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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론자 소동파와 그를 짝사랑한 한국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23. 13:32

[박종인의 땅의 歷史]

“상투 튼 원숭이들이 중국인을 희롱하는구나”

[230] 혐한론자 소동파와 그를 짝사랑한 한국인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입력 2020.09.23 03:00

혐오와 짝사랑 사이

소동파는 북송 때 문장가며 정치가였다. 시는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황소(黃蘇)’라 불렸고 문장은 구양수(歐陽脩)와 더불어 ‘구소(歐蘇)’라 불렸다. 사(詞, 음률에 얹어 낭송하는 긴 시)는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소신(蘇辛)’이라 했다. 서예는 북송사대가 중 하나요 그림 또한 유명했다. 송나라는 물론 한자문화권 주변 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고려 지식인들은 소동파를 지극히 좋아했다. 현대 대한민국도 대개 그러하다. 지난주 성균관대박물관이 공개한 소동파 친필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는 원나라 인종이 고려 충숙왕에게 준 선물이었고, 마지막 소장자 유희강은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팔아서 이 작품을 구입했다.(2020년 9월 17일 자 조선일보 A20면 참조)

중국 장쑤성에 있는 소주(蘇州)는 기울어진 탑이 있다. 이름은 호구탑(虎丘塔)이다. 오나라 왕 합려가 이 아래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소동파가 "소주에 가서 이 탑을 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했던 탑이다. 문학가이며 동시에 행정관료였던 소동파는 쇠락한 송나라에 찾아온 고려 사신들을 '원숭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정작 고려는 물론 조선 지식인들은 그를 흠모하고 그 문체를 흉내내며 소동파를 열렬히 따랐다. /박종인

‘고려 문사들은 소동파를 숭상하였으니, 과거에 급제한 명단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소동파 서른세 명이 나왔다[三十三東坡出·삼십삼동파출]”고 하였다.’(서거정 ‘東人詩話·동인시화’ 상권44) 호방하고 어휘가 풍부하여 고려인 기질에 맞았고, 노장사상과 불교적 철학이 무신란, 거란과 몽골 침입으로 어수선한 고려인들의 현실도피적 심리에 맞았다.(허권수, ‘소동파 시문의 한국적 수용’, 중국어문학 14집, 영남중국어문학회, 1988)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부철(富轍)이다. 1123년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렇게 기록했다. “부식(富軾)과 아우 부철(富轍)이 시를 잘 쓴다는 명성이 있다. 그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소동파를)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동파(東坡)는 호이고, 이름은 식(軾)이다. 소식에게도 글 잘 쓰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소철(蘇轍)이다. 아버지 김근이 두 아들에게 소식, 소철 형제 이름을 갖다 붙일 정도로 고려 지식인들은 소동파를 사모했다.

그런데 정치가 소동파는 조금 다르다.

그 소동파가 송나라에 파견된 고려 사신을 보고 이렇게 글을 쓴다. ‘머리에 상투를 튼 짐승들이 배 안에서 사납게 쳐다보는구나(椎髻獸面 睢盱船中·추계수면 휴우선중).’(소동파, ‘黃寔言高麗通北虜(황식언고려통북로: 고려가 북쪽 오랑캐와 통하고 있다고 황식이 말해주다)’, 소식문집 72권)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원숭이가 사람을 희롱한다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胡孫弄人語 良有理·호손롱인어 양유리).’

고려인들의 동파 사랑

1074년 송나라로 파견된 고려 사신들이 소동파가 지은 시집을 사서 돌아왔다. 구입한 곳은 항주(杭州)다. 항주는 이들이 항주에 들르기 3년 전 소동파가 부지사 격인 통판(通判)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162년이 지난 1236년 고려 전주 목사 최군지가 ‘동파문집’을 출간했다. 1236년은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 항쟁하던 대몽항쟁 기간이었다. 문인이자 잘나가던 정치가 이규보(李奎報)가 그 발문을 썼다. ‘(동파의 글을) 손에서 떼지 아니하고 남은 향기를 되씹어본다.’ 태평성대도 아닌 엄혹한 시기에 안전한 강화도가 아닌 뭍에서 동파의 여향(餘香)을 되씹겠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김부식(1075~1151)은 소동파(1036~1101)와 서른아홉 살 차이가 났다. 대략 그 아버지가 소동파와 같은 연배였으니,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동파는 고려 지식사회에 수퍼스타가 돼 있었다(김부식 동생 부철은 훗날 부의로 개명했다).

