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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의 꽃 이야기

생전 장례식 치른 할머니, 오롯이 도라지꽃이 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6. 25. 14:58

생전 장례식 치른 할머니, 오롯이 도라지꽃이 되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214회>

입력 2024.06.25. 00:00
 
 
 

“나 죽은 뒤에 우르르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 무슨 소용이야. 살아 있을 때, 누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홍민정 작가의 장편동화 ‘모두 웃는 장례식’에 나오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돌아오는 자신의 75번째 생일에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한다. 할머니는 유방암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 치마에 수놓은 도라지꽃

이 동화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6학년 윤서다.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엄마가 일하는 상하이로 떠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하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슬하 4남매가 너무 놀라 갈등을 겪다 할머니 부탁을 받아들이는 과정, 생전 장례식을 준비해 치르는 과정 등이 담겨 있다. 윤서도 할머니가 일한 시장 사람들의 육성을 영상으로 담는 등 생전 장례식 준비에 참여했다.

이 동화에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도라지꽃이다. 시장에서 할머니한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운 아주머니가 생전 장례식을 치른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온다. 할머니 한복을 지어왔는데, 한복 치마엔 도라지꽃이 선명하다.

<아주머니는 한복을 펼쳐 할머니의 몸에 대 주었다. 치마에 수놓은 보라색 꽃이 예뻤다. 할머니는 거칠고 마른 손으로 꽃무늬를 어루만졌다.

“도라지꽃이네.”

“네. 형님이 좋아하시잖아요.”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할머니는 생전 장례식날 이 한복을 입는다. ‘한복에 수놓은 도라지꽃이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났다.’ 윤서가 생전 장례식날 할머니에게 주는 감사패를 읽을 때 윤서 친구들이 할머니에게 주는 꽃다발에도 도라지꽃이 들어 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에 들고 있던 감사패를 할머니에게 주었다. 승준이가 전해 준 보라색 도라지꽃이 들어간 꽃다발도 안겨 주었다. 꽃다발을 든 할머니는 오롯이 도라지꽃이 되었다.>

                                                                                        도라지꽃.

 

이 할머니는 생전 장례식을 치른 지 두 달 남짓 지나 돌아가셨다. 태어나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장례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동화책이다. 생전 장례식이라는 소재를 너무 가볍게도, 너무 무겁게도 다루지 않은 것이 이 동화의 미덕이다. 예상 가능한 스토리인데도 몇몇 군데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읽었다.

2017년 일본 대기업 고마쓰의 안자키 사토루 전 대표는 말기암 진단을 받은 뒤 “40여 년 동안 신세 진 이들, 이후 여생을 같이 즐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신문에 생전 장례식을 열겠다는 광고를 냈다. 이 광고와 실제 생전 장례식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는 ‘생전 장례식’이라는 말을 이때 처음 들은 것 같다. ‘모두 웃는 장례식’은 이 기업인 얘기와 비슷하지만 시장에서 한복집을 운영한, 용기 있는 할머니 버전이다. 아들 친구가 ‘너희집 마당에 도라지꽃이 참 예뻤는데’라고 회상하는 것으로 보아 도라지꽃은 할머니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세 개의 별을 가진 도라지꽃

마침 주변에 도라지꽃이 막 피기 시작했다. 도라지꽃은 6∼8월 보라색 또는 흰색으로 피는데, 별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진 통꽃이 기품이 있으면서도 아름답다. 흰색과 보라색 사이에 중간색 같은 교잡이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도라지는 초롱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에서 볼 수 있으며,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하는 식물이다. 보통 40~100㎝ 자란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도라지는 밭에 재배하는 것으로, 나물로 먹는 것은 도라지 뿌리다.

문일평은 꽃이야기 책 ‘화하만필(花下漫筆·꽃밭 속의 생각)’에서 “도라지꽃 잎과 꽃의 자태가 모두 청초하면서도 어여쁘기만 하다”며 “다른 꽃에 비해 고요히 고립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적막한 빈산에 수도하는 여승이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도라지꽃을 별에 비유하는 글들이 많은데, 가만히 보면 도라지꽃에는 세 개의 별이 있다. 먼저 꽃이 벌어지기 직전, 오각형 꽃봉오리가 별 같이 생겼다. 도라지꽃은 개화 직전 누가 바람을 불어넣는 풍선처럼 오각형으로 부풀어 오른다.

도라지꽃. 꽃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것이 별 모양이고, 꽃 안쪽에 조그만 암술머리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것도 별 모양이다.

 

두번째로, 꽃잎이 활짝 펼쳐지면 통으로 붙어 있지만 다섯 갈래로 갈라진 것이 영락없는 별 모양이다. 그런데 꽃이 벌어지고 나면 꽃잎 안에 또 별이 있다. 꽃 안쪽에 조그만 암술머리가 다섯 갈래 별 모양으로 갈라진 채 뾰족히 내밀고 있는 것이다.

도라지꽃은 한여름에 오각형으로 부풀다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통꽃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라지꽃이 개화하기 직전,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가 서양 사람들한테는 풍선처럼 보인 모양이다. 그래서 도라지의 영어 이름은 ‘Balloon flower(풍선꽃)’다.

                                         도라지꽃. 꽃이 벌어지기 직전, 오각형 꽃봉오리가 별 같이 생겼다.

 

도라지꽃이 필 때 수술 꽃가루가 먼저 터져 날아간 다음에야 암술이 고개를 내민다. 자기꽃가루받이를 피하기위한 전략이다. 해바라기도 수술 꽃밥이 먼저 터지고 하루이틀 지난 다음, 암술대가 올라와 다른 개체의 수술 꽃가루가 오기를 기다린다. 반대로 천남성과 식물들은 암술이 먼저 나오고, 소나무는 암술머리가 수술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같은 나무의 꽃가루가 암술머리로 옮겨지는 것을 막는다. 식물들이 이렇게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막 피는 도라지꽃. 꽃이 벌어지기 직전, 오각형 꽃봉오리가 별 같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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