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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언어, 재생의 소리들- 21세기 현대시의 동향 /김선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9. 29. 12:21

미지의 언어, 재생의 소리들

- 21세기 현대시의 동향

 

 

김선주(문학평론가)

 

 

 

1. 존재 은폐의 명명법

 

 

1세기 이후의 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또 1세기 이전의 시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의 세계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에 1세기 후의 시대가 처해 있는 비구체성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이 사실과 더불어 역사를 통해 한 가지 공포와 마주친다. 나의 세기는 1세기 전에도 1세기 후에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시간은 두 세기의 위치를 능숙하게 바꿔치기했고 나의 이 삶은 순전히 시간성에 기대어 있다. 나는 여기 있고 저들은 종이 표피 위에 박제됐다. 훗날 나도 그 전철을 밟게 되리라.

그런데 그 종이 표피, 이른바 텍스트성에도 실로 놀라운 공포가 숨겨져 있다. 역사 서술자는 숙명적으로 부유와 침전의 사회학을 신봉할 수밖에 없으며 그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잊힌다. 역사도 오늘날의 아이돌 세계처럼 스포트라이트의 비정함을 사용한다. 전형적인 성공과 좌절의 드라마가 역사에도 펼쳐져 있다. 무대가 있고 무대의 뒤편 혹은 쓸쓸한 골목길이 설치된다. 가난, 경쟁, 선입견, 행운, 소외와 고뇌, 인내, 비난과 오해, 한 사람이 스타가 되기 위해 겪는 모든 체험이 역사에 들어 있다.

역사는 사실과 진실의 아래 그 통속적 세계관을 오랫동안 숨겨 왔다. 인간과 현상을 소비충족대상으로 바꿔치기했으며 팔리지 않는 시판대는 과감히 거둬버린다. 역사는 통속적이다. 그러나 역사의 통속성은 세태와 삶의 낱낱을, 미와 추와 유머, 살아 있는 얼굴의 생동감을 절대 담지 않는다. 우리 삶의 보편적 풍경이 아닌 합리화의 현장이다. 대상을 은폐하고 그 은폐했다는 사실조차 은폐함으로써 획득된 통속적 결단이 역사에는 들어 있다. 역사가의 안목에도 스타성을 선별하는 재능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의 가장 큰 전략은 작은 얼굴들을 모아 큰 얼굴을 빚는 것이다. 반죽하는 것은 얼굴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개체를 잃고 덩어리가 된다. 역사의 얼굴이란 수많은 지하실과 퇴적층을 외면하는 데에 그 얼굴성이 있다. 표정도 피도 흐르지 않는 이 대변자의 얼굴을 보라. 역사가 화살표로서만 세워 놓은 이 길가의 이정표 너머로 군중이 울고 있다. 포효하듯 사건을 내달리는 한 줄기 음성에 압도되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울음을 운다. 수많은 사람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너머로 이름 없는 공동체를 이룬다.

시는 그 이름 없는 공동체를 오랫동안 호출해왔다. 역사의 지층 너머에서 부를 수도 없으며 닿을 수도 없는 존재자에게 피를 불어 넣고 그들의 결박을 풀기 위해 싸웠다. 이름을 빼앗기 위해 이름 짓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수많은 이름에 짓눌린 한 인간깃발의 정체성을 호소해왔다. 오늘도 거인집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 개체의 쓸쓸한 자취를 탐사한다. 박제되지 않은 침전의 시공간을 발굴하고 있다.

 

2. 불안과 타자의 세계

 

리얼리즘은 만물과 세상의 시초에서부터 나타난다. 문자가 존재와 행위를 괄호 속에 넣고 세상을 총체로 제시할 때, 시적 언어는 그 괄호를 해제하고 모든 부유자들 옆에 이름 없는 공동체를 돌려놓는다. 역사가 사실주의로 사실성을 억압할 때 문학의 독트린(doctrine)은 독창적이다. 즉 역사의 오류를 문학은 보충하고 삶의 갖가지 포즈와 스펙트럼을 불러온다. 그렇기에 문학은 초월의 다른 극단 즉 형이하학적 생태의 구체성을 확보한다.

