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터지는 소리, 들어볼까요?
[김민철의 꽃이야기]
<215회>
길가 등 여기저기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했다. 달맞이꽃을 보면 박완서 단편 ‘티타임의 모녀’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부자집 아들인 운동권 남편과 사는 여공 출신 아내의 소외감과 불안을 그린 소설인데, 달맞이꽃이 중요한 상징으로 나오고 있다. 1993년 발표한 소설이므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달맞이꽃 필 때처럼 신경 곤두세우는 남편
주인공은 파출부인 엄마가 자신이 사는 대형 아파트에 와서 이것저것 감탄하며 파출부 티를 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위장취업한 남편을 만났다. 아들 지훈이를 낳아 서울 변두리 3층집 옥탑방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 집 주인은 옥상에 여러 야생화를 심어놓았는데 달맞이꽃도 피어 있었다. 다음은 달맞이꽃이 나오는 대목이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중략)
가만, 가만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입도 뻥긋 안 했건만 그이는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지훈이의 나스르르한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끼는 걸 보았다.
아아,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였어.
그이가 비로소 긴장에서 해방된 듯 가뿐한 소리를 냈다.>
소설에서 남편은 “이름을 알면 꽃이 다르게 보인다”며 도감을 찾거나 집 주인에게 물어 어떻게든 꽃 이름을 알아내 아들 지훈이에게 가르쳤다. 들꽃 지식은 남편이 주인공보다 많이 아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주눅들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편이 들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 주인공은 어디 가서 남편과 농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 지훈이가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남편은 으리으리한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켰는데, 남편 집안이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아들 용태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은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참담하다.
아들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가족은 곧바로 대형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다가라도 이 집이 내 집이라는 편안함을 맛본 적이 없다.’ 엄마는 ‘치마폭에 안겨준 복도 누리질 못하고 조바심을 해쌓냐’고 타박한다. ‘장손을 낳아준 아들 며느리한테 이 정도가 뭐 대수냐’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 친구들이 ‘전화위복이지 뭐냐고 그이의 어깨를 치면서 하는 말은 지훈이의 회복만은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편도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남편이 계속 운동권에 머물러야 남편과 관계도 유지될 것 같은데, 한번 안락한 삶으로 돌아온 남편은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남편의 쏠림을 달맞이꽃 필 때 귀 기울이던 모습에 비유하며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절묘하게 담고 있다.
◇달맞이꽃 피는 소리는 어느 정도 크기?
달맞이꽃은 이름 그대로 달을 뜨는 저녁에 꽃이 피었다가 아침에 시든다. 바늘꽃과 두해살이풀로, 여름에 4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밝은 노란색 꽃이 잎겨드랑이마다 한 개씩 달린다. 저녁에 꽃이 피는 이유는 주로 밤에 활동하는 박각시나 나방 등 야행성 곤충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꽃잎이 축 쳐진 모습을 보지만 밤 8시 정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듯 싱싱한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반전을 볼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대로 달맞이꽃이 필 때 실제로 소리가 나는걸까. 필자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식물책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 달맞이꽃 피는 밤에 몇번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꽃은 피는 소리를 듣기 전에 어느새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분꽃 피는 것과 같다고 할까. 서울 시내여서, 아주 고요한 곳이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였을까.
하지만 꽃잎이 벌어지는 움직임이 있으니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지인 중에서도 “분명히 들었다”고 하는 분이 있으니 달맞이꽃 피는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크기의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법정스님이 전남 순천 불일암에 거처할 때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달맞이꽃 피는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겨울에 공터 등에 가보면 땅바닥에 잎을 방석 모양으로 둥글게 펴고 바싹 엎드려 있는 식물들을 볼 수 있다. 냉이·민들레·애기똥풀·뽀리뱅이 등이 대표적으로, 그 모양이 마치 장미 꽃송이 같다고 로제트(rosette)형이라 부른다. 그 중 잎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색으로 자라는 식물이 달맞이꽃이다. 이런 형태로 겨울을 견디다 봄이 오자마자 재빨리 새순이 나와 쑥쑥 자라는 식물이다.
달맞이꽃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아주 친근한 식물이지만 고향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남아메리카 칠레인 귀화식물이다. 하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잡고 씨앗을 퍼트려 이제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아주 우거진 숲에는 들어가 살지 못하고 사람들이 파헤쳐 공터를 만들어 놓았거나 길을 만든 가장자리 또는 경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길쭉한 주머니같은 열매 속에 까만 씨앗이 들어 있는데, 한때 이 씨앗으로 짠 기름이 성인병에 좋다고 유행을 탄 적이 있다.
요즘에는 낮에 꽃이 피게 개량한 낮달맞이꽃도 주택가 화단 등에 많이 심고 있다. 그냥 달맞이꽃보다 꽃이 좀 더 크다. 낮에 피면서 꽃이 분홍색인 분홍낮달맞이꽃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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