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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적서 나치 맞선 영웅으로…롤러코스터 인생 쇼스타코비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4. 23. 17:33

인민의 적서 나치 맞선 영웅으로…롤러코스터 인생 쇼스타코비치
중앙선데이
입력 2026.04.04 00:01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그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자원했으나 시력 때문에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했고 교향곡 7번을 작곡해 레닌그라드 봉쇄전의 참혹함을 고발, 서방에서도 나치에 맞선 영웅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지구 곳곳이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세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던가. 전쟁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그 참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기록 덕분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후세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주는 데는 예술가들 역시 큰 몫을 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는 이들의 귀에는 독일 콘도르 군단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게르니카 시민들의 처절한 비명이 생생하게 들렸을 테니.

서방선 교향곡 7번 악보 수송 비밀작전도

1941년 레닌그라드의 독일 병사들. 독일군의 포위로 보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삶은 매우 처절했다. 벽지 접착제, 애완동물, 인육까지 먹었지만 64만 명이 넘게 아사했다. [사진 사회평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레닌그라드 봉쇄전의 참혹함을 고발한 예술가는 쇼스타코비치였다. 레닌그라드에서 병사와 시민들은 모든 물자의 보급이 차단된 채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와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벽지 접착제, 지렁이, 쥐, 애완동물은 물론 인육까지 먹었지만 64만 명이 넘게 아사했다. 그 비극의 현장에서 탄생한 것이 교향곡 7번 일명 ‘레닌그라드’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사선 위에서 이 곡을 만들어 시에 헌정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것을 연주했다. 가히 소련 인민의 목숨을 건 저항과 승리의 상징이라 할만하다.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는 서방 세계에서도 파시즘에 대한 항전 의지를 북돋고 군대의 사기를 올리기에 좋은 소재였다. 그 때문에 이 곡의 악보를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테헤란을 경유하는 비밀 첩보 작전까지 펼쳤다. 악보가 도착하자마자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거물 지휘자들이 서로 먼저 연주하려고 경쟁했으며, 연주될 때마다 80분이라는 긴 연주 시간을 무색하게 할 만큼 청중들의 길고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그의 얼굴이 실린 타임지 표지. [중앙포토]

서방 언론들도 이 곡의 명성에 힘을 보탰다. 미국 초연에 앞서 타임지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지붕에서 소방 헬멧을 쓰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그가 전쟁 발발 즉시 군에 자원했으나 시력 때문에 입대에 실패했고 후방에서 의용소방대원으로 음악원 건물이 불에 타지 않도록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과 함께. 위험지역에서 대피하라는 소련 당국의 특별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를 거부하고 시민과 함께 싸우려 했다는 미담까지 전해지면서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감동적인 영웅 서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당국에 의해 숙청된 상태였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그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그로 인해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의 처남, 장모, 삼촌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되었고, 보리스 코르닐로프나 아드리안 표트로프스키 같은 작가들은 그와 함께 작업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절친이었던 니콜라이 질랴예프도,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서 구명 운동을 했던 투하체프스키 장군도 모두 처형당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변호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숙청 대상이 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성공작 ‘무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때문이었다. 177회 공연이라는 공전의 기록을 달성하며 그를 소련 음악계의 선두 주자로 만들어 주었던 오페라다. 하지만 스탈린이 이 작품을 직접 관람한 다음 날인 1936년 1월 26일,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는 이 곡을 “음악이 아니라 황당무계한 혼돈”이자 “원시적이고 조악하며 천박한 수라장”이라 비난하며 그를 소비에트 청중의 기대와 요구를 무시하고 건전한 취향을 모두 잃어버린 형식주의자로 낙인찍는다. 2년 전 초연 때는 당국이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과 당의 올바른 정책의 결과”라며 칭송했던 작품이었건만.

