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밤낮 詩·詩… 시 쓰는게 시시해졌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21. 09:39

“밤낮 詩·詩… 시 쓰는게 시시해졌다”

‘오늘은 좀…’ 펴낸 시인 문정희 “집착 버리니 詩 더 나아지더라”

입력 2022.09.21 03:00
 
 
 
 
 
시인 문정희는 “잠깐 시를 쓰다 만 게 아니라, 좌충우돌하면서 지금도 시를 쓴다는 점에서 나는 성공했다”며 “앞으로 시를 통해 내 얘기를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태어나서 한 거라고는 글과 시를 쓴 것밖에 없는데, 여기 와서 보니 손에 아무것도 없더라. 영원하고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후회와 절망이 포함된 사랑이 더 굵직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정희(75) 시인이 열다섯 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민음사)를 냈다. 자신의 피를 잉크로 삼아 53년 동안 여성의 삶을 노래해 온 시인은 “밤낮으로 ‘시’ ‘시’ 하다가 시를 쓰는 게 시시해져버렸다”고 고백한다. 시를 써 내려간 그의 피는 여전히 뜨겁지만 그 속에 차가운 눈송이 하나를 품고 있다. 이번 시집은 뜨거움이 차가움을 만나 단단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시들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망각을 위하여’)

 

4년 만의 시집이다. 시를 지우고 다시 쓰다가 예상보다 1년이 더 걸렸다. “매 시집마다 새로운 시인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도 3개월 다녀왔지만, 내 체취를 없애지 못해 시를 전부 망가뜨렸다. 그러다 ‘시시하고 부족한 게 시구나, 그걸 쓰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시인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절망과 실패를 그대로 둔 채, 손을 멈췄다. “미완으로 완성이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방어막’을 벗어던진다. “이전과 다르게 시에 달린 주석을 거의 없앴다. 나에게 주석은 한국의 여성 시인으로 살면서 다소의 억압과 편견에 대한 방어책이다. ‘여자 중에 걔가 낫지’ 정도의 평가를 받는 여성 시인이 ‘너희들 이거 모르지’라며 말하는 유치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조차 부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나는 발가벗고 갈 테니.”

 

시인은 여성의 억압된 삶을 노래한 자신의 시의 수명이 다하기를 소망한다. “미 컬럼비아 대학에서 한국 여성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기에,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를 넣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시가 미국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더라. 그런데 우리는 현실 속에서 여성의 제약과 차별이 여전히 유효하다. 내 시대보다는 낫지만, 여성들이 ‘악악’댈 줄 아는 정도이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소녀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시인이 됐다. 2010년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받고, 지금까지 14권의 시집이 1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코로나 이후 시 축제, 해외 강연 등 일정이 대부분 취소됐지만, 이제는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최근 시집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데 이어, 중국어 번역 출간도 앞두고 있다.

 

“내가 영원한 시인일 줄 알았는데, 이제는 괴상한 옷을 입고 시를 쓸 시간이 안 남았다. 앞으로 쓸 얘기가 너무 많아서 미칠 것 같다. 지금 시대에 가장 팔팔 뛰었던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