김지녀는 밤과 병의 이미지를 중첩해 존재자의 불구성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질서와 제도, 미의 세계에 천착한 역사적 시각을 벗겨내고 그 밑에 살아 있는 혼돈의 시공간을 형상화한다. 밤은 불안의 한 층위를 열어 보이고 화자의 불구적 조건이 존재론적 불가능을 심화시킨다. 불구적 세계의 무질서가 시적 이미지로 채워진다. 다시 말해 역사적 질서가 시적 질서로 재구성되고 사실주의적 거짓말의 역설성은 허구적 진실의 변증법으로 승화되고 있다. 한편 김영찬의 시어가 일상으로부터 엄습한 고독과 불안을 희화화하며 낙천적 대응법을 펼쳐 보인다. 그 시 세계는 역사적 실증의 세계와 동떨어진 디오니소스적 공간이다. 신화가 시적 상상력에 의해 진실성과 사실성을 재전유하고 있다. 이로써 김영찬의 시 세계는 가려지고 은밀한 중첩의 시공간이 살아난다. 마치 유머가 생명과 실제성의 근원이라는 듯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는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보편성을 이끌어 낸다.

이때 김희업의 시적 이미지는 불안한 주체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한층 더 직접적 어휘를 사용한다. 잘못 내던져진 존재자가 느끼는 실존적 고뇌가 거기에는 드러나 있다. 상징과 은유는 그의 시 세계에서 존재자를 덧칠하는 데에 쓰여 지지 않고, 언어 자체의 시적 유희에 바쳐진다. 존재는 시적 시공간에 그저 헐벗은 상태로 내던져지고 그 내던져짐에 의해 제시될 뿐이다. 그렇기에 따듯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희망보다 깊은 애수가 더 앞선다.

이 시적 지층의 사이를 뚫고 김온리가 고독과 불안을 관계성 자체에서 탐색하고 있다. 그의 시어는 타자를 차마 오롯이 불러볼 수 없고, 부름은 웅얼거림으로 흩어지는 와중에, 그 웅얼거림이 모여 공전하는 언어의 집이다. 항상 관계는 상처와 불안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치유의 희망과 행복의 징후를 몰고 온다. 그러나 행복의 징후는 항상 안개처럼 다시 흩어지고 시지프스의 등정과도 같은 허무를 야기한다. 시인은 행복의 징후가 구체성, 즉 안개를 거두고 나타날 실제적 육체성이 구현될 도상에 아직 머무르는 중이다.

 

 

알약들이 녹는다는 것 (부분)

김지녀

 

이 밤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길게 하품을 하는 나의 입속은 한겨울 비닐하우스처럼 후덥지근해

쫄쫄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물에선 약냄새가 진동하는데

낡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밤이여, 오늘은

수용소 문학을 이해할 것 같은 날이기에

소각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위로할 겨를이 없네

 

- 『작가세계』, 2011년 여름호

 

불구의 밤과 병든 화자의 이야기가 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기에 타자들의 신념이 깃든 종교마저 부정한다. 창밖을 바라보면 자꾸만 흐릿한 화자의 얼굴이 비친다. 그것은 불구의 밤과 화자의 병든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칠흑의 밤 속에 어둔 화자의 모습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불구의 밤에 깁스를 하고, 화자는 자기 자신의 치유를 위해 매일 색색의 알약을 털어 넣지만 그뿐 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된다. 그럴수록 어둠은 깊어가고 그만큼 비밀도 풍성해진다.

시적 화자는 이웃들과는 다른 개체로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는 “색색의 크고 작은 알약들을 입에 또 털어 넣는다.” 믿음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그렇기에 더욱더 아프다. 이웃들의 기도는 화자에게 있어 소용없는 행위이다. 그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수많은 “알약을” 입속에 자꾸자꾸 “털어 넣는다.” 그러나 그뿐 또다시 반복되는 일상은 화자의 병을 키워가도록 방치하고 있다.

수용소 문학의 ‘연기’들은 병폐로 가득하고 위악적이다. “연기가 흘러가는 쪽으로 비밀이 더 많아졌다.” 부조리함을 탓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강압 속에 잦아들고 있다. 취사선택의 오류들을 안은 비밀의 문건들이 사라지는 침묵의 밤이다. 지금도 쓰레기로 파지로 끊임없이 찢어지고 소멸하고 있다. 그것들은 결국 알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묻히고 마는가.

