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역사]
망국 대한제국에는 훈장이 발에 걸리도록 많았다
[246] 대한제국 망국기 훈장 남발 전말기
1918년 덕수궁 석조전
입력 2021.01.27 03:00
망국과 훈장 이야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황제가 된 고종은 제국 선포 2년 6개월 뒤인 1900년 4월 19일 ‘훈장조례’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 제도를 실시했다. 대한제국 훈장은 크게 일곱 등급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훈장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이었다.
두 황제 광무제 고종과 융희제 순종은 모두 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황제들을 제외한 인물로 첫 번째 금척대훈장을 받은 사람은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헨리 친왕이다.(1904년 3월 20일) 헨리 친왕 서훈 나흘 뒤 또 다른 외국 인사가 금척대훈장을 받았는데, 신분은 일본 후작(侯爵)에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1904년 이 훈장을 받은 왕실 종친 이승응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인물은 민영환(1905년 12월 1일)과 조병세(1905년 12월 2일)다. 두 사람 모두 생전이 아니라 자결한 다음날에 받았다. ‘금척’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본다. 이름하여 ‘망국 대한제국 훈장 남발 전말기’다.
1918년 1월 13일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촬영한 영친왕 이은 귀국기념사진. 조선총독부와 조선 왕실, 그리고 조선귀족들 얼굴이 보인다. 앞줄 가운데에 옛 황제 고종(모자 든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왼쪽으로 영친왕 이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콧수염)가 앉아 있다. 고종 오른쪽으로 순종, 의친왕 이강과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앉아 있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으로부터 최고등급 훈장인 금척대훈장과 이화대훈장을 받은 사람들이다./서울대박물관
위 사진 주요 인물과 서훈 이력.
246. 대한제국 망국기 훈장 남발 전말기
금척 신화와 조선왕국
‘임금이 등극하기 전 꿈에 신인(神人)이 금으로 만든 자(금척·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公)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집 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여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三韓)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1392년 7월 17일 ‘태조실록’)
전주 이(李)씨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연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설화다. 木(나무 목)과 子(아들 자)가 든 사람이 금으로 만든 자, 곧 변하지 않는 금척을 법도로 삼아 새 지도자가 되리라는 예언이다. 500년이 지난 1902년 26대 왕 고종 50세 축하잔치에서 무동들의 축하공연 제목도 ‘몽금척(夢金尺)’, ‘꿈에 금척을 보았다네'였다.(1902년 양력 5월 30일 ‘고종실록’) ’몽금척' 또한 500년 전인 1393년 7월 26일 정도전이 지어 태조에게 바친 노래다. ‘금척(金尺)’은 그렇게 조선 내내 권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태조 고황제가 기뻐하리라 - 훈장의 시작
1899년 양력 6월 17일 광무제 고종은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명성을 넓혀 사람마다 흠모하면서 정성과 충성을 발휘하도록 복식과 표장에 관한 제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1900년 4월 17일 황제는 칙령 13호를 통해 훈장 조례를 반포했는데, 훈장은 모두 금척(金尺), 서성(瑞星), 이화(李花) 대훈장과 태극장, 팔괘장, 자응장 6종이었다. 특히 금척대훈장은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는 황실만 패용 가능한 훈장으로 명시했다.
고종은 이성계의 ‘몽금척’을 상기시키며 “태조 고황제 영혼도 기뻐 복을 내릴 것이나, 나는 주야로 전전긍긍 허물을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각자 힘쓰라”고 명했다.(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4년 뒤 황제는 대궐 여관(女官)들을 위해 여자 전용 훈장 서봉장(瑞鳳章)을 신설했다.(1904년 3월 30일 ‘고종실록’)
500년 왕조의 상징을 ‘훈장’이라는 물건에 구현했으니,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대접받지 못하던 여자들도 수훈 권리를 하사했으니 참으로 근대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주야 전전긍긍’의 의지와 ‘태조 고황제의 복’은 발현하지 못했다.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 가슴에는 금척부장(가슴에 붙이는 금척 훈장, 가운데 태극문양)과 서성부장(별 셋 문양)이 붙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망국으로 가는 길목 그리고 훈장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세 가지 결정적인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기이하게도 그 세 고비마다 대한제국 황실은 광범위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훈장을 남발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를 자기네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그리고 3월 20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 자격으로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는 고종에게 천황 메이지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상납했다.(영국 외무부 자료, 1904년 3월 31일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이날 황제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비롯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황제가 조령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에 서훈하고 금척대수장을 주라.” 다음 날 황제는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와 시바후 사이치로에게도 훈장을 하사했다. 명분은 ‘친목과 친애의 뜻’이었다.(1904년 3월 20~24일 ‘고종실록’) 이듬해 1월 18일 황제는 대한제국에 주둔한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1907년 8월 27일 갓 황제에 등극한 융희제 순종은 하세가와에게 금척대수장을 줬다.
