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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대중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3. 24. 15:54

 

현대시와 대중성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자본은 허무주의를 만들어 왔다. 오직 교환가치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무화시켜 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세계를 확고하게 지배해 온 것이다. 예컨대 자본이 지배력을 확보하게 된 근대에 들어서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오직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으로만 환원된다. 아무리 스스로 가치있고 흥미로운 활동이라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본으로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가치한 때로는 반사회적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하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많은 행위를 허무주의화하여 근대적 규율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본의 이러한 허무주의적 성격은 인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연에도 마찬가지로 적대적으로 작용하여 수많은 자연적 창조물들을 무화시키고 파괴시켜 온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자본이 문화를 무화시키면서 내세우는 용어가 바로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대부분을 지배해온 자본의 힘이, 자본 지배 사회에서 상대적인 변방에 해당하고 때문에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던 문화의 영역을 접수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시작한 시대를 의미한다. 결국 문화의 시대란 디지털한 과학기술이라는 위력적인 도구를 가진 자본이 종속을 조건으로 문화의 상업적 가치를 인정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두고 한 말이다. 문화의 시대란 자본이 문화의 차원에 허무주의를 강요하는 시대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자본의 움직임에 따라 상품화될 수 있는 가치있는 문화만을 남기고 다른 문화를 무화하고 파괴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화의 시대에 정말 문화와 문화인이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문화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화의 시대가 올수록 문화는 진지성을 상실한 경박한 껍데기의 문화로 변해가고,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상실해 가리라는 위기의식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화도 예술도 시도 이제는 상업화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상업화에 부응하는 용어가 바로 대중화이다. 스스로 상품임을 받아들이기 곤란한 시인들이 스스로 상업화를 내면화하는 용어가 바로 대중화이다. 흔히 이들은 소통과 감동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만든 상품이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2. 유토피아 그리고 키치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전통적인 서정시는 일인칭의 문학 장르이다. 주관적으로 열망하는 세계와 보편적 가치의 세계를 일치시켜 감동을 끌어내는 것이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보편적 가치는 사라지고 시인들은 절망이나 퇴폐, 소외의 언어를 쏟아내게 된다. 그것은 때로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초현실주의나 미래파 또 때로는 전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져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통적 일인칭의 세계는 유효하게 살아있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시들은 바로 이 전통적 일인칭의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소월의 시에 흐르던 정서적 저류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현실에서 꿈꾸는 안온하고 조화된 완전한 세상, 즉 일인칭의 유토피아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대중적 시들이 의존하고 있는 기본적인 문법이다.

 

세상이 강퍅해질수록 일인칭의 유토피아는 더욱 요구된다. 위안이 그만큼 더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가 사라지고 개인들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인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현실 관련성을 상실하고 현실에서 유리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발소 그림에 그려져 있는 물레방아에서 볼 수 있다. 물레방아로 표현되는 자연속의 삶은 자족적인 완전한 세계이고 위안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박제된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는 그것을 이발소 그림으로 재현했을 때 우리는 그 그림에서 그러한 세계의 흔적을 발견하고 편안해진다. 그러한 그림이 팔리고 이발소에 또는 거실에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발소 그림이 바로 키치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인 화가 사비나의 말을 통해 키치를 비판하고 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에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키치가 모든 진지한 예술의 가장 적대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키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진정성이 없는 동정심, 고상한 척, 남의 시선 의식하기, 정치인들의 애국심, 따라 하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이 상투화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이발소 그림으로 불려지는 키치kitsch는 값싼 대중적 예술을 말한다.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키치는 가짜 예술이다. 그것은 예술의 형식을 빌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치관 상투적인 감상을 전달함으로써 편안과 위안을 주고 사회의 주류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현대는 바로 이런 키치의 시대이기도 하다. 많은 중산층 집안의 거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상품이나 의복들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마저 이런 키치가 지배하고 있다.