이규보는 동파를 일러 ‘문장이 마치 금은보화가 가득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를 훔쳐가더라도 해가 되겠는가’라고 했다.(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답전리지논문서’) 시 잘 쓰는 이규보를 일러 최자는 ‘호매한 기세와 넉넉한 체모가 소동파와 같다’고 했다.(최자, ‘보한집’) 목은 이색은 아예 ‘동파노인은 뜻이 커서 만장(萬丈)이나 되는 불꽃처럼 세차네’라고 절절하게 그를 찬양했으니(이색, ‘목은시고’ 권8), 소동파에 바친 고려 지식인들의 애정은 종교 수준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애정은 아주 순수한 짝사랑이었다.

원나라 문인 조맹부가 그린 소동파./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

고려를 경멸한 소동파

위에 인용한 ‘원숭이’ 글에서 소동파는 사천성 통판 진돈의 입을 빌려 고려인을 이리 묘사했다. ‘원숭이가 사람 옷을 입고 말하는 대로 몸을 구부리고 돌리거나 고개를 들거나 숙인다. 자세히 관찰하니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사람들은 “원숭이를 희롱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원숭이에게 희롱당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송나라 속국이라 고개를 숙이는 척하지만 사실은 중국인을 능멸한다는 것이다. 그 원숭이들이 사신으로 왔더니 ‘사천성 관리와 기녀, 악단이 죄다 교외로 나가 맞이했고’ ‘상투 튼 짐승들이 배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소동파는 중앙과 지방에서 관료로 근무하면서 수시로 반(反)고려 상소문을 올리곤 했다.

항주 지사로 근무하던 1089년 소동파는 “한동안 고려 사신이 오지 않아 지방 관리들과 백성은 기뻐했지만 지난 17년 동안 그들이 자주 들어와 접대 비용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며 “우리에겐 티끌만큼 이익도 없는데 오랑캐는 엄청난 이익을 얻어간다”고 주장했다.(소동파, ‘論髙麗進奉狀·논고려진봉장’) 이듬해 또 올린 상소문에서 소동파는 “고려 사신 접대 비용 10여만 관이면 굶주린 백성 수만 명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소동파, ‘乞禁商旅過外國狀·걸금상려과외국장’)

 

 

예부상서로 근무하던 1093년 올린 ‘논고려매서이해차자(論高麗買書利害箚子·고려가 서적을 구입하는 건에 대한 득과 실 차자)’가 대표적이다. 고려 사신이 중국 서적을 구입하는 데 협조하라는 국자감 공문을 보고 올린 건의서다. 이 상소에는 고려가 송나라에 해악이라는 다섯 가지 이유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첫째, 이들을 접대하는 비용은 모두 국고며 백성의 피땀이다. 둘째, 가는 곳마다 영빈관을 만들고 인마를 동원한다. 셋째, 고려가 받아간 하사품은 거란과 나눠 먹는 게 틀림없으니 이는 도둑에게 무기를 빌려주는 꼴이다. 넷째, 고려 사신 목적은 조공이 아니라 간첩질이다. 다섯째, 고려에 잘해주면 언젠가 거란놈들이 트집을 잡을 것이다.(소동파, ‘論高麗買書利害箚子·논고려매서이해차자’) 두 차례 상소에 중앙정부는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동파는 “지금 고려인들이 떠나서 처리할 도리가 없지만, 고려인 접대는 철저하게 잘못된 판단”이라고 또 한 번 상소를 올렸다.

걸핏하면 찾아오는 고려인 접대에 정부 재정은 물론 지방 재정과 백성들의 노역이 극심하지만 정작 얻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고위직 공무원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지만, 소동파에게는 ‘고려인을 원숭이 취급하는’ 중화적인 자만심이 숨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동파에게 고려는 원숭이가 사는 나라였다.