본시 독재자의 변덕이란 종잡을 수 없는 법이다. 스탈린에게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통치에 복종시키기 위해 공포를 극대화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 그리고 그것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였다. 19세에 작곡한 교향곡 1번으로 혜성처럼 작곡계의 총아로 떠올랐던 인물. 1927년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1회 쇼팽 콩쿠르에 소련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출중한 피아니스트. 가장 인기가 많고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존재였기에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가 숙청의 표적이 되자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던 평론가들은 서둘러 의견을 철회했으며, 동료 작곡가들도 앞다투어 그를 향한 신랄한 비난에 동참했다.

매일 당하는 미행과 도청은 쇼스타코비치를 깊은 공포로 몰고 갔고, 두려움은 강박과 자기 검열을 낳았다. 교향곡 4번이 비판받을까 두려워 초연 무대 리허설 현장을 찾아가 직접 악보를 수거해서 폐기해 버린 사건은 유명하다. 기존의 교향곡들에 비해 형식이 다소 모호하고 음울한 분위기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이 혹시나 퇴폐적이고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비판받지 않을까 무서워 그가 취한 행동이었다. 교향곡 4번의 초연은 그 후 26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1961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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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서 당국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던 쇼스타코비치. 그는 교향곡 4번을 포기한 대신 새로 교향곡 5번을 작곡했다. 초연에 앞서 그는 이 곡이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임을 밝혔으며 해피엔딩으로 피날레를 힘차게 마무리했다. 교향곡 5번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립 박수를 멈추지 않는 바람에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연주회장 측이 불을 모두 꺼야만 했다. 공산당은 이 작품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러자 언론과 평단도 일제히 그간의 태도와는 달리 호의적인 평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클래식 전통 이은 ‘마지막 작곡가’로 추앙

천신만고 끝에 그렇게 쇼스타코비치는 살아났다. 복권 후 그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얼마 있지 않아 독일군에 의해 레닌그라드가 봉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활약을 통해 전쟁 영웅으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당국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한에서만 가능한 행운이었다. 전쟁 직후 그가 만든 작품이 기대를 배신하자 그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전승 기념일을 위해 작곡한 교향곡 9번이 예술 담당 정치국으로부터 강한 공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곡이 간결하고 깔끔한 것이 문제였다. 장대한 음색으로 피가 끓는 듯한 승리감을 고양하지 못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그 결과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교직에서 해고당했으며 그의 모든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었다.

그가 다시 회생할 길은 체제 선전용 영화음악이나 정권 찬양용 노래를 작곡하는 것뿐이었다. 소련 밖에서 명성이 높았던 쇼스타코비치는 국제회의에 참석해 소련 체제의 장점을 선전하는 일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상을 세 번 더 수상하고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소련의 영웅 칭호까지 받는 영광을 누린다. 체제에 순응하는 예술가로의 성공적인 전향이라고 비칠 수밖에.

그의 진정한 삶과 작품은 스탈린 사후 새롭게 조명된다. 전체주의 체제의 공포 속에 숨겨왔던 그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육성기록으로 남긴 회고록에는 엄혹한 시기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 그의 고뇌와 고독이 절절히 담겨있다. 국가의 폭력이 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도. 쇼스타코비치가 감시를 피해 몰래 작곡했던 실내악과 관현악 걸작들도 발표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구호 아래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 깊이 숨겨야만 했던 작품들이었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으로 대체되는 가혹한 롤러코스터 같은 것이었다. 숙청은 물리적 박해를 통해 모든 기회를 앗아갔고 복권은 그가 원하지 않는 작품 활동을 강요했으니. 그에게 둘은 종류가 다른 감옥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쇼스타코비치가 요즘 청중들에게 서양 클래식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마지막 클래식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작곡가들이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쫓아 진보적 실험에만 매몰되었고, 청중들이 현대음악의 과도한 혁신성에 피로해진 까닭이다.

젊은 시절 품었던 열정을 자유롭게 펼쳐보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야 했던 그의 통한이 새삼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차피 세상은 무대고 우리는 모두 광대라지만 유독 세상이 그에게 더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말년에 주어진 소련의 영웅 칭호는 그에게 오히려 몸을 옥죄는 쇠사슬이었으리라. 자유로운 창작에 목말라했던 예술가의 삶이 가슴을 저민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등을 주제로 여러 저서를 출판했으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17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