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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 시집 『떠남은 서낭이다』:서정의 심화와 떠남의 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8. 18. 15:01

 

 

이경석 시집 떠남은 서낭이다시평

 

서정의 심화와 떠남의 미학

나호열

 

시를 빚어내는 일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떠남은 서낭이다』는『아직도 만나지 못한 그대』(2005),『기차는 서쪽으로 간다』(2015)에 이은 시인 이경석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해설이나 발문이 없이 오로지 「나의 문학에 대한 소고」를 통해 시집 전편을 관통하는 자신의 시론을 당당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동안 반 평생의 사회생활에서 얻어진 성찰은 천 여 수首의 시작詩作을 거치고 나서 확고하게 시와 시인이 지녀야 할 염결성에 대한 나름의 시의 길을 찾은 진솔한 토로인 것이다. 이 시집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순수한 힘으로 대변되는 시의 위의威儀를 넘어서서 새로운 구도의 길을 모색하는 첫 걸음이기도 한 것이다.

 

아직도

나를 찾지 못한 나를 위해

 

칠흑보다 깊은 시를 써야지

이슬만큼 맑은 시를 싸야지

 

- 「시인이라면」 전문

 

이 짧은 시는 지난 날의 시작詩作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의식의 활동, 또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더 나아가 오늘날의 난삽한 시단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이고, ‘깊고, 맑은’ 시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마땅한 답을 얻으려면 시인의 내력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고, 고향 언저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정년을 맞이한 행운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 행운을 살펴보면 삶의 복합적인 심리상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농촌은 어느새 도시가 되어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일구어지던 인심은 추악한 사건과 마주하는 일상을 직업으로 삼아야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를 지니고 있는 마음과 그 마음에 돌진해오는 또 하나의 사악함과 싸워야 하는 심리가 시인의 감성을 메마르게 하였고 그에 대한 반응이 시를 써야하는 절박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목가적인 심성으로 옥죄어오는 현실의 괴리에 맞서는 일이 시 쓰기였던 것이다.

 

오늘 내가

목 끈을 끊어버렸다

이제는 달려야 한다

하늘에선 솜처럼 하얀 포근함이

내려오고 있다

나는 갓길을 달리고 있다

내라는 눈 속에는

파란 잔디와 물 흐르른 강가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이 들어 있다

나는 달려간다

숱한 굶주림이 있다한들 어떠리

추운 겨울밤에는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하면 될테지

나는 비로소 붉은 색 경계를 지나

푸른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

오로지 나의 의지대로

자유를

 

자유!

 

이 시는 첫 시집 『아직도 만나지 못한 그대』에 실린 「들개를 꿈꾸며」이다. 비단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꿈꾸는 자유로운 삶을 들개를 통해 보여주는 수작 秀作으로 깊은 공감을 준다. 윤택한 삶을 보장받기 위한 여러 제약들은 때로는 선악의 경계와 호오好惡의 판단을 무디게 만든다. 시인이 찾는 ‘나’는 선악과 호오에 물들지 않은 절대적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마음대로 채울 수 없고

마음대로 비울 수 없지

그래서

사랑은 오직 매직이야

 

- 「오로지 매직이야 」마지막 부분

그 사랑은 또 무념無念이기도 해서 쓸데없이 인연을 맺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산길을 걷다가

홀로 핀 꽃이 저만큼 서 있다면

잠시 다가가 웃어주시라

내일 다시 올거다 같은

어설픈 건 약속하지 말고

서 있는 대견한 모습에

그냥 미소하나 내주시라

 

- 「산꽃」 마지막 부분

 

이와 같이 ‘나’를 찾는 방도로서의 시는 시인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사건에 선악, 호오 등의 가치개념이 개입되지 않을 때 깊고 맑아질 것이다.

 

죽도록 힘드신가

처절히 외로운가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만나진 마라

사랑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

그리 여기지 마라

잃은 사랑이라도 버리지 마라

사랑은 상처받아 옹이 되고

그리움 머금어 전설이 되며

화석이 되는 것이지

힘들다고 구걸하진 마라

사랑은 그리워할 수 있다면

늘 살아 있는 것

또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것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바람이 네게 말한다

전설이 된 사랑이

화석이 된 사랑이

너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 「바람이 네게 말한다」 전문

 

움직이면서 사라지는 바람은 결코 그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슬픔은 그 무엇인가에 집착할 때 비롯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바람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다. 칠흑보다 깊은 시, 이슬만큼 맑은 시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이어야만 한다.

 

『떠남은 서낭이다』의 많은 시들이 풍경을 노래하면서도 그 풍경들을 객관적 상관물로 차용하지 않고 즉물적으로 대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의식을 개입하지 않고 자신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풍경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 것이다.

 

식은 해가

구룡사 북 마루에 내려앉았다

뜨겁게 하루를 호령하던

절정의 의식을 접어두고

쉬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자

저녁노을이

허기진 북 마루

식은 몸을 데워주고 있다

 

- 「구룡사」 전문

 

이와 같이 시인은 일체의 선입견 없이 만물의 형상과 인연의 얽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시작)을 통해서 궁극적인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만행萬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이제 인생의 마루턱에 올라서 있을 것이다. 이룰 것은 이루었을 것이고, 잃어야 할 것도 잃어버린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미동 없이 여기 서 있는데 / 떠남은 서낭이 되었다’(「떠남은 서낭이다」첫 부분)고 고벡한다. 서낭은 서낭신이 붙어 있다는 나무 또는 토지와 마을을 지켜 준다는 신이라고 하는데, 떠남을 신으로 받드는 시인은 ‘떠남은 단 하나 남은 설렘이다 / 길을 잃어 비틀거려도 / 저기 저렇게 은하수 우글거리는데 // 가자, 또 껍데기가 되더라도 ’( 「떠남은 서낭이다」후반부)라고 읊조린다. 삶의 영욕이 물거품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태어날 때 축복의 선물로 받아온 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나이가 들면

일, 친구, 꿈, 건강

그들을 상실하지만

맨 나중까지 간직해야할 것은

꿈이리라

 

- 「꿈」 전문

 

주어진 삶이라고 다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노병사의 같은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을 마주하는 태도는 결코 같지 않다. 시를 쓰는 일도 삶의 여러 정황을 마주하면서 자신을 정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지만 결국은 ‘이번 생에는 없는 / 나의 흔적’(「흔적」 끝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떠남의 설렘을 잊지 않고 , 꿈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임을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창작예술은 새로움을 찾아 진리를 불어넣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메마른 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보편적인 시대 통념을 거부하는 것도 시인이 하는 일ㅇ다. 안주와 나태를 거부하며 오직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일념이야말로 시인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차가우며 따뜻한 메시지를 담는 것이 문학인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 세상과 사회의 정서를 공유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 「나의 문학에 대한 소고」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