 

 

갈대밭의 판신 (부분)

김영찬

 

나는 무모하게 나를 발효시키는 중

갈대밭의 판신들은 갈대 꺾어 피리를 만들고

갈수기에 잎사귀 버석거리는 채송화 꽃씨를 받아

귓가에 떨어뜨리네

나 태어나기 이전의 애인들아,

내 곁에 바짝 붙어 눕거나 엎어져야 하고 말고

홑이불 따위가 뭔 필요

잉크 잘 먹는 볼펜이나 가져오라고

하릴없는 편지를 쓰네

- 『현대시』, 2012년 7월

 

김영찬의 시 작법은 의도적으로 시의 해체를 추구하면서 무의미의 시학을 연출한다. <갈대밭의 판신>에서도 역시 그 의미를 초월하며 생성의 미(美)를 구현하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시를 쓴다기보다 흥얼흥얼 주억거릴 때” 자연스레 언어들 간의 리듬이 형성되고 그들끼리 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낸다. 김영찬 시인은 현대의 음유시인을 꿈꾸며 그만의 예리한 시적 감각으로 무수한 언어 속에서 언어들을 마음껏 노닐게 한다.

시인은 굳이 의미에 집착하지 않으며 애써 소통의 글쓰기에 묶이지도 않는다. 유럽 어느 산골에서 이름 없는 목동이 편하게 부를만한 노래를 그저 “주억거릴” 뿐이다. 그것이 희한하게도 읽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어느 문예사조에 얽매이지도 않기에 그의 시는 특정한 시대와 연관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가장 초현실적인 현대시로 분류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김 시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길을 걷고 있지만, 발표작마다 이국적인 분위기로 나름의 서사를 체득하여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의 시에는 흘러간 시대의 추억과 낭만이 묻어있다. 그의 작품에는 이국의 옛 정서가 스며들어 생경함과 동시에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여 시적 변용의 묘미를 선사한다.

 

 

출생의 비밀 (부분)

김희업

 

화분은 어미의 자궁인 셈

그 품에서 물을 먹고 자란다

바라보면 어느 하나 미워할 수 없는 자식들

일부 팔리지 않는 꽃은 주인 몰래 깜빡 시든다든지

저들끼리 웃은 동안 시들어 가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운데 친자관계를 맺는

흐뭇한 풍경을 보면

입양은 상대방 가슴에 옮겨 심는 일

 

- 『현대시』, 2011년 6월

 

김희업의 “출생의 비밀”은 얼핏 ‘밝음과 따듯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진한 ‘외로움’이 나타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비련의 주인공처럼 ‘슬픈 시인’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화원의 풍경’을 소재로 “현명해서 헤어질 때 울지 않는 꽃”을 가꾸어 냈지만, 그 “꽃들”은 “저마다 고군분투하며 꽃을 피우”면서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이내 “시들어 가”는 ‘슬픔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도 “출생의 비밀”은 곳곳에 상징적 어휘와 정확한 이미지의 배치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시적 형상화’를 도모하고 있다. 이제는 극복의 힘을 갖춘 “꽃들”의 반란이 예고되는 시기이다. “그들도(우리도) 한 송이 꽃과 같이” 모습은 연약해도 내면은 그 누구보다 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박쥐 (부분)

김온리

 

동굴의 천장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지된 풍경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움이란 스틸 컷 같은 시간 속에서 홀로 미끄러지는 일

 

눈을 문지르면 반쯤 저문 얼굴이 다가오는 소리

날개를 접고 다시 종유석의 자세가 된다

 

- 『나비야, 부르면』 시집, 2020년 6월, 부분

 

김온리의 시어들은 ‘관계’의 심층에서 조명처럼 부유하고 있다. 타자와의 접촉이 불러오는 이중성, 고독과 기쁨의 필연적인 공전(公轉)을 적나라하게 밝혀 준다. 상처받은 존재의 자아가 스스로 유폐되는 동시에 타자들의 관계망을 희구한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실존이 한 권의 시집 전체를 채운다. 시적 긴장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에서 시인도 보호색을 입듯이 아이러니해진다. 말하자면 괴물과 싸우기 위한 괴물화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싸움의 장에는 정성 들인 건축물과 같이, 입구와 출구가 준비되어 있다. 즉 “존재란 부재의 방식으로 증명되는 것”(<새장의 아침>)으로부터 “최초의 손”(<나비야, 부르면>)으로의 긴 여정인 것이다. 전자가 남겨진 이의 쓸쓸함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상처받지 않은 듯이 화해를 시도하는 용기와 열정이다.

