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언어의 승부사 헤밍웨이 “신성하고 영광, 희생이란 말이 부끄럽다”…구호의 타락은 권력 오만
[중앙선데이] 입력 2020.12.12 00:48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헤밍웨이의 ‘진실의 순간’을 찾아서
1 쿠바 코히마르(아바나 근처) 어촌에 있는 헤밍웨이의 미소 띤 얼굴상. 2 그의 꽃미남 시절 여권 사진(24세, 토론토 스타 특파원). 3 그의 대표적 이미지(58세, 덥수룩한 턱수염에 터틀넥 스웨터).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의 작품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거기 있다. 그곳은 소용돌이치는 세상이다. 삶과 죽음이 충돌하는 곳. 그의 현장은 격렬하다. 그는 전쟁 속으로 들어갔다. 투우는 그에게 ‘유사(類似) 전쟁’이다. 아프리카 맹수 사냥은 모험이다. 거기서 ‘진실의 순간’이 생산된다. 그 지점에서 인간의 승패가 갈린다. 헤밍웨이 말·글은 그 순간을 낚는 투망이다.
무모한 리더십일수록 기만적 외침
‘모 쥐스트’로 진실의 급소 찌른다
인간 투혼 매력은 ‘역경 속 품위’다
오바마, 헤밍웨이 말로 매케인 추모
586 실세 정치구호의 오염 심각해
미국 시카고의 헤밍웨이 생가 박물관.
2020년 언어 타락의 시대다. 진실은 축출된다. 권력 오만은 말의 부패다. 헤밍웨이 글귀는 오염된 풍광을 정화한다. 나는 그의 언어 현장을 추적했다. 코로나19 한참 전부터다. 미국 시카고(일리노이주) 근교 오크 파크. 그가 태어난 곳에서 시작했다. 부모는 의사, 성악가다. 옆에 박물관도 있다. 전시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모 쥐스트(mot juste)를 믿은 사람이다. 그는 나(헤밍웨이)에게 형용사를 믿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다.”(『움직이는 축제』)
오직 지명만이 위엄을 갖춰
모 쥐스트.- 하나의 정확한 말이다. 상황에 들어맞는 유일한 표현. 그것으로 진실의 급소를 찌른다. 헤밍웨이는 언어 승부사다. “진실되게 쓰려면 고통과 현장을 경험하라.” 그는 신문사(캔자스시티 스타) 수습기자로 그 세계에 진입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무대인 줄리안 알프스 산기슭(슬로베니아)에 남은 오스트리아군 요새. 앞은 박보균 대기자.
전시물 주제는 ‘헤밍웨이와 전쟁’. 그는 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19세 자원입대). 이탈리아군 앰뷸런스 운전병이다. 그곳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터다. 그는 다리에 박격포탄을 맞았다(1918년 7월). 전선 체험은 그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담겼다. ‘카포레토’ 전투가 그 중심이다. 그곳은 지금 슬로베니아의 코바리드. 나는 수도 류블랴나에서 그곳(서쪽 115㎞)에 갔다. 줄리안 알프스 계곡 사이는 이손조(소차)강. 코발트색 풍경은 수려하다. 이탈리아 군대는 카포레토에서 참패했다. 그 형상은 집단 투항과 무질서한 패주다.
전쟁 구호는 애국과 희생, 명예다. 무능, 무모한 리더십일수록 명분은 화려하다. 불량·위선의 권력일수록 어휘는 기만적이다. 결과는 파탄이다.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그것을 간파한다. 코바리드 전쟁박물관은 헤밍웨이 문장을 모았다. “신성하고 영광, 희생이란 말과 헛된 표현이 언제나 부끄러웠다. 오직 지명(地名)만이 위엄을 갖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의 국정 어휘는 교묘한 왜곡이다. 586 실세들의 구호 정치는 변조됐다. 정의는 헛된 말이다. 평등은 공평하지 않다. 검찰개혁은 권력 안보다. 다수의 국민은 말의 변질에 분노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코바리드 서쪽은 이탈리아 국경. 거길 넘어 베네치아 쪽으로 140㎞. 작은 마을 포살타 디 피아베다. 피아베 강둑에 표지판이 있다. “헤밍웨이가 제방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것은 소설 『강 건너 숲속으로』에서의 고통스러운 회상이다. 주인공(캔트웰)은 퇴역을 앞둔 미군 대령. 그는 다친 곳을 찾아간다. 그는 기억을 자기방식으로 정리한다. “이제 기념비를 완성한다.” 그 다짐은 허무하다. 죽은 자에게만 향한다. 그는 땅속에 1만 리라짜리 지폐를 묻는다.
