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눈 사이로 매화 찾아 나선 선비… 군자의 강인함 닮고자 했죠
봄꽃을 담은 명화
여기저기서 봄을 알리는 꽃 소식이 들려옵니다. 겨우내 비쩍 말라 있던 나무에 물이 올라, 가지 위에 꽃봉오리들이 탐스럽게 솟고 있어요. 봄꽃 중에 우리 옛 그림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꽃은 무엇일까요? 봄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용감한 매화랍니다. 조선의 옛 학자들은 매화를 덕망 높은 사람을 뜻하는 군자(君子)의 모습 중 하나라고 여겼고, 매화를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으며 그 의연한 자태를 닮고자 했지요.
조선 시대 화가 중에서는 김홍도(1745~?)의 매화 사랑 이야기가 유명해요. 그는 가난하던 시절 쌀과 땔감을 사러 시장에 갔다가 매화를 보고는 반해서 뭘 사러 왔는지 까맣게 잊었다고 해요.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품에는 엉뚱하게도 매화나무 화분만 소중히 안겨 있었다고 하죠.
같은 꽃일지라도 화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단아하게 그리는 화가도 있고 화려하게 그리는 이도 있어요. 꽃에서 어떤 기쁨을 기대하고,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지는 화가의 눈과 마음에 달려 있겠지요.
기다림과 그리움을 나타내다

<작품1>은 조선의 화가 김명국(1600~?)이 그린 ‘탐매도(探梅圖)’예요. 봄소식을 기다리며 선비가 매화를 찾아 나서는 장면을 그린 것이지요. 눈 덮인 산속에서 매화를 감상하는 장면입니다. 학자로 보이는 왼쪽의 나이 든 남자는 매화를 보고 감동해 발길을 돌릴 줄 모르고,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젊은이는 몸을 움츠리고 언 귀를 감싸며 덜덜 떨고 있네요. 이렇듯 매화는 추위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향긋한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방에 앉아 글로 매화를 상상하며 춥고 황량한 겨울을 지내던 학자는, 입춘이 지나자마자 매화를 찾아 문을 박차고 나섭니다. 운이 좋게도 그는 눈 속에 핀 이른 매화를 만난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반갑겠어요. 매화를 그리워한다는 건, 봄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이죠.

지중해를 낀 유럽에서도 매화처럼 이른 봄에 피는 꽃이 있어요. <작품2>에 보이는 아몬드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복잡한 파리를 떠나 1888년 초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를에 도착했어요. 아직 눈이 녹지 않고 추위도 가시지 않았는데, 아몬드나무들이 꽃을 피우려 애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여러 점의 스케치를 남겼지요.
아몬드꽃엔 기다림의 사연이 숨어 있어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를 승리로 이끈 데모폰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그는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성에 잠시 머무는데, 그곳에서 필리스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하지만 고향 아테네에서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기에 데모폰은 마냥 그 성에 머무를 수가 없었어요. 그는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길을 떠났습니다.
필리스는 하루 종일 데모폰을 기다렸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져 그만 죽고 말았어요. 그러자 필리스가 쓰러진 자리엔 아몬드나무가 자라납니다. 뒤늦게 돌아온 데모폰은 눈물을 흘리며 아몬드나무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자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갑자기 팝콘 터지듯 꽃잎이 돋아났다고 전해져요.
이 그림은 고흐가 자신의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이 됐어요. 늘 믿고 의지하던 동생 부부에게서 예쁜 아이가 태어나자, 환한 물빛 바탕에 활짝 핀 아몬드꽃을 그려 선물했어요. 그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침실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데모폰을 생각한 필리스처럼, 고흐 역시 아몬드꽃으로 피어나 조카의 곁을 지킨 것이겠죠.
절제된 아름다움, 찬란한 아름다움

<작품3>을 보세요. 김홍도는 종이 전체를 연한 먹으로 물들여 놓은 후에, 조개껍데기를 빻아 만든 새하얀 가루로 매화 꽃봉오리를 칠했습니다. 흐드러지게 넘치도록 피어 가지의 모양새를 모두 덮어버리는 보통의 꽃들과는 달리 매화는 가지의 뼈대를 그대로 드러내요. 김홍도는 가지가 꺾어지는 모양을 살려서 매화의 강인한 본성을 표현합니다. 단아한 매화나무 한 그루의 품위가 꽃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강조되어 있어요.

<작품4>는 일본 교토에서 활동하던 화가, 오가타 고린(1658~1716)의 병풍 그림이에요. 황금 바탕에 채색한 매화입니다. 김홍도가 그린 흑백의 절제된 아름다움과 완전히 느낌이 다르지요. 황금을 바른 종이 위에 왼쪽과 오른쪽엔 흰 매화와 붉은 매화가 있고, 가운데에는 짙은 푸른색 물줄기가 굽이치고 있지요.
고린은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경제적 어려움 속에 살게 돼요. 그가 화가로서 이름을 날릴 무렵 대부분의 재산은 채권자에게 넘어가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뽐냈습니다. 그가 친구들과 꽃놀이를 갔을 때의 일인데요. 점심때가 되자 모두 호화로운 칠기 찬합에 담긴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고린의 도시락은 대나무 껍질에 싼 초라한 주먹밥뿐이었어요. 하지만 대나무 껍질을 서서히 풀자, 그 안에 손수 금박으로 꾸민 화려한 꽃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예기치 않게 만나는 아름다움이 더 감동적이라는 걸 고린은 알고 있었던 거죠. 마치 눈 속에서 기대하지도 않은 매화를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고린의 도시락처럼, 그의 매화 병풍은 평소 접어두었다가 펼쳤을 때 눈부시게 찬란한 매화를 보여줍니다. 이 병풍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매화가 피는 시기에 맞추어, 한 해에 오직 한 달만 공개됩니다. 고린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려고 매화가 피기를 기다린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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