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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人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그 주장은 위험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24. 11:20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惡人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그 주장은 위험하다

 

선정적인 범죄 보도 물론 피해야… 하지만 세상에 무조건은 없어
‘聖戰’ 외친 인종 학살, 자신만 정의고 상대는 ‘서사 없는 惡’ 취급
얄팍한 단순화 반복할수록 인간은 윤리 잃고 더 잔인해진다

입력 2023.08.24. 03:00
 
                                                                                          일러스트=이철원

 

구호나 아포리즘, 밈이 담론을 대체하는 것이 소셜미디어 시대의 비극이다(구호나 아포리즘, 밈을 담론이라고 믿는 것은 코미디이고). 때로 그런 구호가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 노릇’을 하는 모습도 목격하는데, 그럴 때에는 비극이 아니라 공포물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 작은따옴표 안의 문구는 미국의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덴비가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을 회고하며 사용한 표현이다. 덴비는 당시 언더그라운드 언론들이 청년들에게 그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썼다. 그러고 보면 1960년대 서구 사회의 반문화-신좌파 운동과 지금의 ‘정치적 올바름’ 지향도 겹치는 지점이 많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돌고래출판사가 낸 단행본 ‘악인의 서사’ 기획 의도가 반갑다. 얼마 전부터 소셜미디어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를 주제로 필자 9명이 200자 원고지 40~70장 분량으로 글을 썼다. 나는 이것을 구호를 담론화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한다. 구호와 담론의 큰 차이는 내용의 구체성과 논리의 정교함에 있을 텐데, 그래서 구호에는 한계가 없고 비판하기도 어려운 반면 담론은 그렇지 않다. 구호에는 시적인 언어의 힘이 있지만 맥락이 생략되어 있고, 담론은 그 반대다.

 

다른 모든 구호가 그렇듯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맥락에서는 적절하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 간명한 슬로건은 당초 현실의 잔혹 범죄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규탄하기 위해 대두됐지만, 머잖아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원칙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이 작은따옴표 안의 문장은 ‘악인의 서사’ 편집자 서문에서 가져왔다. 김지운 편집자의 분석에 따르면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되어 이제 ‘대중화된 통설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나는 비극, 코미디, 공포물에 이어 부조리극을 떠올린다. 내가 생각하는 첫째 부조리는 ‘서사 없이 어떤 인간이 악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서사로 이해하는 동물이며, 서사 정보 없이 도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즉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이미 서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느 지점에서 멈추겠다,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끝났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서사 예술이 수용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오히려 그런 태도의 반대 지점에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 살인마이고,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는 간통을 저질렀고, 히스클리프는 스토커, 뫼르소는 묻지 마 살인범인데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읽으며 도덕적 판단이 흔들리거나 최소한 악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돼 당혹스러워한다

 

그 사실이 둘째 부조리로 이어진다. 인류사에는 한 개인의 광증이나 직업 범죄자의 탐욕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악행이 있어 왔다. 성전(聖戰)이라고 하는 끔찍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정의를 수행한다고 여겼다. 상대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얄팍한 서사를 굳게 믿었기에, 그 이상의 서사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악행을 반복하는 지독한 아이러니는 작은 규모로도 흔히 일어난다. 어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특정 멤버를 괴롭힌 것 같다는 심증으로 전 국민이 그 청년들을 괴롭힌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굳게 믿을수록 더 잔인해진다. 호모사피엔스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나는 그보다는 늘 흔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쉽게 악마화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사 없는 악인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복수극이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픽션 아닐까 싶다.

 

선정적인 범죄 보도가 낳을 수 있는 피해가 있다. 악인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더 유능한 것으로 묘사하며 악행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창작물도 있다(그런데 화려한 스포츠카가 등장하는 갱스터 랩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비서사적 요소도 그런 선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런 선정성과 도덕적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서사를 막자는 발상은 상투적 범죄물 속 악인의 초상만큼이나 얄팍하다. 그리고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