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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8. 7. 14:33

 

 

개미 뫼 문지듯 읽으면 들립니다, 살아 꿈틀대는 土地의 문장

조선일보 입력 2020.08.05 05:00 | 수정 2020.08.05 07:22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40] '박경리의 말' 낸 김연숙 교수

"사투리를 '토지'로 한 번 배우고, 할머니를 통해 두 번 배웠다."

김연숙(52)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의 소설 '토지' 읽기 강의 수강생이 남긴 글이다. 박경리 작가가 쓴 '토지'는 경남 하동 평사리의 최 참판댁을 중심으로 1897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대하소설이다. 김 교수의 토지 읽기 수업은 2012년 수강생 20명 남짓한 소규모로 시작해 강의 평점 최고점을 기록하며 지금은 수강생이 60여 명으로 늘었다. 9년 동안 700여 학생과 함께 '토지'를 읽어온 그는 최근 에세이 '박경리의 말'을 냈다. 지난 3일 만난 김연숙 교수는 "'토지'는 지식인의 토론부터 생활에 밀착한 일상어, 사투리까지 다양한 층위의 언어를 구사한다"면서 "낭독해보면 원고지에 쓴 글처럼 느껴지지 않고 입말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경남 사투리가 나올 땐 그 지역 출신 학생들이 원어민 강습처럼 낭독해주기도 하고요. '전화 찬스'를 써서 할머니께 여쭤보고 사투리를 익히는 학생도 많았어요."

김연숙 교수는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강의'라는 평을 들었다. 학생들이 컴퓨터만 보다가, '토지' 인물에 몰입하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더라"고 했다. 그의 뒤로 박경리 작가의 생전 영상이 보인다. /김연정 객원기자

 

한국 문학 최초로 소설 속 어휘 사전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토지'는 방대한 우리말 어휘가 담겨 있다. 600명이 넘는 인물의 대사 속에서 경남 하동·진주, 전남 구례·순천, 만주의 용정·길림까지 팔도 사투리를 맛깔나게 살려냈다. "'그말이사 소분지애씨고' 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라는 뜻인데 사투리의 리듬감이 느껴지죠. 국립국어원 지역어 종합 누리집에는 '토지' 속의 '개주무리(감기 몸살)인가배. 예사로 여겼디마는 영 갱신(몸을 가누다)을 못하것다'라는 문장이 예시로 나오기도 해요." 그가 좋아하는 토지 속 문장은 '개미 뫼 문지듯이, 일이란 그렇기 허야제잉. 세월이란 것도 개미 뫼 문지듯 가는 거 아니더라고?'. "개미가 모래흙을 하나하나 물어 나르듯, 한걸음 한걸음으로부터 내 삶이 쌓이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모래알이 높은 산을 이룬다는 뜻이죠."

서정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날씨나 풍경 묘사도 학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밤의 냉기를 훔씬 머금은 강바람이 오삭오삭 스며든다'거나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수없이 나돋은 별빛에 사방은 희뿌윰했다' 같은 문장들이다. 김 교수는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쓰면 날씨는 항상 맑음, 흐림, 비뿐이었는데 어떻게 날씨 이야기로 몇 페이지를 쓰느냐고 놀라더라"면서 "이제부터 '개추워' 같은 말을 쓰지 않겠다는 귀여운 학생도 있었다"고 했다. 외국인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이 한국적인 표현을 배우기 위해 강의를 신청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한 수강생은 '물소리는 간지럽게 들린다' '불빛을 받은 사내들 얼굴은 짙붉게 번들거렸으며 눈은 숯덩이처럼 짙게 빛났었다' 등의 문장을 한국적 아름다움이 드러난 표현으로 꼽았다.

수업에서는 한 학기 동안 '토지' 1·2부, 총 8권을 읽고 토론한다. 이공계 학생이 60~70%인데도 방대한 분량의 글을 쭉쭉 읽어 내려간다. "'전원일기'일 줄 알았는데 '사랑과 전쟁'이었다면서 사랑 이야기나 가족 간의 갈등을 재밌어해요. 저는 '토지' 읽기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통독하기보다는 건너뛰어 가며 읽거나, 관심 있는 부분부터 읽으라고 해요. 딱 1권만 넘어가면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가 생기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다음부턴 술술 읽혀요."

김 교수는 '토지'의 매력에 대해 "인간의 민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나에게 서희의 모습도 있고, 길상의 모습도 있고, 조준구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읽을 때마다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한 학생이 토지는 '쌀밥 한 그릇' 같다더라고요. 자극적이지도 싱겁지도 않은 밥인데 어떤 반찬하고 내놓아도 어울리죠. 세대에 따라,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인물이나 인상 깊은 장면도 완전히 달라져요. 저는 항상 '토지'를 20대에 한 번, 40대에 한 번, 60대에 한 번 읽으라고 권합니다."


[김연숙 교수와 학생들이 사랑한 '토지' 속 문장들]

"일이란 억지로는 안 되지라. 하루아침에 성을 쌓지는 못허니께로 개미 뫼 문지듯이, 일이란 그렇기 허야제잉. 세월이란 것도 개미 뫼 문지듯 가는 거 아니더라고?" (개미 뫼 문지듯 : 큰 힘이 없어도 꾸준히 노력하고 정성을 들이면 훌륭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지나간 일을 말하믄 머하겄소. 우리 애기씨 수모당하는 거 생각하믄 김서방 댁 억울한 거사 소분지애씨요." (소분지애씨: 그만하면 다행이다. 약과다.)

오갈솥을 손에 든 채 주갑이 벌떡 일어섰다. (오갈솥: 아가리가 오그라진 작은 솥)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별당 아씨가 죽는 장면)

평산은 띤띤하게 부른 배를 내어밀고 어슬렁어슬렁 제 집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빚어 놓은 메주덩이같이 머리끝에 갈수록 좁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양 볼이 띠룩띠룩한 비지살이다. 빳빳하고 숱이 많은 앞머리는 다붙어서 이마빡이 반 치나 될까 말까, 그 좁은 이마 복판에는 굵은 주름이 하나 가로지르고 있었다. (타락한 양반 김평산을 묘사하는 대목)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5/20200805002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