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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물공장 노동자에서 ‘100쇄’ 소설가로...김동식은 누구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4. 7. 22:34

[인터뷰]

주물공장 노동자에서 ‘100쇄’ 소설가로...김동식은 누구인가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24.04.06 08:00
 
  • 사진(제공) : 안규림
 
 
 

1,000편이 넘는 소설을 썼다. 100쇄를 찍은 소설집까지 나왔다. 30만 부 이상 팔려 나갔다. 눈과 귀뿐인가. 콧구멍도 커진다. 100쇄란 좀 쓴다 하는 작가들에게도 꿈의 숫자. 조세희, 조정래, 공지영, 은희경 그리고 정유정에 이르는, 엄청 유명한 이들에게나 벌어지는 일이니, 이 사람 무척이나 경이롭다. 
김동식(38)은 수해 전 이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 그를 모르는 이도 많다. 3년 전 소설가 은희경 인터뷰 제목을 ‘소설을 위로해줘’라 달았던 기억이 난다. 과거의 영화(?)에 비하면 소설이 외면당하는 시절 아닌가. 그의 소설이 주로 학생, 청년 등 인터넷 세대에 먹힌다는 점도 그가 성인층엔 다소 낯선 이유다. 
<회색인간> 100쇄 에디션과 생애 첫 에세이 출간을 구실 삼아 강호의 고수가 된 ‘괴물 작가’를 만났다. 궁금했다. 김동식은 누구인가. 

100쇄 작가가 됐다. 소감이 어떤가? 

뿌듯하다. 어디든 가서 말할 수 있는 타이틀이 생긴 기분… 그런 게 있다. 몇 쇄까지 찍고 싶다, 얼마까지 팔고 싶다, 라는 목표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고맙게도 이렇게 되고 보니 뭔가 업적을 이룬 듯한 느낌, 스스로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부담스러운 느낌도 들겠다.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할 것 같은 기대감 또는 강박 같은. 

100쇄를 찍었다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냥 내가 작가로서 성공했나 보다, 라는 현실감이 좀 더 들 뿐이다. 글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삶 자체가 그랬다. 꿈이나 목표 같은 게 없었다. 강박 같은 건 없다.

목표가 아니라면 이제부터 하고 싶은 것은? 

능력이 안 되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건 있다. 장편을 써보고 싶다. 하지만 시도를 해보곤 하지만 지금은 능력이 부족하다. 작은 것부터 할 생각은 있다. 경장편 정도. 글자 수 10만 자 내외 수준으로 써보고 싶다. 말해놓고 보니 목표가 있긴 한 것 같다(웃음).

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나? 단편을 쓰다가 인고의 과정을 거쳐 장편에 도전했던 걸로 안다. 

장편을 시도하려다 보면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있구나, 노동을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문제다. 직장인들이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적당한 루틴대로 때우듯 일하는 거, 내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한다. 즐거운 글쓰기가 어느새 일이 돼버리는 거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서 내 특유의 상상력으로 즐겁게 쓸 수 있는 단편이 더 좋다(웃음).

