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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1차 세계대전] 佛베르됭 전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1. 9. 11:21

8개월간 쏟아진 포탄 6000만발… 병사 70만명이 참호서 죽어갔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3] [1차 세계대전] 佛베르됭 전투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11.09 03:00

 

1918년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발효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례 없이 처참했던 4년 동안의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세계는 대전(大戰)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살의 공포를 모르던 호시절(Belle Epoque)은 영영 지나갔다. 지옥 같았던 이 전쟁은 현대 세계를 향한 불가역적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프랑스 북동부 베르됭에서 벌어진 전투는 세계 1차대전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군은 처음부터 베르됭을 차지하기 위해 대량 살상을 계획하고 엄청난 포격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사상자만 60만~70만명이 나왔다. 역사가들은 이런 엄청난 비극이 왜,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림은 1916년 베르됭 전투 당시 참호를 파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군인들의 모습. /AFP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하더라도 각국 지도자와 국민은 19세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은 단기간에 끝날 국지전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했다. 젊은이들은 남자답게 용감하게 싸워 명예를 안고 오겠다는 순진한 감정으로 어깨동무하고 웃으며 전장으로 떠났다. 이들의 환상은 얼마 안 가 무참히 깨졌다. 순진무구한 젊은이들은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졌다. 지옥을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복지 증대를 위해 부단히 발전해 온 과학기술과 산업의 힘이었다. 무엇보다 기관총이 ‘전투의 여왕’이 되었다. 철조망을 두른 높은 진지에서 산등성이를 기어 올라오는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면 한 번에 수십 명, 심지어 수백 명씩 사살이 가능해졌다. 참호 안에 몸을 웅크린 병사들 위로 대포와 박격포탄이 떨어졌고, 독가스까지 사용하자 짐승보다 못한 죽음에 내몰렸다.

1차대전 최악 전투 중 하나로 베르됭(Verdun) 전투를 들 수 있다. 파리를 향해 돌진하려던 독일의 슐리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15년부터 전선이 교착되었다.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이어진 긴 전선에서 양측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 대치했다. 독일군은 러시아와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나, 프랑스·영국과 맞선 서부 전선에서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이 베르됭 공격이었다.

1차대전 격전지였던 프랑스 북동부 베르됭의 핵심 요새 두오몽 지역에 세워진 묘지와 납골당, 기념 건조물의 모습. 1만6142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1차대전 전사자 묘지 중 최대 규모다. /Jean-Pol GRANDMONT

독일군의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장군은 한 지점에 집중 공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이 맹렬하게 반격해오도록 유도한 후 상대방의 병사와 물자를 소진시켜 버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장소로 베르됭을 선택한 것이다. 팔켄하인은 프랑스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베르됭은 프랑스 역사에서 늘 급소 지점이었다. 프랑스혁명 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차지한 후 파리로 진격하는 길이 열렸던 것처럼(1792년 8월) 프랑스로서는 베르됭을 빼앗기면 치명적 피해를 당하게 된다. 팔켄하인은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베르됭을 공격하면 프랑스 지휘 본부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병사를 투입할 것이며, 이들을 꺾어놓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말하자면 이번 전투는 애초에 진격보다는 대량 살상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포격을 시작으로 독일군이 베르됭을 공격하자 프랑스군은 예상했던 대로 반응했다. 페탱 장군은 이곳으로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와서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2월에 시작한 독일군의 공격은 끔찍한 희생을 치러가며 조금씩 전진해 갔고, 베르됭 전면의 두오몽(Douaumont) 요새도 빼앗았다. 5월부터는 완벽한 소모전 양상을 띠었다. 포탄이 쏟아지면 병사들은 동물처럼 최대한 몸을 구부리고 땅에 바짝 붙어서 버텼다. 그런데 프랑스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사상자가 수십만 명 나오자 독일군으로서는 더 이상 공격이 힘들어졌고, 6월 말부터는 오히려 프랑스군이 잃었던 곳을 되찾으며 서서히 반격해 갔다. 연말이 되자 프랑스군은 이전에 빼앗겼던 곳을 거의 회복했다. 결국 여덟 달 동안 포탄을 6천만 발 쏟아부으며 사상자를 60만~70만명 낸 끝에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 셈이다. 만일 외계인이 하늘에서 이 꼴을 지켜보았다면 지구인들은 왜 저런 한심한 방식으로 서로 죽이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프랑스 베르됭

격전지였던 두오몽 지역에는 전사자 묘지와 납골당 및 기념 건조물이 세워져 있다. 1만6142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묘지는 1차대전 전사자 묘지 중 최대 규모다. 여기 묻힌 병사들은 그나마 신원이 밝혀진 사람들이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도 없이 뒤엉켜 죽은 13만명의 유해는 그대로 납골당에 보존하고 그 위에 기념물을 지었다. 백년 전 지옥 불구덩이에서 비참하게 죽은 두 나라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뼈가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노라면 가슴이 아려온다.