 

지난주 성균관대박물관이 공개한 소동파의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 원나라 인종이 고려 충숙왕에게 선물한 이 글이 흘러흘러 대한민국까지 전해졌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필요없지만, 오라니까 가준다’ -고려의 대송 실리외교

1084년 소동파는 1084년 고려 사신 숙소 고려정을 지나며 이리 읊었다. ‘(백성을)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나 저들한테서 얻은 건 뭔지 모르겠구나[盡賜昆邪作奴婢 不知償得此人無·진사곤사작노비 부지상득차인무].’

소동파가 집요할 정도로 고려를 혐오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 북송은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북쪽에서 흥기한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송을 압박하던 때였다. 중화를 내세우며 대륙을 호령하던 한족은 송대에 이르러 더 이상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다. 문화는 극치에 올랐지만 나라는 문약했다. 결국 송은 거란에 고개를 숙이고 서쪽으로는 서하(西夏)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고, 행여 고려가 거란과 손을 잡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아야 했다. 중앙정부에서 책임지던 고려 사신 접대는 1074년 사신이 지나가는 각 군, 현에서 떠맡았다. ‘옛 준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괴로웠는데, 이해에 규정을 반포하고 비용은 관에서 지급하도록 했다.’(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그러자 고려는, 소동파가 지적한 대로 사치스럽게 접대받으며 귀한 책과 물건을 마음대로 얻어가며 송나라에 위세를 떨쳤다. 고려는 거란과 송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로 상업적 이득을 취한 실리적 나라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 이미 오래인 데다 상선 왕래가 끊이지 않아 진귀한 보물들이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에서 도움받을 것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려사’ 권8 1058년 문종12년 8월) 소동파는, 원숭이 나라에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는 서글픔을 고려 혐오증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나라 왕 합려가 죽을 때 보검 3000자루를 묻었다는 호구 검지(劍池). 호구탑 옆에 있다.

기이한 짝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동파는 고려 지식인들에게 스타였다. 조선 중기에 권력을 잡은 노론(老論)은 소동파를 경멸했다. 주자와 함께 자기네 최고 위인인 정이(程頤)를 그가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소동파는 높은 지위와 기세로 이단의 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세상에 농간을 부렸다.’(송시열, 송자대전 131권, ‘연거잡록’, 김근태, ‘화서학파 문인의 소동파 인식과 비판’, 한문고전연구 33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16, 재인용)

세월을 훌쩍 넘어 18세기가 되었다. 1790년 박제가가 사신으로 연경에 갔을 때, 청나라 학자 옹방강을 만났다. 옹방강이 만든 서재에는 보소재(寶蘇齋)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소동파를 보물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20년 뒤 박제가 제자인 추사 김정희가 또 옹방강을 찾아갔다. 연경 사신에게는 옹방강 방문이 유행이 됐고, 자연스럽게 소동파는 부활했다. 동파에 대한 존경은 ‘학자 자신이 청조 학예와 결연돼 있음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정민, ’19세기 동아시아의 모소(慕蘇) 열풍', 한국한문학연구 49호, 한국한문학회, 2012)

그 무렵 연경을 찾은 연암 박지원이 동파의 혐한론을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열하일기’에 그가 이리 적었다. ‘우리나라가 동파에게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동파는 고려와 사귀는 게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쓴 글들을 보니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 이는 비판이 아니라 애정이다.

소동파는 송나라를 걱정해 고려를 혐오하였다. 고려는 그 송나라를 이용해 이득을 취했다. 고려 지식인과 후대 조선 지식인은 대문호 소동파를 존경하였다. 정치가 소동파를 알았다면 어찌됐을까.

아주 오래 전 중국 장쑤성 소주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소동파가 “소주에 가서 호구탑을 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했던 호구탑을 보았다. 그때는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몰라 그저 거대한 탑으로 보였다. 며칠 전 소동파 친필 작품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꺼내 보니 달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