작가 김동식은 ‘초단편’ 소설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단편소설은 원고 80매 이상인 게 통례이지만 그는 30~40매 소설을 많이 써낸다. 손바닥 ‘장(掌)’ 자를 쓴 ‘장편소설’이 가장 짧은 소설이라면 김동식은 그 손바닥 소설 작가로 분류된다. 100쇄를 찍었다는 소설집 <회색인간>(요다)이 그의 대표작. 그 외 세상에 이름을 알린 소설집으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요괴>, <13일의 김남우>가 있다. 모두 2017년, 세 권이 동시에 세상에 나왔다. 
‘김동식’이라는 타이틀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앞서 말한 ‘초단편’ 위주로 쓴다는 점, 두 번째는 2, 3일마다 한 편씩 쓰는 다작 소설가라는 점. 1,000편이 넘는다. 완독한 팬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마지막은 무학의 공장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 중학 중퇴자이고 정규과정으로 문학을 공부한 적도 없다. 재봉공장과 타일 업체, 피씨방 종업원 노릇을 전전하다가 주물공장에서 10년을 일한 노동자. 매일 맞는 하루하루가 인생 그 자체였던 시간. 큰 행복도 없었지만 큰 불만도 없었던, 꿈이랄 게 따로 없는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적 없고 전공자도 아닌 이가 빠른 시간 안에 이만한 성취를 이루긴 매우 드문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냐 묻는다면 그나 독자나 한 입으로 ‘인터넷 때문’이라고 답할 터. 실제로 김동식은 인터넷이 발견하고 키운 ‘괴물’이었다. 한 문평가가 예의주시한 끝에 과감하게 발탁해 오프라인으로 끌어낸 게 시작이었다. 온라인 게시판만 달구다가 활자로 된 첫 책을 받아든 소감은 말로는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다. 게임도사였던 유년시절을 거쳐 글 쓰는 주물노동자로 살기까지 순탄치 못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을 터. 꿈이 없었다던 그가 성취의 맛을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을 듯하다.

김동식은 부산 영도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비탈진 산동네 한 골목에 집이 있었다. 이혼한 편모슬하에서 누나와 함께 자랐다. 너무 어린 나이였을 때라 아버지는 아예 기억조차 없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어 지낸 적은 없다. 동네 밖으로 나가 본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 더 잘난 놈들(?)과 비교할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존감이 강했던 ‘동식이’는 또래집단에서 관심을 받으려고 게임을 열심히 했고 잘했다. 돈이 부족해 남들 열 게임 할 때 한 게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면 안 되는 게임이었다. 동네엔 대적할 상대가 없더니 ‘영도구 1등’을 먹기도 했다. ‘스트리트 오브 파이터’가 유행이었을 때다.
학교 공부는 재미없었다. 숙제도 안 해 가기 일쑤여서 야단맞는 게 일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당연히 반대했을 테지만 그 고집을 꺾지 못한 듯. 아들이 어린 나이에도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뭘 해도 먹고 살긴 할 겁니다.” 학교를 자퇴해도 뭐든 해서 지 앞길 뚫을 놈이라 여긴 듯하다. 
가장 먼저 돈 벌러 간 곳이 조그만 재봉 공장. 쪽가위 쓰는 일이 서툴기도 했지만 종일 서서 하는 일이라 너무 힘들었다. 지인의 부름으로 대구에 가 고급 타일 까는 일을 배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이 재미있지 않은 데다 불경기를 타 업체가 휘청이자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엔 PC방. 착취라 느낄 정도로 시급은 적었지만 할 만했다. 비교적 오래 안주하며 일했던 곳이었다. 그러다 친척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와 자리 잡게 된 곳이 성수동 주물 공장. 뜨거운 쇳물을 주형틀에 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뜨거운 게 곤혹스러웠지만 몸은 편했다. 서로 간섭할 일도 없어 작업은 늘 혼자였다. 뜨거운 국자와 함께한 면벽참선. 10년이 곡절 없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글 올린 게 첫 시작이었다. ‘복날은 간다’라는 아이디가 특이했다. 

여전히 꿈이나 목표는 없었다. 이렇게 그냥저냥 먹고 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몸이 편해서인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그 게시판을 발견하고 짧은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다기보다 나도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가 히트를 칠 때여서 패러디해서 올렸다. 일부러 아재스럽게 했던 거다. 처음엔 유머 사이트니 히히덕거리자는 생각으로 즉흥적으로 만든 아이디였다. 소설을 연재하게 되면서 필명을 바꿔야 하지 않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차마 못 바꿨다. 이걸 바꾸면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덜컥 들어서였다. 두려웠다. 좀 장난스러운 아이디 뒤에 숨어 있어야 큰 기대들을 안 하실 것 같아서 계속…(웃음).

