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작가 박경리가 편애한 ‘옥잠화 여인’
<191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서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 임명희는 조연급이다. 그런데도 토지 3~5부에 자주 등장하고 좋게 묘사되는 인물 중 하나다. 소설에서 서희, 유인실, 양현 등과 함께 작가가 빼어난 미인으로 묘사한 여성이기도 하다.
임명희는 신분이 중인 출신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똑똑한 여성이었다. 혼기에 이르렀을 때 임명희는 마음에 둔 이상현에게 청혼 아닌 청혼을 하면서 떠보지만 이상현이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친일파 집안의 장남 조용하와 결혼한다. 원래 조용하의 동생 조찬하가 임명희에게 마음에 두었는데 형 조용하가 이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혼한 후 임명희와 동생 찬하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임명희를 모욕하고 학대한다. 견디다 못한 명희는 이혼을 선언하고 남해안 통영에 내려가 지낸다. 그리고 조용하가 암에 걸려 자살한 다음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서울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며 지낸다.
이 정도 역할인데도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 임명희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여러 대목에서 드러내고 있다. 임명희를 옥잠화에 비유하는 대목도 그중 하나다. 명희가 유치원을 운영할 때 일본 유학 선배 강선혜가 찾아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집 뒤뜰에 옥잠화가 피어 있었다.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까부터 나는데.”
“냄새라니요?”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아아, 옥잠화예요.”
“옥잠화라니.”
“뒤뜰에 피었어요. 지금이 한창이라 향기가 짙어요.”
“어디.”
강선혜는 일어나서 뒤뜰 쪽으로 다가가 내다본다. 하얀 옥잠화가 꽃대를 따라 맺어가며 시작 부분에서는 활짝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꽤 여러 포기 옥잠화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순백이라는 말은 아마도 옥잠화를 두고 표현했을거야. 저런 흰빛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눈도 저 빛은 아니야. 어떤 꽃도 저 같은 흰빛으론 피지 않아. 백합 따위는 옥잠화에 비하면 지저분하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듯, 선혜는 침이 마르게 옥잠화를 찬송하다가 풀어진 치마끈을 여미고 다리를 쭉 뻗는다.
“옛날의 임명희가 저 옥잠화 같았지.”> (17권 100쪽)
작가는 임명희에 옥잠화같은 ‘순백’의 이미지와 좋은 향기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임명희를 통해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기는 있지만 재력가 집안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편애에 가깝게 임명희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막판에 임명희가 지리산 조직에 거금인 5000원을 희사하는 것도 작가의 임명희에 대한 애정을 반영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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