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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란 무엇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5. 7. 13:35

오늘의 시란 무엇인가

 

이충이(시인·{시와산문} 발행인)

 

 

1. '녹색시''오늘의 시'

 

 

포이에티케Poietike'만들어내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23백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모방mimesis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술' 즉 시를 쓰는 기술을 포이에티케라고 말했다.‘그때 거기이후 오랜 역사를 거쳐서 '지금 여기'에 도달한 오늘의 시1930년대 이전까지 감성의 서정시와 1930년대 이후 지성의 현대시로 변화했고, 20세기 말의 사유와 그 이후 치유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언어의 구조물로 다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오랜 변화를 통하여 오늘의 시인은 궁극적으로 사유와 치유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poietes'이 되었다.

 

우리는 시라고 고집하는 서정시와 관념시, 대중시와 신서정시 등으로부터 한 걸음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헤어나지 못하는 시들은 지적인 상상력을 통해 '그때 거기''지금 여기'를 넘나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사유와 치유의 이야기가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와 비시非詩를 구분하고, 우리 시의 내일과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 시는 오래된 시이면서 다시 쓸 때마다 새로운 시, '오늘의 시'여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오늘의 시, 즉 녹색시는 생명주의生命主義이며, 생명에 대한 경외이다. 이것은 새로운 오늘의 시를 만들어내려는 패러다임에서 비롯된다. 입을 모아서 합창하듯이 말하는 환경시나 생태시가 아니다. 쉽게 말해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녹색시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제어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그것을 통합적으로 제시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 즉 시가 할 수 있는 시대의 몫이다. 우리는 그 시를 "생명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보고, 그 길을 "녹색시"에서 찾고자 한다. 시가 사유의 과정이며 시대를 치유한다고 했을 때, 바로 여기에 녹색시가 오늘에 있음을 제안한다.

 

치유의 시작詩作은 비극과 희극, 서사시 등이 진정한 시였던 시대의 기법을 의미하며, 모방mimesis과 창조Poietike를 기본으로 하는 재현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주의를 표방하는 시를 만들어낸다. 이미 존재하는 낯선 곳에 길들여지지 않는 '오늘의 시'가 있다. 그 이야기야말로 오늘의 시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녹색시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오래된 시로부터 오늘의 시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시쓰는 방법을 바꾸어가며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목수는 통달한 규칙에 따라 집을 짓는다. 그러나 오늘의 시인은 집 짓는 규칙 자체를 바꾸며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낸다. 시에 있어서 기술은 그리스어로 실천을 뜻한다. 실천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달아 익힌 것을 의미한다. 이 것은 '생명의 무엇'이 아니라 '생명을 어떻게'라고 하는 삶의 본질과 상통한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위주 문명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의 파괴를 꿈꾸기도 한다.

 

시는 화려함보다는 최소한의 수사기법을 중요시한다. 그래야 생명에 대한 풍부한 사상과 간결한 언어와 압축된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오늘의 시가 없다는 푸념은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며,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고달픈 일이다. 시는 끝까지 고달플 것이다. 그래서 시는 무모한 모험과도 같다.

 

2. '오늘의 시''메타 텍스트mata text'

 

시는 생물이다. 그래서 시는 빠른 속도로 새로워진다. 오늘의 시를 쓰는 시인들은 바짝 고삐를 당기며 내달려야 한다. 그러나 한국시단을 지배하는 낡은 서정시와 관념시는 앞서가는 오늘의 새로운 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아무리 잡고 늘어져도 시는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다. 시를 찾아가는 정신에 동기를 부여하고 열정을 넣으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변화할 수 있다. 오늘의 시인은 변화의 핵심을 찌르며 시대와 세상을 내다보아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내는 오늘의 시'는 단순한 상징과 은유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시는 변화하고 갈등하고 충돌하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전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텍스트를 진정으로 이해했냐이고, 그 이해가 깊어져야 비로소 자신이 쓰는 시의 메타 텍스트을 만들 수 있다. 마티스는 빛을, 피카소는 어둠을 텍스트로 선택했다. '무엇'이라는 주제는 똑 같지만 '어떻게'는 아주 다르다. 고흐나 나진스키는 텍스트를 너무 깊이, 너무 멀리 보아서 광기에 빠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클레멘트코스 즉 철학과 문학과 예술과 역사와 수사학 등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통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무엇이' 아닌 '어떻게'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시는 감성보다는 사유와 치유의 세계에 가깝다. 그러므로 시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뭉크의 <절규>는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지른다. 얼굴 주변에 불안하고 음산하게 구불거리는 선들을 볼 수 있다. 뒤샹의 <변기>는 작품의 배경이 된 서양의 역사와 철학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사유를 보여준 단적인 예에 속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예술은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도하는 것이며, 사람의 이야기나 삶 그 자체여야함을 알 수 있다.