어리숙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영리했던 것 같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할 뿐이다. 그렇게 보인다면 아마 게임이 영향을 준 것일 수 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름 고수다(웃음). 어려서 학교 다닐 때나 요즘 학교에 강연 다닐 때나 학생들하고 순식간에 가까워질 수 있는 제일 좋은 수단이 게임이다. ‘하스스톤’이나 ‘롤’ 같은 게임 이야기를 하면 순식간에 친근감이 생긴다. 내가 300등 안에 든 챌린저라고 하면 애들이 환호하며 뒤집어진다. 어른들은 잘 모를 거다. 두뇌 게임이 많다. 그러다 보니 전략적 사고가 좀 있긴 한가 보다(웃음).

주물공장에서 면벽참선하며 상상한 것들이 글 소재가 되었다. 음울하거나 비관적 상상보다 위트 있고 재미있는 상상이 판타지로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워낙 낙천적 성격이었다. 타고났다. 글쓰기는 지루한 공장 일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내 처지를 비관한 적은 없다. 그냥 매일매일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살다가 나중에 나도 공장장이나 거래처 사람들처럼 살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는데, 욕망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안주했다고 표현해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인생이 대단히 행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게 불행하다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내 삶을 바꿔야 돼!’라는 의욕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이의 삶과 비교되지 않겠나. 

삶의 저울이 늘 균형을 유지하긴 힘들다. 남과 비교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인 데다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친구가 없었다. 서울에 와서도 공장에만 있으니 별다른 인간관계도 없었다. TV 속 사람들과 비교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억지로 비교를 해서 내가 누구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자존감이 강한 것 아니겠나. 

그런 것 같다. 바깥으로 말을 하진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늘 ‘나’라고 대답했다. 이상형을 물어도 답은 나였다. 물론 속으로(웃음). 그래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었다. 내 소설에 대한 서평을 볼 때도 뭔가 부족하다는 평에 다운되지 않는다. 내가 부족한 게 있긴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글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문학적으로는 좀 떨어질 수 있지만 대중이 원하는 글로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김동식 소설이 왜 인기인가에 대한 답도 거기 있나 보다.

 대중과 함께 호흡해서 그런 거 아닐까? 인터넷에 올렸던 초창기 글과 댓글을 보면 내가 남긴 대댓글이 재미있다. ‘재밌게 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써야 재밌을까요?’라고 했더라.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구한 거다.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무슨 글을 쓰고 제목은 어떻게 달며 키워드는 무엇을 써야 할까를 늘 고민했던 거다. 고민의 결과들이 먹히는 걸 보며 연구하고 또 고치며 의지를 키웠다.

학생 팬이 특히 많다. 기성세대보다는 디지털 세대에 맞는 작가라는 평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렇다. 게임 세대, 스마트폰 세대, 웹툰 세대에 맞다. 이 세대는 늘어지는 걸 못 참는다. 답답한 진행도 견디기 힘들어하고 뻔한 것도 싫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쉬워야 한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 부족을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점이 있긴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세대의 특질이다. 한탄만 할 수 없다. 그렇게라도 읽을 수 있다면 다행 아니겠나. 북 토크 현장에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한테 어떻게 오게 됐냐 했더니 엄마랑 같이 왔다며 내 책을 전부 봤고 너무 좋아한다고 하더라. 내 글이 쉽구나, 그래서 아이들도 내 책을 보게 됐구나, 생각하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요즘 아이들은 정보 습득도 빠르고 표현도 똑 부러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걱정하거나 나쁘다고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대체로 영리하고 착하고 순수하다. 소수이긴 하지만 무기력한 아이들이 있긴 하다. 그건 좀 안타깝다. 꿈도 없고 목표도 없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선생님들이 특히 그런 아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많이 해주길 원하시더라. 난 특별한 목표가 없었고 공부도 안 했지만 무기력하진 않았다. 재미있게 놀면서 지냈는데, 그조차 안 하는 무기력한 아이들은 걱정스럽긴 하다. 요즘 학교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적다.

소설 속에 요괴나 외계인, 지저인간 같은 ‘비인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상상은 어디로부터 나오나?