공산주의자가 사제일 때는 미워한다
스페인 팜플로나 투우축제에서 헤밍웨이(1927년).
헤밍웨이는 투우에 매료됐다. 스페인 팜플로나(산 페르민 축제)는 매개 공간. 투우는 그에게 죽음에의 탐닉 의식(儀式)이다. 그는 거기서 ‘진실의 순간(El momento de la verdad)’을 포착했다(『오후의 죽음』). 그 의식은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 주입됐다. 에필로그가 논픽션 『위험한 여름』. 주인공(안토니오)은 마타도르(matador). 최고 등급 투우사다. “진짜 용감한 사람처럼 안토니오는 편한 마음(light-hearted)에다 진지한 일에는 농담·조롱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헤밍웨이 식 용기 있는 자의 행태다.
스페인 내전(1936~1939)이 터졌다. 그는 그곳에 북미신문연합 특파원으로 갔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은 선거에서 신승했다. 좌파 공화국의 세상 뒤집기는 급격하다. 군부(파시스트 국민전선)의 반응은 반란이다. 그 전까지 그의 정치 견해는 보조적 구성이다. 단편 『도박사, 수녀와 라디오』의 끝은 미묘한 여운이다. “혁명은 아편이 아니라 카타르시스(정화)다; 폭정에 의해서만 오래 끌 수 있는 황홀경이다.” 그 구절은 혁명의 효용을 규정한다. 모순적 작동 원리는 절묘하다. 말들은 화자(話者)의 중얼거림으로 그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스페인 내전은 이념의 결전장이다. 헤밍웨이 글은 공세적으로 바뀐다. 파시즘의 말은 진실의 배반이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 파시스트 무솔리니를 ‘최고 허풍쟁이(bluff)’로 묘사했다(1923년 인터뷰). 그 신념과 분노가 짙게 투사된다.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다. 주인공(로버트 조던)은 미국인 대학 강사. 그는 공화파 게릴라에 가세했다. 조던의 본능은 도덕적 사나이다움(macho). 그의 최후는 홀로 적군과 맞서기다. 그것은 사랑과 의무의 표출이다.
2018년 9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 소설을 소환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 장례식에서다. 2007년 대선 때 둘은 적수였다. “오늘은 다가올 날들의 오직 하루다. 다가올 날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는 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구절은 역경을 이긴 자의 지혜다. 매케인은 헤밍웨이 글귀를 애용했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5년간 하노이 감옥소에 있었다. 두 사람은 트럼프의 분열과 증오의 언어를 혐오했다. 올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패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복원 열망의 확장이다. 애리조나주는 매케인과 공화당의 텃밭. 이번에 조 바이든(민주당) 지지로 바뀌었다.
신에 의탁하지 않는 자의 독백
소설 현장은 과다라마 산맥 기슭이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 쪽으로 70㎞. 나는 파우 알바레스(‘엘 문도’통신원 경력)와 함께 그곳에 갔다. 엘 에스코리알궁전 뒤편이다. 그곳에 그 시절 벙커, 참호가 남아 있다. 내전의 유산은 오래간다. 화해와 용서는 쉽지 않다. 스페인 내전은 6·25전쟁과 비슷하다. 알바레스는 “헤밍웨이는 좌파에 우호적이었지만 거부감도 특이했다”고 했다. 그는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인용했다. “(내전 중 헤밍웨이 발언)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병사일 때는 좋아하지만 그들이 사제(司祭)일 때는 미워한다.” 헤밍웨이의 이념적 시선은 거기서 멈춘다. 그것이 조지 오웰과의 차이다. 내전은 프랑코 군부의 승리다. 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은 패배를 부채질했다. 같은 좌파(무정부주의·통일노동자당) 사람들도 숙청했다. 극우 파시즘과 극좌 공산주의의 교활한 권력 욕망은 같다.