최초의 액체형 이미지 “귓바퀴에 고인 울음”(눈물)이, “거꾸로 매달린 꿈”의 형식을 획득하며 “종유석의 자세”로 고체화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동굴” 혹은 “동굴의 천장”과 “박쥐”라는 형상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일련의 심상 이동에는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의 청각적 요소가 지속해서 시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동굴과 귀의 상징이 오버랩하며, 화자의 오감을 정복하고 있는 “당신”, 그가 “울음”과 “물방울 소리”의 모든 근원이다. 여기서 당신으로 지칭되는 그는 은유일 수도 환유일 수도 있는 시적 언어 뒤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명백한 타자이며, ‘관계’의 형식을 가리킨다.

 

 

3. 이상향의 구체성과 자연

 

한편 시인들은 불안과 타인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타자의 형상화를 인격체로부터 자연으로 옮겨가 불안과 상처를 달래고 있다. 이와 같은 치유의 시도는 그동안 관념과 추상에 의존한 이상향의 이미지에 구체성과 현실성을 불어넣는다. 특히 정진규의 시 세계는 사투리를 활용해 자연과 낙원의 이미지를 익숙하게 봉합한다. 낙원은 일상의 자연을 통해 좀 더 가깝고 친근한 세계로 성큼 다가와 있다. 한세정의 시적 리얼리티는 현실의 의미를 역동과 진취성에서 찾는 데에 있다. 흰얼굴꼬리원숭이는 현실의 무료한 일상을 부수는 힘의 응집체로써 다가오며 희망을 예고한다.

유종인은 길가에서 만나는 아주 사소한 존재를 통해 이상적 세계를 상징한다. 그의 이상향은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가 깃든 우리 시의 전통적 미의식을 구현한다. 유 시인의 자연은 도시가 결여한 타자에 대한 따듯함과 사랑의 이미지를 일깨운다. 김신영 역시 자연을 통해 사소한 존재에게로 시적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아와 주체를 자연적 대상에 이입하여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고 낮은 미시적 세계로 이끈다는 점이다.

 

 

밥을 멕이다 (부분)

정진규

 

어둠이 밤새 아침에게 밥을 멕이고 이슬들이 새벽 잔디밭에 밥을 멕이고 있다 연일 저 양귀비 꽃밭엔 누가 꽃밥을 저토록 간 맞추어 멕이고 있는 겔까 우리 집 괘종 붕알 시계에게 밥을 주는, 멕이는 일이 매일 아침 어릴 적 나의 일과였던 생가生家에 와서 다시 매일 아침 우리 집 식구들 조반을 챙기는 그러한 일로 하루를 열게 되었다 강아지에게도 밥을 멕이고 마당의 수련들 물 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뒤꼍 상추, 고추들 눈에 뜨이게 자라오르는 고요의 틈서리에도 봄철 내내 밥을 멕였다 물밥을 말아주었다

 

- 시집 『사물들의 큰언니』, 2011년 7월

 

“멕이다”는 ‘먹이다’의 안성 사투리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온갖 사물에 어떤 양분을 “멕이고” 향기로운 세상을 찾아가는 심정은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가장 설레는 순간인 바로 율려의 세계다. 그곳은 시공을 초월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열고자 사물의 톤을 고르게 입히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윽하고 향기로운 곳, 자연의 향취가 풍기는, 인위적 냄새를 제거하고 역동적 생명력을 활성화하는 깊은 생물의 세계인 것이다.

고요한 동양적 세계관, 신비한 우주적 세계관을 깊이 들여다보면 어느새 한 몸으로 일체화하는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모든 우주적 세계가 하나로 섬세하게 짝을 이뤄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 왜 매번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너와 나를 단절하고 세상의 중심과 바깥으로 구분하는 심리는 율려의 근원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기형적이고 파괴적이어서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행위이다.

율려의 질서 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사물의 군상이 일명 스스로 터득된 것이지만, 사람의 왜곡된 마음이 자칫 한계를 가져와 생체리듬을 해체한다면 그것은 자칫 비약일까.