 어릴 때부터 해온 게임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컴퓨터 게임에는 꼭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나온다. <회색인간>에 나오는 ‘지저인간’도 어렸을 때 즐겼던 ‘슈퍼로봇대전’이라는 게임에서 따온 캐릭터다. 지하인간도 아니고 굳이 지저인간이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내겐 아주 익숙했던 거다.

중학교 중퇴다. 꼭 그래야만 했나? 

그냥 학교 가는 게 싫었다. 만날 혼나기만 하니까 싫었고 공부에 흥미가 없으니까 빨리 돈 버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당시엔 그게 극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환경이 영향을 준 것도 있을 것 같다. 부산 영도가 좀 가난한 동네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엔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의 종착역이라고 불린 동네였다.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글쓰기 전까지 평생 읽은 책이 다섯 권이라고 했다. 거짓말 같다.

 

 작가가 읽었음 직한 책을 안 읽었다는 얘기다. 만화책은 엄청 많이 봤다(웃음). 다섯 권은 넘을 것 같긴 한데 그나마 두 권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랑 <이방인>.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문장력과 구성력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장력을 뺀 나머지는 다른 콘텐츠에서도 배울 수 있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만화책이나 TV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에서도 얻을 게 많다. 문장력을 제외한 모든 장점들을 책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 다 배운 셈이다.

인터넷으로 독자들과 소통한 지 오래다. 인상 깊었던 선플, 악플을 꼽는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초창기 시절에 어떤 분이 ‘미래에서 왔다’며 댓글을 달았다. ‘작가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군요. 드디어 유명 작가가 된 걸 보고서 왔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암 투병 중인 여자 분이 ‘작가님 글 보려고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쓰신 적 있다. 그분 때문에 더 열심히 썼다.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난 뒤 북 콘서트 현장에 남친과 같이 찾아와 직접 축하도 해주셨다. 그런데 사인하려는 순간 갑자기 성함을 잊었다. 네 번이나 찾아오셨는데 큰 실수를 했다. 앞으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사과했는데, 얼마 뒤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남친의 연락을 받았다. 악플도 있긴 한데 반응하는 순간 긁히는 거라 반응을 하지 않는다. 어떤 분이 ‘난 이 사람 글 안 보는데…’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만 쓰니 어쩌라는 건지…(웃음). 악플이든 선플이든 모두 다 챙겨 보고 반응은 다 해준다.

무던하고 덤덤한 성격 같다. 희로애락을 일일이 표현하지 않는. 

감정 표현이 많지 않아 티가 잘 안 난다. 말수도 적은 편이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건 아니다. 말을 안 할 뿐 표정엔 꽤 나타난다. 글로 표현하는 게 더 쉽다.

스스로 예술을 모르고 할 줄도 모른다 했다. 장편을 쓸 만한 능력도 없다고 했다. 어떤 면이 부족하다는 건가? 

 

절대 못한다는 뜻이라기보다 내겐 덜 어울린다는 뜻이다. 말하기 민망하지만, 몹쓸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나는 대중 픽이야. 그쪽에선 내가 최고야’라는 생각으로 잘하는 쪽을 선택하는 거다. ‘예술인인 척’, ‘잰 척’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인드 때문에 저절로 차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이미지 관리를 한다고나 할까(웃음). 실제로 내 자질과 능력이 예술적일 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도 안다. 예전에 영화 <살인의 추억>을 봤다. 난 그냥 재미있는 오락영화로 봤을 뿐인데, 영화평을 보니 장면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가 너무 많았다. 죄다 예술적으로 해석한 글들이었다. 나는 그게 안 보였다. 같은 영화를 봤지만 완전 다른 영화를 본 셈이다.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예술을 잘 모릅니다’라고 말한 것 같다. 

 

에세이를 처음 출간했다.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요다)에서 ‘굶어 죽기도 힘들다’라는 표현을 보고 한참 웃었다. 

