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편지] 세월의 풍진에 스러진 한 그루의 아름다운 소나무

★ 1,286번째 《나무편지》 ★
어린이날 아침입니다.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시절이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어린이날’이 몇 안 되는 ‘쉬는 날’이었던 때가 있었던 거죠. 처음 직장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나마 일요일 하루를 쉴 수 있었지만, 좀 지나니 어떤 신문이 ‘월요판’이라는 걸 내면서 휴간일을 없앴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문들도 따라서 일요일에 제작해 월요일 아침에 배달하는 신문을 낸 겁니다.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도 출근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당번을 정해서 번갈아가며 쉬기는 했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일요일이 쉬는 날이 아니게 된 거죠.
설날과 추석 명절 연휴는 쉴 수 있었지만, 이번 어린이날처럼 연휴가 길게 이어져도 대개는 이틀 쉬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리고 또 쉴 수 있는 날이 두 번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문의 날’인 4월 7일이었고, 다른 하루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어린이날 쉬게 된 건 기자들의 자녀를 배려한 건 아니고요. 그때 대부분의 신문 배달은 어린이들이 했기 때문에 이 날 하루만큼은 배달소년들도 쉬게 하자는 생각에서였던 겁니다. 그때의 신문기자들로서는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던 공식 휴일이었던 겁니다. 물론 아예 ‘쉬는 방법’을 잊고 살던 분들이 없던 건 아니지만, 놀기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손을 꼽아 기다렸던 날이 어린이날이었습니다.

긴 연휴 복판이어서 《나무편지》를 지금 펼쳐보실 분은 그리 많지 않겠지요.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는 제 홈페이지 대문에 팝업 이미지로 업로드한 사진 속의 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해상도가 떨어져서 보시기에 불편하실 수도 있는 사진입니다. 하지만 이건 귀한 사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처럼 아름다운 나무였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바람에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했던 〈정선 화암리 소나무〉입니다.
엊그제 토요일에 ‘불교방송(BBS)’의 ‘김혜옥의 아름다운 초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배우 김혜옥씨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 20년이 되어 특집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이었어요. 지난 20년 동안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몇 출연자들이 나와서 20주년을 축하하고, 오랜만에 자신의 현황도 이야기하는 코너였어요. 이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할 때에 1년 반 정도 출연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2년, 그리고 다시 얼마 뒤 3년. 그러니까 거의 6년을 출연한 프로그램이었어요.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 진행자 김혜옥 배우는 내 현황을 묻는 질문에서 “나무도 많이 변하지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무는 주변의 모든 것들과 융화하는 생명이다보니, 세상이 변하는 것과 함께 변할 수밖에 없지요”라는 당연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그 사례로 낮은 지붕의 살림집만 있던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존재감이 큰 나무가 있었는데, 얼마 뒤에 주변이 개발되면서 고층 아파트가 들어와 나무의 존재감이 쪼그라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정선 화암리 소나무〉처럼 이미 생명을 마친 나무도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그런 나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늘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살살 피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필경 삶과 죽음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투 붙어서 그 경계를 살금살금 넘나드는 게 모든 생명살이의 공통점일 겁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의 경우 태풍 벼락 등 외부적인 요인을 잘 견뎌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월 지나면 사람이 그렇듯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위해 요인이 안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25년 전쯤 《이 땅의 큰 나무》라는 책을 펴내기 위해 나라 안의 큰 나무들을 답사하던 때에 만났던 인상적인 나무입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비어져나오는 아름다운 나무였습니다. 《이 땅의 큰 나무》를 집필하면서 소개해야 할 자랑스러운 소나무가 워낙 많았기에 그 책에서는 이토록 아름다운 나무를 고작 한 단락으로만 소개하고 넘어갔습니다. 언젠가 더 넉넉하게 소개하겠다는 생각으로 다음 기회를 보자는 생각이었지요.
나중에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소나무》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 나무를 본격적으로 알릴 기회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정선 화암리 소나무〉가 유명을 달리한 뒤였습니다. 공교로운 건 나중을 기약한 나무들일수록 그 나무와의 기약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처음에 나무를 답사하고는 ‘다음에 더 자세히 소개할’ 생각으로 우선은 간단히 정리해 소개한 나무들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런 나무들은 정말로 얄궂게도 사진도 몇 장 남기지 않았다는 건 참 공교롭습니다. 그나마 〈정선 화암리 소나무〉의 사진은 낮은 해상도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남아있긴 합니다.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강원도 정선의 상징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좋은 나무였습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존하자면 강원도 지역을 상징하는 어떤 영상에서도 강원 지역의 상징으로 〈정선 화암리 소나무〉의 이미지를 담을 정도였지요.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무나이가 1천3백 년이나 됐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모든 소나무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됩니다. 1994년에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한 이 소나무는 나무높이 11미터, 가슴높이줄기둘레 3.9미터의 규모였습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사실 나무나이 1,300년을 신뢰하기가 어렵지 싶습니다.
옛날 이 근처에 화표사(華表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주석한 스님이 입적한 뒤 그의 묘지에서 저절로 자란 나무라고 합니다. 지금은 옛 절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나무가 서 있는 골짜기 아랫마을을 ‘절골마을’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절집과 명을 함께 한 유서 깊은 나무로 보아야 합니다. 나무나이 1300년의 근거가 거기 있는 겁니다. 마을의 상징이었던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이 나무에 정성을 바치면 나무에 깃든 스님의 혼이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절골마을의 언덕 경사 위에 서서 아름다운 풍광의 주인공이 됐던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2002년과 2003년 여름에 이 지역에 불어왔던 태풍으로 많은 가지가 부러지면서 예전의 아름다운 나무 형태를 잃었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모질게 버티며 살아남았지요.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잃을까 애면글면하며 나무를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충격은 나뭇가지만 부러뜨린 게 아니라, 긴 세월을 살아온 나무가 버티고 버텨온 골병을 도지게 한 거죠.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때 이미 나무는 죽음에 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나무는 심장이 멈추는 순간 곧바로 죽음에 드는 동물들과 달리 서서히 죽어갑니다. 나무의 죽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현상입니다.
결국 강원도의 상징이었던 〈정선 화암리 소나무〉는 2005년 5월에 나무는 전문가들로부터 최종 ‘고사 판정’을 받았고, 강원도 기념물에서도 해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선 화암리 소나무〉가 고사한 뒤에 마을 사람들은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진혼제’를 지냈고, 이어 후계목을 지정했으며 ‘후계목의 장수성장 기원제’를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정선 화암리 소나무〉의 후계목으로 지정된 소나무는 2007년에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정선 화암리 소나무〉 후계목 후보로 선정한 나무들 사이의 유전자를 감식해 최종 지정했다고 합니다.

즐거운 연휴 복판의 아침에 전해드린 나무의 죽음, 죽음에 든 나무, 그리고 우리 홈페이지 대문에서 당분간 계속 보게 될 저해상도의 흐릿한 사진 이야기였습니다.
고맙습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에 1,286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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