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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77] 분도양표(分道揚鑣)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2. 16. 16:38

[정민의 세설신어]

[177] 분도양표(分道揚鑣)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9.25. 23:31
 
 
 
 

 

 

남북조 시절 북위(北魏)의 대신 원제(元齊)는 여러 차례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황제가 그를 높여 하간공(河間公)에 봉했다. 그의 아들 원지(元志) 또한 총명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낙양령(洛陽令)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어사중위(御史中尉) 이표(李彪)의 건의로 산서성 평성(平城)에 있던 도읍이 낙양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일개 지방 현령이었던 원지는 하루아침에 경조윤(京兆尹)이 되었다. 경조윤은 오늘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원지는 평소 제 재주를 자부하여, 조정의 지위 높은 벼슬아치를 우습게 보았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공교롭게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이표의 수레와 마주쳤다. 조정의 지위로 보아 원지는 이표보다 훨씬 낮은 직급이었다. 길을 양보해 비키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원지는 끝내 이표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격앙한 이표가 원지를 나무랐다. "나는 어사중위다. 관직으로 봐도 너보다 한참 위인데, 어찌 길을 양보하지 않는가?" 원지가 지지 않고 맞섰다. "나는 이곳 낙양의 수령이오. 내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낙양에 거주하는 주민에 지나지 않소. 고을 수령이 거주민에게 길을 양보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소."

둘은 팽팽하게 맞서 물러서지 않았다. 조정 서열로 보면 이표의 말이 맞고, 원지의 말도 조리가 있었다. 게다가 원지는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원제의 아들이었다. 난감해진 효문제(孝文帝)가 말했다. "낙양은 나의 도읍지다. 앞으로는 길을 나눠 수레를 몰고 가도록 하라."

길을 나눠 말을 몰고 간다는 분도양표(分道揚鑣)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표(鑣)는 말에게 물리는 재갈이다. 재갈을 치켜든다는 양표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후세에는 품은 뜻과 지향하는 목표가 다를 때 각자의 길을 가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길은 하나뿐인데 둘이 마주쳤다.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 자칫 지위와 재능으로 다투다 보면 한쪽이 다친다. 반씩 나눠 제 길을 가면 임금은 아끼는 두 신하를 지켜 좋고, 두 사람은 각자 체면을 세워 좋다. 효문제의 평결은 왠지 원지 쪽에 힘을 실어준 느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반대 방향에서 마주친 것이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 나란히 달려갈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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