말 그대로다.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너무 많더라. 남과 비교해 더 나은 걸 욕심 부리니까 못 사는 것 같고,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지레 겁먹는 것 아닐까? 내가 꿈도 목표도 별다른 게 없었다는 건 이런 마음으로 욕심 없이 살아서였던 것 같다. 
  
음식의 맛도 마음가짐, 돈도 마음가짐, 사랑도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너무 이른 나이부터 자기성찰에 익숙해진 것 같다.

 자기성찰까지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부터 자기객관화는 잘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게 사는 데 편리했다. 자기를 잘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거라는 생각도 컸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면 얼마나 창피하겠나. 어려서부터 엄마한테 “난 어차피 뭘 해서든 먹고 산다. 굶어 죽진 않는다”고 했던 것도 자기객관화가 있었기 때문에 한 소리다.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안 계셨으니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겠다. 그런데도 아들을 넉넉히 이해해주셨나 보다.

 고생하셨다. 공공근로도 많이 하시고 마늘도 많이 까시고… 생계를 잇기 위해 뭐든 열심히 사셨다. 아들놈이 원체 그런 놈인 거 아니까 크게 반대하신 일은 없었다.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나와 다르지만 엇비슷한 자질이 있나 생각한 적 있다.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 세탁기를 받아서 깜짝 놀랐다. 그건 진짜 대단한 일 아닌가(웃음).

아직 미혼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욕심도 없나? 

예전엔 진짜 모르고 살았는데, 실은 요즘에 생각을 많이 한다. 작가가 되고 책을 내고 나니 사람 만날 일이 훨씬 많아졌다. 공장 생활을 할 때는 만나는 거라고는 눈앞의 벽이 전부였는데, 내 앞의 세상이 바뀐 거다. 강연을 많이 다니니 많은 관계들이 생겨난다. 나는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 자꾸 만나니까 재밌고 좋더라. 결혼도 ‘꼭 하고 싶다’로 바뀌었다. 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결혼에 대한 예전 마인드는, 손해 볼 확률이 있는 건 도박이니까 도박해서 불행해지지 말고 아예 도전하지 말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늦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 요즘 가장 부러운 게 엄마아빠가 아이와 식당에서 함께 밥 먹는 모습이다. 올해 안에 뭔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도 취할 생각이다.

특단?… 어쩌겠다는 건가?

결혼정보회사(웃음).

 

드디어 삶의 목표가 생겼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다.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부러울 것도 없고 욕심도 없다고 했는데, 이젠 좀 달라진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의 행복을 좀 눈치 챈 것 같고 나도 욕망하게 됐다. 작가로서 더 나은 성취를 이루겠다는 목표도 있지만, 지금 특히 욕망하는 건 ‘가족’이다. 결혼을 통해 이루는 가정이 내가 살아가는 새로운 이유가 될 것 같다.

‘안 할 이유가 없으면 웬만하면 다 한다’고 했다. 너무 피곤하지 않나? 

내겐 그런 마인드가 오히려 편하고 좋다. 기회가 왔을 때 안 할 이유가 없다면 그냥 해버리는 게 좋다. 목표나 계획 없이 산 나 같은 사람한테는 기회라는 게 그리 자주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마인드로 살았는지 모른다. 대신에 안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할 땐 아주 세심하게 고민한다. 이유가 나오면 바로 거절한다. 질질 끄는 것보다 깔끔한 게 좋은 성격 탓일 수도 있다.

김동식 작품에 등장하는 미래는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지구환경 변화와 기술 발달, 인구 소멸이 걱정된다. 미래는 재앙뿐일까? 

난 미래를 긍정하는 편이다. 해결책들이 나올 것이다. 예를 들어 저출산과 인구 소멸을 많이 얘기하는데 나는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인공자궁을 합법화시키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합계 출산율이 최악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 기술 적용이 가장 빠를 것 같다. 이민자 수용에 한계가 있는 데다 우리가 단일민족 국가라는 이유도 요인이 될 것 같다. 이건 소설 소재로도 활용하고 싶다. 

