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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디지털 유령에 갇힌 인간 로봇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10. 11. 00:59

디지털 유령에 갇힌 인간 로봇
                                                  나 호 열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의 새로움 또는 새로운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급기야 현재 한국문학계가 처하고 있는 상황에까지 언급이 가해졌다. 한쪽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는 서정 抒情을 밑바탕에 깔고서 구태의연한 자연예찬이나 여행담 등 사소한 개인의 감정에 치우쳐서 도대체 시인이 갖추어야 할 실험의식이나 도전정신이 보이지 않아 세계정신의 탐구라든가 형이상학의 영토 화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고, 또 한 편에서는 소월 素月이나 미당 未堂 등의 선대 시인들이 추구했던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입된 외국 이론을 무작정 추수 追隨하는 행위야말로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쥐락펴락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논쟁을 보고 들으면서 한 좌담회에 참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창간한 계간지 『한국시학』에서 특별좌담으로 '새로운 시를 찾아서' 란 주제를 걸고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였다. 오십 초반의 필자가 가장 나이가 적었으므로 나에게는 바로 위 세대 시인들의 시대 의식이나 시관 詩觀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던 것 같다.

 

시를 똑같이 쓰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있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는 개성문제와 연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람들은 특히 시인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존재이고 보면, 똑같이 쓰는 것을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취향을 가지며 분화되어가고 있는 지식정보사회인 디지털 시대에는 예술도 문학도 시도, 해체. 분화. 다기화 돼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달라져야 한다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봅니다. 다만 시가 가지는 본질에서 너무 멀어지는 기형의 작품들이 양산되어 시 원형을 훼손할까 우려되는군요. 말하자면 과장된 언어유희나 지나친 선정주의나 지나친 사업주의에 편승한 저급 통속의 대중시 같은 것 말입니다. 그동안 한국시단은 서정시가 주류를 이어왔던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공허한 서정시라 말하는데 대해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시의 뿌리가 서정시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테니까요.

 

김종섭 시인의 위와 같은 언급에서 오늘날 우리 한국시단의 다양성의 너비와 깊이를 꿰뚫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젊은 시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오늘 우리의 삶의 형태와 그 변화에 대해서 열열히 반응하고 숙고하고 있으며, 단지 개인적 취향과 주관에 따라서 시작의 방향과 태도가 결정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비 내리니
나무의 모든 잎들이 개안 開眼을 한다
그 푸른 손바닥 위에 어리는
천수관음의 미소
세상 저리도
곱게 씻겨야
만개 滿開하는 것이다
마음 밝아지는 것이다

나무의 아래 서니
온통 눈물 자국이다
하늘로 올리는
지상의 기도,
미처 올리지 못한
마음의 탄식들

비 그친 팔월의 폭염 속
지렁이 하나
온 몸으로
아스팔트를 밀어내고 있다

 

- 이태관, 「우중세한도」전문


밀린 빨래를 걷으며 세계명작고전만큼이나 두꺼운 하늘을 넘기고 있었어 오
늘은 결정적으로 그와 자크 라캉을 이해한 날이야 비가 내리고 있었거든 내가
하려 했으나 하지 못한 할 수 없었던 허공의 말들을 해독해 주고 있었던 거야
받아 적을 필요까진 없었지 어차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니까 카드렛찌가 긁
어내는 잡음처럼 말야 이런 날일수록 서둘러 날 저물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
었을까? 혼자 중얼거리기 딱 좋은 중얼거리다 혼자란 걸 알았을 때 문득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날

비처럼 음악처럼

 

- 이공, 「김현식 콤플렉스」전문


위의 두 편의 시는 격월간 문예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4년 9,10월호에서 뽑아 본 것들이다. 한 잡지에 나란히 발표되었으되 두 작품을 바라보는 독자의 반응은 결코 행복한 일치를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제목에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우중세한도」는 전통적인 시작법으로 자연과 우주의 신비, 또는 생명과 문명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는데 반하여 「김현식 콤플렉스」는 記標로서 떠다니고 있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휘발성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산문형 기술, 중얼거리는 독백 아니면 대화, 어쩌면 트릭일지도 모를 '김현식' 이라는 이미 죽은 가수와 비 오는 날이면 방송국에서 제일 많이 트는 가요라는 '비처럼 음악처럼'의 상관 관계, 전통적인 시 읽기나 시 쓰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시는 애매한 것이 아니라 모호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시의 층위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쪽에서는 언어와 이성을 신봉하고 또 한 쪽에서는 언어의 규칙을 파괴하고 이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의미의 전달에 힘을 주고 또 한 쪽에서는 해체된 존재의 드러냄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극과 같은 두 개의 힘은 재현 再現 또는 이미지의 생성이라는 국면에서 새롭게 조우한다.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과 해체된 존재의 드러냄은 다같이 어떤 대상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그 재현은 우리의 감관에서 일으켜지는 신체적 반응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신체를 초월하는 정신적 반응이기도 하다.