국권 망실과 대훈장파티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조약 협상 ‘이틀 전’(‘뒤’가 아니다) 고종은 일본 육군중장 이노우에 요시토모부터 소위급인 해군 소군의(少軍醫) 오카다 고가네마루까지 모두 65명에게 훈장을 하사했다.(1905년 11월 15일 ‘고종실록’) 국권이 넘어가고 조약을 성토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황제는 그 숱한 상소를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다”라며 물리쳤다.(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11월 30일 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했다. 고종은 12월 1일 민영환에게 대훈위 금척대훈장을 추서했다. 그날 원로 대신 조병세가 자결했다. 다음 날 고종은 조병세에게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했다. 왕실 종친 완평군 이승응(1904년 9월 16일)에 이어 대한제국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금척대훈장이었다.
민영환.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민영환은 자결 다음날 황제 고종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추서 받았다.
조병세. 1905년 12월 1일 을사조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조병세는 자결 다음날 황제 고종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추서 받았다.
이듬해 4월 9일 아들 의친왕 이강이 대훈위 금척대수장, 또 이듬해 5월 28일 또 다른 아들 영친왕 이은이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1월 29일 신임 황제인 융희제 순종은 일본 추밀원 의장 겸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대훈위 금척대훈장을 수여했다. 훗날 총독부 정무총감이 된 체신대신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대훈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독일인 1명을 포함해 59명이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가슴에는 금척부장(가슴에 붙이는 금척 훈장, 가운데 태극문양)과 서성부장(별 셋 문양), 그리고 기타 훈장들이 붙어 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의결했다. 나흘 뒤 황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따위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모두 10명이었다.(1910년 8월 26일 ‘순종실록’)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나라가 사라졌다.
환희작약하는 귀족들
1910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총독부에서 파티가 열렸다. ‘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조선귀족에 선정된 고관대작 작위 수여식이었다. ‘전 친위부장관 이병무씨가 구한국 육군 부장 정장을 입고 총독부에 올랐다. 금빛 광채를 사방에 떨치며 의기양양하게 1등으로 현관에 마차를 옆으로 대고 정1품 보국 민영소와 전 탁지부대신 고영희와 이재완, 윤택영, 전 내부대신 박제순과 이재극과 전 법부대신 이하영씨 (중략) 전 총리대신 이완용과 전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전 내각 서기관장 한창수씨 등 (중략) 전 탁지부대신 임선준과 전 학부대신 이재곤과 전 시종원경 윤덕영과 전 궁내부대신 민병석씨 등이 당도했다. 얼굴에 번뜩이는 희열(喜悅)은 일장 가관이었다.’(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2면) 훈장에 작위까지 겹경사가 터졌으니, 저들은 참새가 소리 지르며 날뛰듯 환희작약(歡喜雀躍)했다.
'조선귀족' 작위를 받고 얼굴에 희열이 가관이었다라고 보도한 191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
사진에 흘러넘치는 훈장들
그리고 8년이 지난 1918년 고종이 아들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1918년 1월 13일 덕수궁 석조전 앞이었다. 공식 명칭은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었고, 아들 순종 명칭은 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이었다.
사진 앞줄 가운데 고종이 앉아 있다. 왼쪽으로 영친왕 이은과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오른쪽으로는 순종과 의친왕 이강, 부총독 격인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앉아 있다. 영친왕 이은과 야마가타는 이화대수장, 나머지는 금척대훈장 서훈자들이다. 국가는 청산(淸算)당하고 사라졌는데 뙤약볕 아래 금척(金尺)들이 반짝인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지면이 좁아서 못 다한 이야기-여자>
여자에게도 훈장을 주라는 근대적인 하명에, 여성 전용 서봉장이 신설됐다. 1905년 10월 5일 그 첫 서훈자가 나왔다. 두 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엄씨고 한 사람은 김씨였다. 엄씨는 영친왕을 낳은 황귀비 엄씨였다. 연원군부인이라는 군호를 가진 김씨는 의친왕 이강 아내였다. 두 사람은 지아비와 시아버지로부터 서봉대수훈장을 받았다.(1905년 10월 5일 ‘고종실록’) 1907년 1월 24일 또 다른 여성 서훈자가 탄생했다. 이번에도 황제 고종의 피붙이인 아들 순종의 계비 윤씨였다.
1909년 8월 27일 황후가 된 윤씨는 직접 전현직 고관 아내들에게 서봉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1월 12일 다시 한번 여성을 위한 집단 서훈식이 열렸다. 이번에도 태자 스승인 이완용 아내 조씨를 비롯한 고관 아내들이었다. 이번에는 일부 상궁들도 받았다.(1905년 11월 12일 ‘순종실록’)
1910년 8월 21일 공식적으로 마지막 서봉장 서훈식이 열렸다. 이 또한 황후가 주재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 아내들과 궁내 여관(女官) 45명이 훈장을 받았다. 농상공부대신 조중웅 아내도 포함됐는데,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정경부인 최씨였고 한 사람은 정경부인 미쓰오카(光岡)씨였다.(1910년 8월 21일 ‘순종실록’) 바로 그 다음 날 대한제국은 합병조약 체결을 승인했다. 조약 체결 나흘 뒤인 26일, 며칠 전 아내들이 훈장을 받았던 남편들도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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