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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시인, 산문시집으로 ‘김종삼 시문학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 20. 16:20

“섬광 같은 이미지의 산문詩… 40년이 번갯불처럼 지나가”

등단 40주년 맞은 남진우 시인, 산문시집으로 ‘김종삼 시문학상’
“소설과는 다른 시적 허구 추구”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21.01.20 03:00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은 남진우(61) 시인이 최근 제4회 김종삼 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인이 산문시 68편으로 꾸민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시인은 “번갯불처럼 40년이 지나갔다”면서 수상작에 대해 “일관되게 시의 산문성과 이야기를 밀고 나가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쓴 시를 모았다”고 밝혔다.

“시는 태생적으로 이야기를 지녔고, 소설이 보여줄 수 없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허구”라고 풀이한 남진우 시인. /남강호 기자

시인은 응축된 언어로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산문시로만 남다른 시집을 꾸몄다. 수록작 중 ‘책도둑’은 ‘책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는 꿈을 꾸면서 다른 사람의 서재에 들어가 그의 서가에 꽂힌 책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훔쳐오기 시작했다’면서 시작한다. ‘매일매일 꿈을 꿀 때마다 그는 친척이나 친구의 집을 하나씩 방문해서 읽고 싶은 책을 들고 나왔다. 꿈속에선 이상하게도 책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그는 너무도 쉽게 책을 집어들고 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 책도둑은 훔친 책을 꿈속의 집에 차곡차곡 쌓아두지만, 책을 읽을 틈이 없다. 잠에서 깨어난 뒤엔 훔칠 책을 탐색하느라 독서를 못한다. ‘책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는 현실 속에서 책을 읽기보다 꿈속에서 책과 더불어 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잠이 들기 전 그가 낮에 보았던 갖고 싶은 책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 책이 있을 만한 장소에 이르는 길을 가늠하며 잠자리에 든다’는 것. 끝없이 책이 포개지는 꿈의 미궁(迷宮)을 지어낸 시인은 “나이가 들수록 꿈이 현실의 반대편이라기 보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세계 자체가 또 하나의 꿈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꿈을 현실의 ‘평행 세계’로 여기는 시인은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눈에 뭐가 낀 것처럼 주위의 사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시 ‘적막’) 라면서 현실이 꿈으로 둔갑하는 상황을 기괴하게 그려냈다. 현실과 초현실을 겹쳐놓으면서 삶에 밀착된 죽음을 포착한 시 ‘악어’는 ‘그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시작한 뒤 ‘당신이 자는 침대 밑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고’라면서 ‘유일한 문제는 조용히 살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느냐 아니면 악을 쓰며 뼈만 남을 때까지 뜯기면서 사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고 했다. 시인은 “카프카의 짧은 소설 같은 이야기로 우화(寓話) 시집을 쓰고 싶었다”면서 “시의 섬광 같은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소설적 허구와는 다른 시적 허구를 추구했다”고 밝혔다.

시집의 마지막 시 ‘노인과 바다’는 ‘이른 새벽마다 살이 다 뜯겨나간 거대한 물고기 뼈가 부서진 배를 끌고 내 방 문턱에 와 좌초한다’면서 ‘부서진 배 조각이 널려 있는 길 위에서 서서 나는 저멀리 상어떼가 몰려오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난파해도, 시인은 새날을 맞으면서 세계가 보내는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자화상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