여하튼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숨 쉬는 여러 생물과 동행하여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여러모로 생성의 시, 율려의 시에 보탬이 될 것이다.

 

 

흰얼굴꼬리원숭이 (부분)

한세정

 

어디든 첨벙첨벙 뛰어들 수 있겠구나

붉은 잇몸을 다 드러내고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구나

 

늘어진 나무줄기를 향해

흰얼굴꼬리원숭이의 팔이

우아하게 뻗어나간다

당신을 움켜쥘 수 있는

긴 팔이 내게도 있었더라면

 

- 『문학동네』, 2012년 여름

 

 

시인은 ‘흰 얼굴 꼬리원숭이’를 초식동물로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초식 생활을 하는 동물은 육식동물에 비해 부드럽고 순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우리의 식생활도 마찬가지로 채식을 즐기는 사람은 온화하고 차분한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일까. 거칠고 삭막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인스턴트식품과 동물성식품에 길들어 점점 더 유물론적 사고에 갇혀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만 살피는 이기적 삶을 추구한다. 이토록 조급하고 황폐한 시대를 반추해보면서 비록 초식 생활을 하는 원숭이와 동일한 팔 길이를 소유할 순 없지만 “옥수수 알처럼 가지런히 박힌 이빨”로 당신과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시 속의 ‘옥수수’는 결국 식물성을 갈망하는 존재로의 욕망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원숭이의 긴 팔과 노란 옥수수 알은 표면적으로 볼 때 상관관계가 없지만, 시적 화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열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형편없이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속물적인 존재로 변하고 급기야 서글픈 잉여인간이 되어간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온종일 조급하게 시간을 다투며 스피디한 시대를 무작정 달려가는 중이다. 현 상태의 오류를 낯선 타자에게 책임 전가를 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짐을 지워야 한다. 자신과의 만남, 자기와의 사투에서 잘못된 현실을 극복해내야 하는데 절대 쉽지 않다. 언젠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으로 희망을 품어보지만 “붉은 잇몸”의 남루한 욕망만 끝없이 솟아날 뿐이다. 그토록 지루하던 “적막한 우기”는 우리의 일상에 쏟아지는 불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드디어 지긋지긋한 장마철이 지나갔으니, 비로소 희망찬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라 믿어본다.

 

 

 

육교에서 (부분)

유종인

 

그러나 거기 물 한 주전자도 기울이지 못한

맘의 분을 못 삭이고,

어디 마주할 옛 얼굴도 없이

숨겨놓은 옛 웃음을 비추는 거울이

허공을 건너왔으면 하고,

곰보도 곰배팔이도 뇟보도 계명워리도

스무날에 한 번은 허공 위에 헹가래를 쳐주는 이 길이었으면 하고,

 

- 『시산맥』, 2011년 가을

 

「육교에서」는 ‘소외된 이들의 교량’을 의미하며, 생명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육교는 시멘트와 모래, 물 등의 혼합물이 조화를 이루어 건설해 낸 구조물이다. 시적 화자는 “옆구리가 터진 모래 한 자루”에 “백일홍 씨앗과 밤톨을 심은”듯 하지만 정작 “물 한 주전자도 기울이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슨 일인지 “맘의 분을 못 삭이고” 지냈기 때문이다. 백일홍과 밤톨은 물이 없으면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생명의 싹도 틔울 수 없다. 오늘의 삶은 하도 건조하여 “옛 얼굴”에 담긴 “옛 웃음”이 슬며시 그리워지는 때이다. 지상과 허공을 가로지르는 “육교에서” 육신의 불구와 마음의 불구자들이 한데 어울려 “스무날에 한 번은 허공 위에 헹가래를 쳐주는 이 길”에서 모든 죄를 씻고 축복 받으며 거듭나고자 한다.

불편한 다리로 절뚝거리며 “허공에서 걸어내려”오는 그대의 모습이 보인다. “새벽엔 옴두꺼비와 유혈목이가 안개 이불 아래” 슬픈 얼굴을 하고 “눈물 반 신음 반”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육교(陸橋)”가 아닌 “육교(肉交)”의 이미지로 에로틱한 광경을 연출한다. 시인은 육교(肉交)를 통해서 우리 삶에 내재한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끝내 “웃음만을 동냥한 거지가 하늘로 오르는, 둥근 침대의 길”이기를 염원하면서.