1차대전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럽 전체적으로 사망자만 1000만명 수준이다. 독일 200만명, 러시아 180만명, 프랑스 140만명, 오스트리아-헝가리 110만명, 영국 75만명, 그리고 1917년에 참전한 미국도 75만명이 희생되었다. 희생자 대부분 한창 일할 젊은 남자여서 전후에도 악영향이 지속되었다. 프랑스를 보면 사망자 140만명에 부상자 280만명을 더하면 사상자가 420만명에 달하여, 징집된 사람 2명 중 1명꼴이다. 그중 20만명은 수족이 잘리거나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안면 부상병(gueules cassées)’이었다. 특히 1915년에 20세였던 세대(’classe 1915′)는 사망자만 27%이고 부상자가 그 두 배이므로 결국 4명 중 3명이 죽거나 부상한 불운한 세대다. 프랑스의 명문 대학 에콜노르말은 1914학번 211명 중 107명(51%)이 사망하여 장래 교수와 연구진이 될 핵심 인력을 잃었다. 40~45세까지 징병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견 인사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1873년생 작가인 샤를 페기(Charles Peguy)가 그런 사례로서, 일선으로 나가겠다고 자원했다가 1914년 9월 41세에 이마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스스로 ‘불의 세대’라 칭했다. 참호에서 불지옥을 경험한 이 세대는 공통적으로 고뇌, 불안, 심리적 상처를 안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느낀 전사자들에 대한 부채 의식은 간전기(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시기) 사회의 심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각국은 전쟁으로 청년 없는 나라, 엘리트가 사라진 국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엄청난 비극이 어떻게 해서 시작했는지, 과연 전쟁 발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한 실정이다. 19세기 말 이래 강대국 간 격렬한 갈등이 쌓였고, 발칸 지역 정세 변화에 따른 강렬한 민족주의 분출 등이 대폭발을 일으킨 요소라는 점은 대개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요소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유럽의 모든 국가와 식민지가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이유는 없었다. 세르비아 청년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이 방아쇠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때 세계 공멸의 대비극을 막을 방도가 전혀 없었을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구조적 요인으로 세계대전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지난날 주장보다는, 국제적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고 호전적 민족주의 분위기에 편승하려던 정치 지도자들의 과오를 부각한다. 세계대전은 저절로 일어난 게 아니라 결국 이들이 일으켰기 때문이다.

백년이 지난 오늘날, 분위기는 극적으로 변했다. 지난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고별 방문을 맞이하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부르고뉴의 포도주 생산 중심지인 본(Beaune)의 고성에서 따뜻하게 영접하며 그동안의 협력에 감사를 표했다. 양국 지도자들은 지난날의 비극적 역사와는 다른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1차대전 휴전 조약]

콩피에뉴(Compiègne)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65㎞ 떨어진 소도시다. 이 근처 숲속에서 11월 11일 새벽 5시 15분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1918년 11월, 연합국과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을 맺은 프랑스 콩피에뉴의 숲에서 자신의 특별 객차 앞에 서 있는 당시 연합군 대원수 페르디낭 포슈(가운데)와 그의 참모로 활약한 막심 베강(왼쪽에서 둘째). /독일 연방기록물 보관소

1918년 9월 이후 독일군으로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미군이 물밀듯 밀려오는 상황에서 독일 내부에서 킬 군항(軍港)의 수병(水兵) 폭동이 터지고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 임시정부는 11월 7일부터 휴전을 모색했다. 프랑스 측 포슈 장군은 콩피에뉴-수아송 철도 노선이 지나는 콩피에뉴 숲속에 열차 차량을 대놓고 이곳에서 독일 전권 대사를 만나 휴전 조건을 논의했다. 양측은 휴전 조약에 서명하고 ‘11월 11일 11시부터 모든 전선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22년 뒤인 1940년 6월 21일, 2차대전 초기 프랑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같은 장소에 같은 차량을 옮겨놓고 프랑스가 가혹한 조건의 휴전 조약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어서 지난날의 모욕을 되갚았다. 그 후 히틀러는 이 차량을 베를린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그 장소는 복원했지만 차량은 사라졌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거의 근접하여 나치의 패망이 가까워진 순간, 히틀러가 차량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에게 1918년 패배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어서, 죽기 전에 그 흔적을 영원히 없애려 했던 것 같다. 현재는 1950년에 그곳에 갖다 놓은 같은 종류의 차량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