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250] '첫' '처음' 가려 쓰기
젊은 날 이맘때 흙바닥을 열심히 기었다. 처음이었다. 실탄 총도 쐈다. 물론 처음. 밤꽃 냄새 요란한 줄 처음 알았다. 밥을 그리 허겁지겁 먹어야 할 일이 어디 있었던가. 생판 모르는 사내놈들하고 무더기 외박을, 그것도 한 달 넘도록 한 적이 당연히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거의 모두가 처음이었다.
조심스러웠던 군 생활 첫 경험과 딴판으로, 우리 언어생활에서는 ‘첫’을 함부로 쓴다. ‘근대 5종 전웅태, 장애물 경기 첫 출전해 우승.’ 관형사인 ‘첫’은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만 꾸밀 수 있다. 여기서는 동사 ‘출전해’ 앞에 쓰는 바람에 어법에 어긋난다. 이때는 용언(동사, 형용사)을 꾸미는 부사 노릇을 하는 ‘처음’이라 써야 옳다. ‘처음’은 명사지만 흔히 부사처럼 쓴다. ‘그를 어제 처음 만났다’ ‘처음 먹는 음식이 입에 맞았다’처럼.
‘첫 기부한 날, 할머니는 소녀처럼 좋아했다’ ‘오페라 첫 출연하는 최장수 아이돌’ ‘둘째 이상 출생아 사상 첫 10만명 무너져’가 죄다 ‘첫’을 잘못 썼다. 동사인 ‘기부한’ ‘출연하는’ ‘무너져’를 수식하므로 ‘처음’이라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문장에서 ‘첫’은 무조건 못 쓴다고 오해 마시라. ‘첫 기부를 한 날’ ‘오페라에 첫 출연을 하는’처럼 표현할 수 있지만, 매끄럽지 않을 뿐.
겉으로 보면 명사를 꾸미는 듯해 ‘첫’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카이스트 개발 로봇이 세계 첫 마라톤 완주.’ 신문 방송에서 흔히 보는 제목 형식으로, 이때 ‘완주’는 ‘완주했다/완주해’를 줄인 것. 문장으로 풀면 ‘~ 로봇이 세계에서 처음 마라톤을 완주했다’이므로 ‘처음 완주’가 올바르다. ‘유럽 올해의 차 후보에 첫 중국 차 선정’도 ‘선정돼/선정됐다’를 꾸미니까 ‘첫’이 아니라 ‘처음’이 옳다.
논산 영외(營外) 훈련장 오갈 때면 고속도로를 건너야 했다. 육교 아래 매연 뿜으며 내달리는 차도 반가울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툭하면 안 들어가던 집이 무척 그리운 곳임을 그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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