거대한 구조물인 ‘육교’도 여타의 혼합물들과 단계적 배합을 거쳐 혼연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건축물로 빛날 수 있다. 육교를 세우는데 필요한 요소들은 얼핏 균열의 조짐이라도 생기면 그 틈바구니에서 저마다 아우성친다. 견고함 속에도 틈은 존재한다. 눈치 챌 수 없이 미세한 틈새로 인해 어마어마한 세계가 순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명이 움트는 곳엔 반드시 물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수분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 안에 숨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내성을 키우고 있다. 시 창작도 마찬가지로 내재한 열정을 제대로 쏟아낼 수 있을 때 시적 발아는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움트는 ‘생명의 발아’ 현상이 유종인 시인의 「육교에서」 목격되고 있듯이…

 

 

하루를 탁발하는 고행자 (부분)

 

김신영

 

푸른 이파리 아래 나에게 밑줄 치던 사랑이나니

악수 할 때마다 따뜻한 정이 오가던 사람입니다

그대는 오늘 거칠고

부드러운 손마디를 가졌습니다

철마다 피는 꽃은 빛이 있나니 그늘보다 아름답나니

버덩한 세상에 복받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 『시인수첩』, 2021년 봄호

 

김신영의 시 세계는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이 빛을 발한다. 즉 도덕률에 의한 맹목적 연민이 아닌 치열하게 갈고 닦은 진실성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애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윤리라는 관념과 나, 즉 에고와 통념에 기댄 허상을 만든다. 시인은 자아가 관념을 벗어나 현실에 산재한 실체로 눈을 돌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연은 관념이 끼어들 틈 없는 실체의 집적이다. 특히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세상에서 조용히 제 할 일을 수행하며 하루를 사는 존재들로 가득한 곳이다. 시인은 그런 자연적 존재에 감정을 이입해 관계의 순수성과 생의 겸허함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서 탁발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낮추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가르침의 한 방편이다. 탁발은 속되게 말해 구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생을 이루는 하루하루를 탁발하는 심정으로 사는 시적 대상을 통해 시인은 세상에 만연한 관계성을 재구성한다.

 

 

4. 실존과 세태의 재구성

 

도시와 기계문명의 거대 담론이 놓칠 수 있는 개인의 실존을 세태와 결합한 시인들도 보인다. 이를 통해 실존적 미의식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과 생활의 세목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인간 혹은 타자에 대한 연민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실존은 더욱 풍성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함민복이 발화하는 눈물이란 시어는 존재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시적 대상이다. 담배 연기는 바깥으로부터 그 밑바닥을 통과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존재자의 사인(sign)이다. 그리하여 존재가 처한 형이상학의 입체성과 세속의 미시성이 만난다. 그 자리에는 진짜 삶의 이미지가 솟아난다. 심보선은 고독한 자의 정경이 처참할 정도로 황폐한 이미지를 통해 생생히 나타난다. 그런데 그 황폐성은 물리적이지 않고 내적 고뇌에 의한 것이다. 언뜻 보아 서정적으로 채색된 쓸쓸한 이미지는 그 내재율로 황폐함을 드러낸다. 의식의 황폐함과 허무감이 고독을 섬뜩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고독의 풍경은 한편 짙은 그리움의 전경화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나호열이 보여주는 화자의 그리움은 존재의 주체와 아이덴티티(identity) 자체로 기능하며 시적 정서를 돋운다. 쓸쓸한 주체와 그 쓸쓸함에 듬뿍 취한 일상이 생과 죽음의 의미론으로 발전하며, 화자에게 실존적 자각을 부추긴다. 한편 고독과 쓸쓸함을 자본주의적 일상의 반복에서 찾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재훈의 경우가 그렇다. 그 치열한 일상성은 자본주의적 세계 바깥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며 개별자의 고뇌를 시 전면에 내세운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전문)

함민복

 

살며 풀어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2013년 4월

 