그의 소설 캐릭터는 비장미(悲壯美)를 드러낸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은 쿠바 어촌 코히마르(수도 아바나 외곽).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출항 85일째. 낚싯줄에 거대한 청새치가 물린다. 고기는 그의 작은 배(skiff)보다 크다. 그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신앙심이 없어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면··· 주기도문 열 번과 성모 마리아 열 번을 외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욀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신에 의탁하지 않는 자의 투혼이다. 그는 혼자 결투를 마무리한다. 소설은 반전한다. 이번엔 상어와의 사투다. 상어 떼가 잡힌 청새치를 공격한다. 노인의 독백이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그 순간은 ‘역경 속 품위(Grace under Pressure)’의 절정이다. 승부사 리더십은 용기의 언어로 등장한다.
핀카 비히아(Finca Vigia).- 아바나 부근 그의 집(1939~59년)이다. 거기서 그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1954년)을 받았다. 1959년 쿠바는 뒤집혔다. 피델 카스트로 사회주의 정권 출범이다. 헤밍웨이의 그곳 삶은 정지됐다. 그는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선 밸리)으로 옮겼다. 우울증과 편집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문학은 이미 신화다. 그 운명은 자기 성공의 희생이다. 1961년 7월 그는 엽총을 들었다. 총신을 입에 물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침착하고 강하게’ 불굴의 삶 매력
나는 보이시(아이다호주 주도) 공항에 내렸다. 친구 더릭슨 우드가 나왔다. 우드는 피어스 카운티(시애틀 근처) 도서관에서 『노인과 바다』식 글쓰기 강사를 했다. 나는 물었다. “그 책 어떤 구절이 최고냐.” 대답은 간략했다. “침착하고 강하게(Be calm and strong).-그게 불굴의 삶의 매력이다.” 그의 픽업트럭으로 세 시간쯤 달렸다. 케첨 공동묘지에 먼저 들렀다. 헤밍웨이 묘소 석판은 이름, 생몰 연도뿐이다. 그를 기리는 어떤 표현도 없다. 우리는 헤밍웨이의 글·말을 골랐다. 다시 4㎞쯤 갔다.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의 헤밍웨이 메모리얼.
작은 개울가에 헤밍웨이 메모리얼이 있다. 기둥 위에 작은 얼굴상. 받침대에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가을을 무엇보다 사랑했다. 미루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었다. 나뭇잎들이 송어 개울에 떠 있다. 그리고 언덕 위. 높고 푸르고 바람 없는 하늘. 이제 그는 영원히 그들과 하나가 된다(Now he will be a part of them forever).” 그 시는 헤밍웨이 작품(1939년). 죽은 친구를 위한 추도사다. 배치된 단어들은 잔잔하다. 혼탁한 말·구호가 밀려난다. 22년 뒤 그 시는 그의 비명(碑銘)으로 재탄생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언어 속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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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살이 없다, 피와 뼈·근육뿐”…헤밍웨이의 생략과 압축 ‘빙산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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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파격이다. 그는 기자 시절 이렇게 환호했다(‘토론토 스타’신문). “(나의 기사엔) 군살도, 형용사·부사도 없다. 피와 뼈, 근육뿐이다.”(폴 존슨 『지식인들』) 그의 20대 파리(1921~28년) 시절은 글쓰기 단련기다. 전위파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곳에 있었다. 스타인의 실험적 기법은 그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스타인 살롱은 ‘길 잃은 세대’의 집결지였다. 논픽션 『움직이는 축제』는 그 시절을 담았다.
헤밍웨이는 선언한다. “산문은 건축이다. 실내장식이 아니다.” 그의 하드보일드 문체는 대담해진다.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안다면 자신이 아는 것을 생략할 수 있다··· 빙산의 위엄은 그중 8분의 1만이 물 위에 있기 때문이다.”(『오후의 죽음』) 빙산의 미학은 절제와 압축, 생략이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쉽다. 단문은 단지 자르는 게 아니다. 상황을 꿰뚫어야 짧게 쓴다. 생략은 역설이다. 독자의 상상력은 강화된다.
그의 전기작가 카를로스 베이커의 평가다. “최소치(the least)에서 최대치(the most)를 얻는 문체.” 헤밍웨이에게 수식어 임무는 독특하다. “그는 슬프게 웃었다(He smiled sadly).”(『무기여 잘 있거라』) ‘웃픈’은 대립적 조화다. 그 효과로 동사는 활달해진다.
파리 이후는 키웨스트(미국 플로리다주)다. 그곳에서 10년 삶은 열정적 작품 생산이다(전체 70%).
」
시카고·케첨(미국),코바리드(슬로베니아),아바나(쿠바)마드리드·팜플로나(스페인)=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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