나직한 목소리가 한 편의 시와 버무려져 울려나올 때, 내 안의 어딘가에서 가을바람이 이는 듯,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어. 이따금 소름이 돋곤 했지. 그리고 가끔은 황홀해지기까지 했어.

입가의 미소는 여전한데, 고요한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촉촉한 눈빛의 선생을 다시 뵈니 코끝이 시큰해지더군. 임의 투철한 작가정신을 헤아리면서 나 자신에게 수없는 매질을 가했다네. 잠시 스쳐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었지만 작별인사를 드리려니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더군. 그냥, 뭐라고 표현할 수 없게.

한낮의 햇살은 따사롭지만 바람 속에는 제법 겨울날의 앙칼짐 같은 게 도사리고 있데. 그 바람을 등에 업고 순창 쪽으로 향했지. 무작정 지방도로를 따라서 달려보는 거였어. 한참을 가는데 장구목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더라고. 순간 인생의 목표를 잃고 헤매다가 목표를 되찾았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이 가슴 가득 밀려왔지. 실날같은 희망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산다는 일이 얼마나 팍팍하고 재미없는 일인가. 망설임 없이 핸들을 꺾어 신나게 달렸어. 길을 가며 인생길을 배우는 거였어.

‘아! 인생에 목표가 있다는 일, 삶에 희망이 있다는 일이 이런 거로구나.’ 생각했어. 이토록 하찮은 일에 들뜨는 내가 허풍스럽다거나 지나친 감상주의자라는 말로 스스로를 폄하시키고 싶지는 않았어. 적어도 그 순간만은.

두어 차례 길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은 풍광이 빼어난 곳이었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섬진강변에 작은 능선을 이루고 있고, 강은 강대로 유유히 흘러가고, 산은 또 그대로 강물을 굽어보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데. 마치 밀가루로 반죽을 해 놓은 것 같은, 말랑말랑하고 한없이 부드러울 것 같은 바위들을 보면서, 참, 뭐랄까, 가슴이 멍해졌어.

박식하지 못한 내 가슴과 머리통만 쥐어뜯으며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지. 애꿎은 잔 돌멩이로 물수제비만 뜨다가 해거름이 되었어. 술렁거리는 하늘이 수상하더니만 이런 걸 횡재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먹빛 하늘 아래로 하얀 꽃송이가 나풀거리며 내려오는 거야! 한 폭의 그림이었지. 그야말로 금상첨화요 점입가경이었지.

‘장구목가든’ 여주인의 미소가 고와서 꽃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네. 서울 여자가 남편 따라 내려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더군. “예 왔으면 요강바위를 꼭 보고 가야 해요.” 하는 그녀 말에 따끈한 차로 몸을 녹이고 신비의 바위를 찾아갔어. 속세에서 아들 낳기를 원하는 많은 여인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간다는 그 바위는 매끄러웠어. 두세 사람이 들어서도 넉넉할 둘레와 어른 키보다 깊게 파인 웅덩이가 바로 자연의 창조물이라네. 새삼스레 경탄할 뿐이었네.

날은 저물고 눈발은 멈추지 않았네. 산도 들도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초저녁. 마음 같아서는 호젓한 곳에서 하루쯤 머물고 싶지만, 굽이굽이 눈 쌓인 산길을 돌고 돌아왔어. 보잘것없지만 아늑한 내 집 품에 안기니 참 좋데.

그리고 오늘, 구월의 첫 주말 오후.

탈출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만 같아 또다시 길 위에 서 있네.

시시로 엄습하는 쓸쓸함이랄까, 외로움이랄까, 아니면 역마살이라고 해야 할지. 설거지를 하다가도, 수다를 떨다가도, 자동차 핸들을 거머쥐고 달리는 동안에도 불쑥 불쑥 치미는 고약한 병이 도져, 나는 운암호를 지나고 강진을 거슬러 장구목으로 향하는 비탈진 산길을 더듬고 있다네.

어쩌겠는가. 하늘은 높고 바람은 상냥한데 일탈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게 더 슬픈 일 아니겠는가. 그냥 좋은 거고, 밥 먹지 않아도 포만감 그득한 행복을 맛본다면 그만 아닌가,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래서 또다시 길 위에 서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