함민복의 시는 익히 알려졌듯이 소박한 서민의 일상을 소재로 서정성을 띤 작품이 대부분이다.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인이 경험에 근거하여 글을 쓸 때 외적인 생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특히, 함민복의 탄력적인 시어들은 표면에 머무르길 싫어한다. 그의 생생하고 꿈틀대는 언어는 가난한 우리 삶의 자리가 절대 누추하지 않다고 일러준다. 이처럼 문학은 우리의 삶을 순수하고 위대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만약 문학이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비록 최선의 경우에도 소모적인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지난 시절 “담배가 지상 최고의 선물”인 때가 있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사방이 금연구역이다. 어느 회사에서는 금연자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흡연자에겐 벌점을 준다. 시 속의 노인은 사방이 “금연구역”인 공간에서 이방인처럼 담배를 피운다. 그도 한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새로운 자유를 꿈꾸었으나 그뿐 지금은 누가 봐도 초라한 행색이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거두고 오히려 연민을 느끼는 감성이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세계와의 관계성, 일상적 언어는 시인 자신을 이루는 또 다른 연민의 노래이다. 생각해보라,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애써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노인의 표정이 얼마나 심오한지… 이렇게 시인은 회색빛 지친 일상에서도 감동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창작의 하루하루는 고통과 환희를 동반한다.

 

 

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 (부분)

심보선

 

졸린 눈으로 책장을 넘기다

가장 뜨거운 페이지에 손을 데었다

거기에 무엇이 쓰여 있을까?

어쩌면 불덩어리를 인용한 글

저자는 누구일까?

어쩌면 프로메테우스의 죽은 후손

아직도 책 귀퉁이를 뾰족하게 달궈놓은

그의 꿈이 손가락을 아프게 찌른다

 

― ?시인수첩?, 2011 여름호

 

시적 화자는 진부한 삶과 부조리한 삶 속에 갇혀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암흑 같은 오늘을 살고 있다. 화자가 염원하는 평화로운 삶은 언제쯤 올 것인가? 드디어 고대하던 혁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서사는 “한 아름다운 여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고 있다. 시인은 교조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대중을 혁명의 세계로 이끌고자 한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지루했던지” 끊임없이 뛰는 “심장박동수를 일일이 세어”보고 “크게 하품을 했다.” 심지어는 그동안 살아온 “하루하루를 일일이 세어”보기까지 했다. 그의 삶은 왜 이토록 지루함의 연속일까. 그것은 화자가 꿈꾸는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감동적인 글귀가 없어서인지 “졸린 눈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화자는 문득 “가장 뜨거운 페이지에 손을 데었다.” 시적 화자는 정확히 드러내진 않지만 “불덩이를 인용한 글”이나 “프로메테우스의 죽은 후손”이라는 문구로 글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을 살펴보면 혁명의 속성이 읽힌다. 이를테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 “혁명은 왜 고독한가.”와 같은 문구들이다. 시인의 구호처럼 혁명을 완수하려면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투쟁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혁명의 길은 험난하고 고독하다. 대중은 헌신적 혁명가에게 매료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포즈에 그칠 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을 대신할 영웅의 탄생을 염원하고 있다.

 

 

어슬렁, 거기 (전문)

나호열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엔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팔딱거리고

 

그 옆 딸깍 목젖을 젖히며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는 수평선에 가 닿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건너가고 싶으면 건너고 멈추고 싶으면 그만인

 

언제나 토요일 오후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십 분만 걸어 나가도 한 세상의 끝이 보이는 곳

 

어슬렁, 거기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

 

-『우리시』, 2013년 2월

 

 

이 시에서 누군가의 그리움 가득한 마음이 전해진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거진”을 방문한 시적 화자의 눈에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과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가 구름처럼 뭉실뭉실하게 와 박힌다. 이처럼 시인은 손수 지어낸 공간 속 배경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늘 애타는 심정으로 “방파제를 넘어 온 파도가” 빨간 우체통에서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고, 언제부턴가 “그 옆 딸각 목젖을 젖히며”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공중전화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그리운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댄다.

이 같은 정경은 불특정 대상이든 특정 대상이든 누구에게나 애절한 “그리움”의 형상으로 비친다. 멀리 떠나 있으면 누구나 외롭고 그립다. 분명한 것은 막연한 대상이 아니다. 멀리 갈수록 뚜렷한 대상이 되어 파도처럼 바람처럼 밀려서 가슴에 파고든다. 그 순간 시적 화자는 생과 사, 남과 여, 고향과 타향, 마음과 마음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없는 미로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다지 멀지도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 미로의 과정은 순식간에 끝나고 만다. 언제까지나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동네 풍경과 사물들, 어느새 평생 켜질 것 같지 않던 “있으나마나한 신호등”에 기적처럼 푸른 빛이 넘실댄다. 시인은 이처럼 미묘한 생의 형태를 “어슬렁, 거기”의 화법으로 천천히 고백하고 있다. 그렇듯 모든 것을 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느리게” 접근하고 그만큼 ‘미학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사랑과 이별, 벗과 적, 예의 등 모든 삶의 원리가 그렇다.