에세이 책 제목이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이다. 지금 김동식의 삶은 무슨 색인가?

 한 가지 색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총천연색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극히 단순했던 인생이 버라이어티로 바뀌었다.

실제로 가장 좋아하는 색은? 

소설 제목 때문인지 회색을 좋아했다. 글을 쓰기 전 어린 시절엔 하늘색을 좋아했고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고 쓰곤 했다. 눈에 제일 이쁜 색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하늘색이 사라지고 무채색처럼 살았던 것 같다. 하늘색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유머’ 게시판 시절이 한창 신날 때였을 것 같다. 성공한 작가가 된 지금, 글쓰기는 놀이인가 일인가? 

쓰는 일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재미있다. 특히 소설을 쓰는 건 늘 놀이처럼 재미있다. 그런데 몇몇 글 작업은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청탁받은 칼럼 같은 게 그렇다. 독자층을 감안해야 하니까. 그럴 땐 일이 된다. 완전히 즐기지 못한다.

살아온 이력이나 성향, 작품을 보면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 보인다. 성선설과 성악설, 어느 걸 믿나? 

성선설 쪽이다. 사람은 대개 선하다. 살면서 느꼈다. 만난 사람들 90% 이상은 선한 분들이었다. 간혹 악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따져보면 각자 입체적인 이유가 있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사람도 동물이니까 때론 동물적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구나… 정도로 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결혼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연애 소질은 몇 점? 

점수가 나올 리 있겠나. 젬병이다. 요즘 흔한 말로는 썸 탄다고 하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른다. 누구한테 관심이 좀 생겨도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 모르겠고, 내 관심이 민폐가 될까 지레 두렵기도 하다. 강연 나가면 관계자들이 강연자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는 건데 이걸 특별한 관심으로 오해하면 안 되지 않나. 착각하고 나도 플러팅을 하는 순간 졸지에 선 넘는 인간, 눈치 없는 진상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자꾸 절제하게 된다. 전에는 늘 거절했던 소개팅이나 열심히 하려고 한다(웃음).

강연은 얼마나 몰리나? 자주 오르는 주제는? 

작년 기준으로 연 400회 정도 한 것 같다. 전국 학교와 기업, 단체로 다니니 이동 시간이 엄청나게 길다. 차 안에서 구상도 하고 쓰기도 한다. 피곤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이동 시간에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성인보다 학생이 주 대상이다. 2대 8 정도? 따로 요청한 주제가 없으면 그냥 솔직하게 내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그 과정 스토리를 들려준다. 공장 노동자를 작가로 태어나게 한 세 가지 비결에 대해 말해준다. 운과 꾸준함, 태도라고 늘 말한다. 글 쓰는 법에 대한 강의를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

건대입구 반지하방은 벗어났나?

 아직 거기 산다. 주변 인프라도 부족함 없고 조용해서 좋다. 계속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웃음). 작가로 알려지고 돈 여유가 좀 생겨 이사 갈 생각을 잠깐 하긴 했고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 멈췄다. 혼자 결정하지 말고 결혼할 때 배우자와 함께 집을 정하고 싶어졌다. 나는 자유직업이니까 상관없다. 미래의 신부가 원하는 곳으로 이사가 살고 싶다.

어느 기사에선가 그를 ‘오락실 김동식’으로 쓴 걸 봤다. 그의 유년시절은 오락실 게임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스스로 강조하는 강한 자존감의 근원은 게임이자 오락실이다. 그중에서도 ‘킹오파(킹 오브 파이터즈)’는 어디에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기록까지 보유했다고 들었다. 남들보다 주머니가 가벼워 이겨야 오래 놀 수 있었다는 소년 김동식. 작가가 된 그가 지금도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게임처럼 대중이 원하는 글쓰기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다시 공장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속내야 어디 그렇겠나. 이겨야 오래 놀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어떤 펀치를 던지고 어디에 킥을 날려야 유효한지 안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무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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