앞으로 디지털 영상시대의 시는 '관념(언어)을 읽는 시'에서 직관의 '사물(이미지)를 보는 시'가 될 전망이다.

마치 그것은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없이 사진을 찍듯이, 생각 즉 관념(언어)없이 사물을 직관한다. 그래서 관념이 덕지덕지 붙은 언어(기호)를 탈관념화함으로써 본질의 순수에 접근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보는 시'를 디지털의 詩락도 하고, '읽는 시'를 아날로그의 시라고 대별하여, 읽는 시를 서양의 <언어적 방법론>으로, '보는 시'를 동양의 <사물 인식(깨달음)의 체험적 직관으로 구분한다

오남구는 계간 『詩向』2004년 기획특집으로 '디지털리즘'을 연재하면서 " 백년 뒤를 명상한다. 우주가 있고, 지구가 있고, 인간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죽고 없다. 이미 시는 언어예술을 넘어선 사물이다"라는 선언을 한다. 오남구의 선언은 언어를 배제한 시를 시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시의 사멸로부터 빚어지는 또 하나의 예술 양식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음미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간에,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우리는 이미 디지털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디지털의 영토는 우리의 정신을 옥죄는 늪이거나 아니면 사막이라는 징조를 알아채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디지털의 개념은 컴퓨터를 비롯한 생활 전반에 속속들이 퍼져 있다. 디지털의 개념은 컴퓨터를 더욱 빠르게 만들고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의 확대를 가져왔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카드화되고 암호화된 문, 집 밖에서 가스 불을 끄고 전등을 끌 수 있는 매커니즘의핵심에 디지털이 자리잡고 있다. 디지털은 유령이다. 휴대전화 속에도 디지털의 유령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창조해 낸 퍼지 Fuzzy 기능이 이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道와 같은 디지털 시대에 조금씩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촉각으로 느낄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전자 칩으로 둘러싸인 기계들을 제어하고 조종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에게 점차 종속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있다.

신범순은 「사이버 시대 유령적 초상과 창조적 고민의 소멸」에서 사이버 문학이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출현을 시기상조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컴퓨터의 세계가 이상향을 가져다 준다고 섣불리 예언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비판해야할 지 진지하게 모색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오남구나 신범순의 주장을 돌이켜 보면서 다시금 새로운 시에 대한 궁금함을 더해간다. 후꾸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듯이 우리도 문학이나 시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을까? 새로움은 언제나 지나간 것 , 뒤에 남는 것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에서의 수많은 사조는 기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반응이었고 도전이었다. 도래한 현실에 대한 반응과 그것을 유지하거나 선택하기 위한 사유 속에서 새로움은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디지털은 분명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존재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면밀한 검토와 반성을 더해 보는 존재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계에 대해서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눈 먼 자의 더듬거림일지라도 그 더듬거림은 세계의 변혁과 희망을 꿈꾸는 자의 연금술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만날 수 있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
단기 외채 총 500억 달러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해가 떠오른다 해에도 칩이 내장되어 있다
미세 전극이 흐르는 유리관을 팔의 신경조직에 이식
몸에서 나오는 무선신호를 컴퓨터가 받는다는
12면 기사를 들여다보다
인류 최초의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워윅의
웹 사이트를 클릭한다 나는 28412번째 방문객이다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 손의 검지로 메일을
클릭한다 지난 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코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중략...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나오는 .....나홀로 소송 ....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지구와 나..............
따닥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위의 시는 이원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 지성 2001년)에 수록된 「나는 클릭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부분이다. '생각하는 나'에서 '클릭하는 나'로 변해 버린 실존으로서의 인간, 그러나 사막과 유목의 운명 속에 사로잡히고마는 부유 浮游하는 인간은
이제 결코 낯 선 얼굴이 아니다. 전자 문명의 속도는 빛의 속도임에 틀림이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문명을 일구어낸 인간의 사유는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눈 먼 자의 더듬거림'이다.
이원은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가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기록할 뿐이다. 내면에 가득 차 오르는 존재의 불안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자세 또한 시인의 사명을 더해 가는 값진 노력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앞에 두고 있다. '새로움'의 화두를 놓고 그 디지털 시대를 건너가는 詩의 항해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