 

 

숭고한 셀러던트 (부분)

이재훈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 ?현대시?, 2011년 6월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숭고한 셀러던트(saladent)”는 결국 샐러리맨이 사회 현실에서 겪는 괴리감을 ‘인생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셀러던트”… 참 슬픈 시어로 다가온다. 이 치열한 삶 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샐러리맨으로 성공해야 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행복은 곧 성공이라는 불가사의한 등식이 성립하고 있는 요즈음 모두 ‘인생 공부다, 인생 공부다.’라고 외치지만, 그로 인하여 너와 나는 더 이상 가까울 수 없고 늘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삼인칭”으로 매번 차갑게 만나야 한다. 결국 시인 이재훈은 ‘달빛이 비치는 숲의 세계’를 그리며 ‘유토피아’로 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도피는 아니며, 한바탕 열정을 다해 나름대로 현실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근원적 낭만주의 기질을 토대로, 현실 너머 ‘진실의 세계’를 염원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 세계’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현실 ‘저 너머’의 미학을 조용히 꿈꾸고 있을 것이다.

 

 

5. 재생의 소리들

 

현대시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이름 없는 자들에게 빛을 비춘다. 이름의 부재 혹은 기록되지 않은 아픔에 의해 그들은 공동체를 이룬다. 우리가 통과한 수많은 시대의 그늘마다 비역사적 생명성을 발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누구도 그들을 불러보지 않는다. 문학과 시는 바로 역사의 총체성을 뚫고 그 개별자들의 울림을 발굴하는 데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편 역사의 보편성은 휴머니즘적 영역 다시 말해 문학으로부터 오롯이 구현됨을 시사한다. 개념적 언어와 심미적 언어, 독트린의 언어와 심리적 언어, 랑그와 파롤의 균형이 우리 시대에 절실한 것이다. 문학은 그 시대정신의 요구 속에서 맡은 바 자리를 성실히 지키며 한 시대를 대변하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미래의 시가 다시금 우리 세기를 밝혀주기를, 우리를 역사의 지층에서 깨워주기를 바란다.

 

앞서 한 가지 공포를 말한 바 있다. ‘나’라는 존재는 한 시대와 함께 철저한 무(無)의 시공간을 예비한다. 이 세기의 울타리가 세월에 빛을 바랄 때 우리 시대는 그저 기록 속에 갇히게 될 터이다. 그때 역사가 미처 깨우지 못한 존재들, 이슬처럼 스러져 아주 깊이 잠든 생명, 이름 없는 자를 문학은 잊지 않을 것이다. 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전형에 숨결을 불어 넣고 피를 흐르게 하여 궁극에는 차츰차츰 비역사적 시공간을 수면 위로 띄운다. 역사적 시공간은 더욱 드넓어질 것이며, 작위적 총체성은 진정한 통일성으로 탈바꿈한다.

수많은 이름을 은폐시킨 음험한 인류사가 전적인 질서의 세계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우리는 궁금하다. 과연 미래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그와 더불어 인류의 역사와 문학은 어디에 당도해 있을까? 시의 지형도와 당위성은 어떤 패러다임을 맞게 될까? 정녕 3세기만 살아봤어도 그 궁금증을 조금은 덜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정녕 잘 알게 되었다. ‘삶’과 ‘관계’, 그리고 고독에 대해 우리 현대시는 온 몸짓으로 진동하며 시대를 통과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문학의 본령이라고 할 때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고독의 정경은 영원한 테마라는 사실이다. 소외로부터 타자를 이끄는 것, 콘텍스트의 파시즘으로부터 텍스트에 잊힌 얼굴들을 각인하는 것, 한 세기의 미소를 뚫고 조용한 울음까지 귀 기울이는 것이, 시대를 향한 문학의 요청이다. 시는 문학을 통해 부서진 세계에 재생의 소리를 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