 

흔히 시는 성경과 불경과 베다 등 모든 종교의 비전이라고 말한다. 시가 세상의 비전이 될 수 있으려면 밝은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오늘의 시는 트라우마를 가진 파괴된 자아를 연결해주는 통로여야 한다. 아날로그적 삶과 함께 한 수많은 시는 항상 새롭게 만들어낸 자기평가의 분석에서 비롯되었다. 텍스트에서 메타 텍스트로, 즉 패러디를 통해 눈과 귀를 열고 끊임없이 관찰과 학습, 반복의 연속으로 이루진 생명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오늘의 시'가 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질문의 크기는 곧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오늘에 있어서도 시의 코뮌, 즉 녹색시의 코뮌을 짜야한다. 녹색시의 코뮌은 기성의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를 구성하는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널리 알리는 네트워크를 형성해야한다. 그래서 오늘의 시는 "녹색시오늘의 시"'어떻게' 이 시대에 새로운 시를 제시할 수 있을지 모색해야 한다. 생명에 대하여, 여자와 남자에 대하여, 삶의 나눔에 대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고리를 만들고 그것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과 대화하려면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어야 한다. 생명의 소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하늘의 소리가 아닌 땅의 소리이다. 현대인은 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현대인은 고통으로 소통하는 법을 잊어간다. 연민을 배우는 방법은 자신이 가슴을 통해서 뿐이다. 아픔을 통해서만 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통이나 아픔의 텍스트가 없고, 사유나 치유의 메타 텍스트도 없다.

 

절박한 현실은 언제나 한 줌의 안온함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휘발된다. 생명의 절대적이란 또한 순간적일지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 위에 새살이 돋아나 다른 대상을 찾아가면서 아픔은 치유된다. 오래 간직되는 것은 지상의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이 덧없기에 아름답고 사라지기에 하나뿐인 생명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잠깐동안 놓쳐버린 매듭처럼 익숙한 어떤 생명의 언어를 발견했을 때, 녹색시는 비로소 시작된다. 매듭이 없는 인간은 고달프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와 내일이 아닌 오늘의 시, 녹색시를 쓴다.

 

 

 

3. '메타 텍스트''발견'이다

 

 

시인은 사물과 대상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오늘의 시는 생명의 상징이나 비유이다. 미의 본질을 끝까지 규명하다 보면 결국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생명은 모두가 다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인류의 미학과 인류의 생명은 언제나 일치했다. 그래서 생명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며 성(또는 )스러운 것이다. 세상은 생물로 이루어졌다. 무생물이라고 말하는 사물에도 생명이 존재한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많은 음악과 문학, 미술의 소재였다. 모든 예술과 학문은 오늘의 시에 닿아있다. 시인은 나를 버리고 타자가 되어 보아야 한다. 단순히 생명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자나깨나 옥수수 옆에 붙어살다가 옥수수의 삶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다. 옥수수를 연구한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은 옥수수 안에서 그 체제의 일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서 염색체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시인, 간결하고 효율적이며,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바버라 매클린톡과 같은 시인이 필요하다. 위기가 없는 시인은 행복하지 않다. 위기 중에 중심을 잃지 않고 고통과 슬픔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그래서 오늘의 시는 시인의 안에서조차 하나가 아니다. 시속에는 이미 수많은 타자가 섞여있다.

 

오늘의 시는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의 정체성이나 동일성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시는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작태도는 적당히 빈둥거리거나 감상에 젖은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시는 풀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묻고 또 묻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다. 시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채워주는 창고이기 때문에 뜨거워지면 몸 속의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시는 리얼리티의 환상에 젖었을 때 비로소 대상이나 사물의 내면에서 아름다운 생명이 드러난다. 이것은 숨은 미학의 재발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시대의 광기를 치유해줄 수 있는 시인은 우리의 고단한 삶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라도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오늘의 시, 즉 녹색시를 만들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