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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단의 현황과 문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8. 20. 19:33

한국시단의 현황과 문제  

1. 20세기의 1백년 가까이 한국시단을 지배했던 서정시의 허구성에 대하여 이제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직도 일부에서는 ‘수준 높은 서정시’라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낡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미 다른 시인들이 쓴 시를 똑같이 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므로 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나: 서정의 범위 또는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이 문제는 여러 갈래로 생각이 나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서양의 문예사조를 살펴볼 때 고전주의,.낭만주의가 대체로 여기서 언급된 서정에 근접한 내용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러나 고전주의, 낭만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이런 식으로 문학의 발전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논의는 너무 도식적인 느낌이 듭니다. 물론 한 시대의 대표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에서의 서정성을 낡은 것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반성 없는 자연예찬이나 자기 감정에 몰입하여 여과되지 않은 연애담을 시라고 풀어쓰는데서 문제가 발생된다고 봅니다. 어째든 서정은 시를 지탱하는 중요한 버팀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서정성을 시작에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냐는 시인이 선택할 사항입니다. 서정이 낡은 것이 아니라 낡은 시상을 서정으로 잘못 생각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문제가 될 뿐이지요.

2. 21세기의 시는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시에서 같은 느낌이나 이야기를 되풀이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각자 나름의 새로운 이디엄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오늘날에 있어서 시의 참신성은 어떻게 발전해야하며 그리고 새로운 시의 탄생은 언제쯤 우리 시단에서 가능하다고 기대하십니까.

앞에서 서정을 이야기하면서 나온 문제가 '새로움'이라는 화두입니다. 예술의 본령은 분명 창조에 있습니다. 창조는 구태를 벗어나고자하는 작가의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성향과 詩觀에 따라서 이미 흘러가 버렸다고 생각되는 기법이나 사상이 고스란히 재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천재성 즉 영감이 출중한 사람이라는 견해에 저는 찬동합니다. 모든 시인이 문제작이나 명작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의 참신성, 새로운 시는 시인이 자신에 대한, 또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나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작업이 선명해질 때 생산될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도대체 왜 우리는 시를 쓰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이 내게로 다가옵니다. 저에게의 시 쓰기는 숨어있는 나의 자아를 찾고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야수성, 폭력성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시인들이 시대적 조류를 좇아가고, 보여주는 시에 대한 욕망이 강할 때 시는 停滯에 빠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시는 생산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코드'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 코드의 주도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새로움과 참신성의 의미는 진동의 폭이 커질 것입니다.
정말 참신하고 새로움의 열망에 빠진 시인은 자신만의 '코드'를 가진 존재입니다. 문학세계에 '권력'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행한 사태입니다. 끼리끼리 뭉치고 생각이 다른 무리를 내치는 행위는 문학의 다양성을 해칩니다. 과연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학단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고 싶습니다. 자기의 철학, 자기의 코드를 가지고 평생작업으로 시의 업을 이끌어가는 시인에게서만이 새로움과 참신성의 낙타구멍이 열릴 것입니다.

