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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케이블카에 가려졌다, 당신이 놓친 ‘이순신 보물섬’
카드 발행 일시2024.12.03
에디터
김영주
충무공 이순신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목포 고하도 길을 걸었다. 우뚝 솟은 유달산(228m) 아래 있어 고하도(高下島)라 했다는데,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엔 보화도(寶和島)로 기록돼 있다. 명량대첩(1597년)에서 승리했지만, 사실상 폐허가 된 조선수군은 이곳에서 그해 겨울을 견디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내만(內灣) 입구에 있는 따뜻한 섬이라 배를 짓고 군량미를 보충하기에 좋았다. 이순신에겐 보물 같은 섬이었을 것이다.
유달산 위를 지나는 목포해상케이블카. 유달산과 고하도를 오간다. 김영주 기자
고하도는 유달산에서 출발한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사람들을 떨궈 놓는 곳이기도 하다. “국내 최장 해상 케이블카”로 소문이 나고 연일 관광객이 붐비는 관광지로 됐지만, 섬 끝 달동에 이충무공을 기리는 기념비가 찾는 이는 많지 않다. ‘백섬백길’ 사이트를 만든 강제윤(58) 시인은 “케이블카 없을 때 고하도를 찾는 사람에게 이충무공 유적지는 필수 코스였지만, 케이블카가 생기고 나서 오히려 이순신은 잊혀졌다. 사진 찍고 가는 관광지가 됐다”고 했다. 백섬백길은 자자체가 만들어 놓고 ‘개점휴업’ 중인 섬 트레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공간이다.
지난 15일, 강 시인과 함께 고하도를 찾았다. 이날 오후 케이블카 승장강은 매표소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8인승 곤돌라에 8명씩 꽉꽉 채워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대기 줄이 줄어들지 않을 정도였다. 충남 논산에서 온 70대 노인들과 한 곤돌라에 탔는데, 벌써 여러 차례 목포 케이블카 유람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목포 북항에 도착해 푸짐한 점심과 반주를 곁들인 후, 케이블카 유람을 마치고 바로 버스를 타고 갈 것이라고 했다. 당일 코스 여행으로 그만한 유람은 없겠으나, 고하도의 ‘이순신 순례길’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했다. 케이블카 다니는 길 중 유달산에서 고하도까지 해상 구간은 820m에 달한다. 바다 위에 떠 있을 땐 조금 무섭기도 하다. 총 3.2㎞를 가는데 약 20분 정도 걸린다.
목포 고하도 해안 데크 길. 김영주 기자
고하도 걷기 길은 최근에 목포시가 설치한 해상 데크길 약 2㎞와 섬에서 가장 높은 능선을 따라 난 ‘용머리길’ 약 5㎞로 나뉜다. 케이블카 종점을 기준으로 해상 데크 길을 걸은 뒤 다시 능선에 올라 이순신기념비가 있는 곳까지 약 7~8㎞의 트레일이 이어진다. 목포 시내에서 점심을 한 후, 산책을 겸해 걷기 좋은 길이다. 물론 해상 데크와 능선의 암릉은 미끄러운 구간이 있으므로 반드시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신어야 한다.
해상 데크 길 남쪽 끝,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에 두 개의 동굴이 보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마지막 전투’를 위해 파놓은 것이라 한다. 일제는 이 굴에 ‘가미가제 특공 보트’를 숨길 계획이었다. 해수면 위 데크에서 보니, 동굴은 어림잡아 깊이가 수십m는 돼 보였다. 해수면에서 시작해 점차 위로 올라가는 모양새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에 달라붙어 보잘것없는 연장으로 바위를 뚫고 굴을 팠을 옛사람들을 생각했다. 군함도에 끌려간 조선인처럼 강제 동원된 고하도 인근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동굴을 팠을 것이다. 목포 앞바다는 잔잔한 편이지만, 밀물 때에 밀려드는 파도는 제법 사나웠다.
고하도 해안 데크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김영주 기자
해안 절벽 앞 바다 위에 설치한 나무 데크 중간쯤에 이충무공의 동상이 있다. 크기가 광화문의 것과 비교해 크지 않아 왠지 친근하다. 광화문 동상은 높이가 6.5m인데 반해, 이곳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순신 동상은 바다를 등지고 고하도 케이블카 타워를 바라보고 있다. 또 시선은 해안 절벽에 막혀 있다. 고하도에 진을 친 이순신은 항시 섬을 등지고 멀리 바다를 관찰했을 것이다. 한데, 동상은 왜 육지를 향하게 놓았을까.
