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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80] 만이불일(滿而不溢)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3. 22. 15:45

[정민의 世說新語]

[180] 만이불일(滿而不溢)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10.16. 23:30
 
 
 

이조판서 이문원(李文源·1740~1794)의 세 아들이 가평에서 아버지를 뵈러 상경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말을 타고 온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아직 젊은데 고작 100여리 걷는 것이 싫어 말을 타다니. 힘쓰는 것을 이렇듯 싫어해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즉시 걸어 가평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도보로 올 것을 명령했다.

그 세 아들 중 한 사람이 이존수(李存秀·1772~1829)다.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李天輔)였다. 영의정의 손자요 현임 이조판서의 아들들이 말 타고 왔다가 불호령을 받고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이존수 또한 뒤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나고 말하고 침묵함이 법도에 맞았고, 지휘하고 일을 살피는 것이 민첩하고 명민해서 간교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속일 수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석주(洪奭周)가 '학강산필(鶴岡散筆)'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효경'에는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다. 절제하고 아껴 법도를 삼가면 가득차도 넘치지 않는다(在上不驕, 高而不危. 制節謹度, 滿而不溢)"고 했다. "네가 다만 뽐내지 않으면 천하가 너와 더불어 공을 다투지 않고, 네가 남을 치지 않으면 천하가 너와 더불어 능함을 다투지 않는다(爾唯不矜, 天下莫與汝爭功, 爾唯不伐, 天下莫與汝爭能)". 이것은 '서경(書經)'에 보인다.

성대중(成大中)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한신(韓信)이 큰 공을 세우고도 끝내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을 열거한 뒤, "뜻을 얻자 기운이 높아져 도량은 좁아지고 지혜는 어두워졌다(意得氣亢, 量狹知昏)"는 여덟 자로 그의 생애를 요약했다. 득의의 순간에 기세를 낮추고, 도량을 넓혀 겸양으로 처신하는 것, 이것이 부귀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비결이다. 그러지 않고 기운을 뽐내고 재주를 자랑하면 끝내 화를 면치 못한다.

높아지고 가득 채우고 싶어하는 욕심은 누구나 같다. 하지만 그 끝이 자주 위태롭고, 넘쳐흘러 제풀에 무너지고 마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걸어서 다시 오라고 아들을 돌려세우던 이조판서 이문원의 매서운 가르침이 자꾸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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