3. 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새로움이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시란 작품 자체의 깊이, 곧 다른 작품과 다른 장르에 대한 개방성 등을 포괄하는 새로움에 대하여 앞서 나가야 하며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의 질문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첫 번 째는 좋은 시의 정의로서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 의미의 개연성.. 맞나요? 즉 다시 말해서 시외의 분야와도 이를테면 연극이라든가. 무용이라든가 그런 여러 장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퓨전fusion화 할 수 있는...그래서 생각이 더 멀리 나가면... 이를테면 포스모더니즘의 경계에도 맞닿아 있는 듯한 그런 것들을 새로움이라고 정의하는 것...그러다보니 두 번 째의 질문에 역사가 나오고 시대정신이 도출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요즘 참 시끄럽습니다. 우리의 근대 백년이 불행한 역사라고들 말하는데요...한일합방, 식민지시대. 해방, 좌우의 대립, 전쟁, 독재, 민주화 이런 시대를 보내면서 불가피하게 생략되거나 우회해버린 문제들을 숙명적으로 안게된 것 같습니다. '홍역은 일생동안 한 번은 치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우리가 말없이 넘겨버린 것, 생략하고 월장해 버린 것들이 풍기는 악취에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에게 '근대'의 개념이 정립 되기도 전에, 일시에 몰려들어온 여러 사조와 이데올로기들이 우리 문학판에도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다고 보는데요... 우리나라는 세계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판에서도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는 서양의 이론들이, 그 서양의 이론들이란 그들의 토양과 사상적 맥락에서 충분히 숙성된 것임에도 우리에게는 '계몽'과 '선도'의 미명으로 비판없이 수용되어 왔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던 서정의 낡음이 문제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21세기의 우리 문학이 지향해야할 문제를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짚어보고 싶습니다. 그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대국 사이에 몸부림치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의 문제이면서 생존에 앞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의 토대를 우리 시인들이 가꾸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민족주의적 입장에 선 고립주의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 째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서 발생한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상실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와 맞물려서 디지털 시대를 선도해 가는 우리의 모습에서 앞으로 전개될 인류문명을 조감하고 예견하는 작업 또한 새로운 이디엄을 찾는 작업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시는 언어와 리듬을 옮기는 역량이 커야 하는데 이런 시의 기법을 상관없이 대중시가 범람합니다. 시대중(詩大衆)은 범속한 시를 요구하고 만족하는 시류(時流)입니다. 여기에 일부 시인들은 이런 독자가 요구하는 시를 씁니다. 이런 시류(時流)을 방관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서 시는 언제까지 계속하여 표류한다고 봐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너무나 많은 문인, 특히 시인들이 존재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또한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보여지는데요... 300여종이 넘는 문학잡지와 그 잡지들이 배출하는 신인들, 거기에 덧붙여서 인터넷상의 문학카페들이 시의 대중화를 선도해 왔던 것 같습니다. 또 일부의 베스트셀러 시집은 시를 생활 가까이 앉혀두는 순기능도 했지만 시를 너무 가볍고 부드러운 것으로 대중들이 인식하게 만드는 역기능도 가져왔다고 봅니다. '시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통시대적이고 전인류적인 것을 고급의 예술로 정의한다면 고급 예술을 향수하는 사람들도 숙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고급예술에 따라서 대중예술 또한 활성화되어야 하겠지요. 문제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언론에 가끔 문인들의 원고료 수입이 너무 적으므로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동정성 자료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나는 이런 기사에 기분이 매우 상합니다. 적어도 문학에 평생을 바치고자 한다면 그 어떤 가시밭길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문인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존경받는 세상이 오는 것이지요... 시로서 빵을 구한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5. 한 때는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로 ‘낯설게 하기’ 또는 ‘뜻 겹치기’를 좋은 시의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요사이는 ‘쉬운 시‘ 나 ’읽기 편한 시‘를, 더 나아가서 섹슈얼리티를 끌어드려서 시라는 형식으로 독자를 자극합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대중시보다도 매스미디어가 앞장서고 있기는 합니다. 시에 있어서 이런 형태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신 지요.

어떤 방향으로든 새로움의 충격은 신선할 것입니다. 키취나 패스티쉬 너 넓게 패러디의 기법은 창조를 향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시도로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언론매체에서 시 감상 난을 만들어서 보다 쉽게 읽기 편하게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보아야할 것이지요. 문제는 문자매체는 시청각 매체에 비해 자극의 강열함이 열세에 놓여져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문자를 통한 정신의 긴장감과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경주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만화를 영화로 만들고 영화를 만화로 다시 제작하는 등의 경계 허물기를 우리 문학도 눈여겨볼 만할 것입니다.

6. 시인들은 이제 창간되는 ■한국시학■를 통해서 보다 넓고 깊은 시의 지평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오늘의 시‘에 대한 전망을 말씀하여 주기 바랍니다.

먼저 '한국시학'이 단순한 끼리문학의 장으로, 권력 집중의 한 수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국시학이 지향하는 좋은 시의 개념이 어떻게 정립되느냐에 따라 한국시학의 개방성의 여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예술행위 자체는 고독입니다. 우리 시단은 문학을 전공한 소위 엘리트 문학과 체계적인 수련없이 등단과정을 거친 비엘리트 문학, 순수와 참여의 대립적 시각, 그리고 거대한 회원을 거느린 몇 개의 단체들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져 있는 형상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의 위기는 거론되어 왔습니다. 문학에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식의 상주고 상받기를 지양하고 말없이 문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숨은 인재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시'는 내일을 행해서 열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내일을 예지하는 힘은 오로지 우리들 시인의 몫입니다.



한국시학 창간호 좌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