고하도 용머리 앞 해안 데크에 선 강제윤 시인. 목포 연안의 작은 섬들이 보인다. 김영주 기자
해안 데크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용머리가 나온다. 유달산을 마주 보고 있는 용머리는 목포 선창에서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지금도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모두 용머리 앞을 빠져나간다. 서쪽으로 곧장 가면 자은·암태·안좌도 등 신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차례로 만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해남 우수영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수영까지 바닷길로 약 30㎞.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치고 빠지던 길이다.
목포 고하도 용머리 길에서 바라본 목포대교와 유달산. 김영주 기자
용머리는 길이 3㎞의 목포대교로 이어져 있다. 목포 북항에서 출발한 다리는 고하도를 징검다리 삼아 남쪽으로 영암 삼호면, 해남 산이면으로 이어진다. 삼호면엔 최근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용머리에서 길은 이제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산 위로 올라가 걸어왔던 해안 길을 내려다보며 걷는 것이다. 케이블카 전망대를 지나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오솔길이 나타나고, 비로소 오붓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사람 한두명 다닐만한 작은 길이 이어지고, 길바닥엔 아직 푸르스름한 색을 잃지 않은 솔잎이 황톳길을 가득 덮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솔잎은 모두 아궁이를 지피는 땔감으로 쓰여, 맨바닥이었을 것이다.
고하도 용머리길. 작은 섬이지만, 용머리길엔 숲이 우거져 있다. 김영주 기자
소나무 향을 따라 걸으니 어느덧 이충무공을 기린 모충각(慕忠閣)에 다다랐다. ‘이충무공 고하도 유허비’가 있는 곳으로 고하도를 수군 통제영으로 삼게 된 경위와 군량미의 중요성 등이 기록돼 있다. 이충무공 사후 1722년 당시 통제사로 부임한 오중주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땐 야산에 버려지고, 또 일본인들이 비석에 총을 난사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오랫동안 버려진 탓에 지금도 훼손이 심한 상태다. 모충각은 아름드리 적송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 휑한 사당을 소나무만이 의연하게 지키고 있었다.
목포 고하도 달동 모충각에 있는 이순신 고하도 유허비. 김영주 기자
29일 맑음, 새벽 2시 첫 나발을 불어 배를 띄워 목포로 향했다.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목포에 이르러서 보화도에 옮겨 대었는데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으므로 진을 머무르게 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 난중일기 중. 1597년 10월 29일)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고하도에 도착한 후 가정 먼저 착수한 일은 관사와 병사(兵舍), 병영 창고 등을 짓는 것이었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따르면 명량해전 직후 근거지를 정하지 못하고 바다를 떠돌아야 했던 조선수군은 고하도 도착 첫날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후 고하도에서 100여일을 머물면서 수군 재건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 기간 조선수군은 함선 40척 이상, 수군 2000명 이상으로 병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1598년 일본군은 순천 등지로 퇴각했고, 이에 따라 조선수군은 동쪽으로 이동해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웠다. 노량해전의 기틀을 고하도에서 마련한 것이다.
모충각이 있는 달동은 지금은 작은 포구로 낚시꾼들을 실어 나르는 배 서너 척이 정박해 있었다. 달동에서 내려오자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서산에 걸친 해는 목포신항의 높다란 크레인을 비추고, 그 앞으로 놓인 갈대밭 습지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목포 고하도 달동에서 본 일몰. 갈대밭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김영주 기자
이날 트레킹은 달동에서 케이블카 종점까지 되돌아간 후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에 내려 등산로로 하산할 계획이었지만, 생각보다 해가 일찍 지는 바람에 여의치 않았다. 콜택시를 타고 목포 시내로 이동해야만 했다. 7㎞를 걷는데 두세 시간이면 족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두런두런 얘기하면서 걷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요즘 목포엔 방어와 삼치가 한창이다. 목포 북항, 자유시장, 청호시장 등 어딜 가나 방어·삼치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6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