 

시에서도 키치는 존재한다. 진부한 미의식, 상투적인 현실인식, 진정성이 상실된 근거 없는 감정 과잉, 사회·역사적 고민이 탈각된 자동화된 가치관 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키치적인 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한 시들은 때로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가 될 뿐이다.

흔히 키치 시는 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쉽다고 키치인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서울역 앞 흡연구역 사람들 틈에 끼어

담배를 빤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다

철쭉꽃 한창이다

한쪽에선 악기 연주가 한창이다

멀리 남미 에콰도르에서 왔다는 인디오

담배 잎에 물고 모두가 박수다

 

기다리는 순간은 잠깐이다

하나되는 순간도 잠깐이다

시간을 본다

바삐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

바삐 출구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

담배 한 대의 시간만큼

연주 한 곡의 시간만큼

멈추어 있다 떠난다

살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오래 떠난다

- 이명수, 몽유도전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기차를 타러 서울역에 나가본 사람은 모두 한번쯤 봤을 익숙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다. 그런 익숙한 장면을 통해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 떠난다는 아이러니한 구절에서 선명히 잘 드러나 있다. 떠남을 항상 순간이고 떠남은 오래 머물지 못함을 말하기에 이 구절은 형용 모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담배 한 대 같이 피고 노래 한 곡 같이 듣는 시간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리고 그러한 만남이 항상 떠도는 것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라 길고도 또 의미심장한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오랜 떠남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에콰도르의 떠돌이 예술가를 만나는 것도 바로 그런 계기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오래 지속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를 통해 지속되는 것임을 이 시는 아주 쉬운 시어들로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해 주고 있다. 익숙한 광경을 쉬운 언어로 그러나 결코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보여주는 시인의 경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대상을 대할 때 사물과 투명하고 순수한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층적인 가치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키치가 된다. 예를 들어 진품을 모방하여 진품을 소비하는 계층의 사회적 위상을 대리체험하려고 한다든가, 예술적 묘사에 사회적 가치나 종교적 교의 또는 교육적 함의를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도 모두 키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시교육 자체가 키치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 대중과의 소통에 가장 성공한 시인은 안도현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의 시 역시 키치적인 시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시들은 이러한 시들과는 약간의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의 시들은 이러한 일인칭의 유토피아를 계몽주의와 연결시키는 전략을 취해 왔다. 이것을 통해 그의 시들은 전통적 서정시가 가지는 탈현실적 또는 비현실적 세계를 벗어나고 또 한편으로 계몽주의가 가지는 불편한 불온성을 벗어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고 꾸짖는, 그의 가장 대중적인 시 <너에게 묻는다>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대중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뜨거운 존재가 되는 그러한 좋은 세상을 설파한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그런 꾸짖음에 불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독자들 역시 시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는 독자는 꾸짖음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하다. 안도현의 시들이 가지는 대중적 전략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어둠을 이야기하되 아프지 않게 이야기하고 세상은 더럽고 속악하지만 나와 우리는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일인칭의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3. 상투적 위안의 세계

 

한때 우리 문화에 혜성처럼 나타나 선풍적인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시집이 있다. 바로 서정윤의 홀로서기라는 시집이다. 이 시집이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바로 그 시집의 시들을 통해 대중들이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위안을 주는 방식으로 진술로서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무도

객관적인 생각으로

나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 서정윤, 홀로서기2부분

 

연기처럼 사라져도 안타깝지 않은

오늘의 하늘, 나는

이 하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 서정윤, 소망의 시2부분부

 

위 인용에서와 같이 시인은 구체적 표현으로 말하고 있지 않고 관념적 진술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다. 진술은 표현에 비하여 독자에게 소극성을 요구한다. 표현은 그것이 구체적 사실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시인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에 관한 것이든지 독자 앞에 그것을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렇게 객관적으로 제시되어진 것에 자신의 감수성을 일치시켜 이해함으로써 시가 대상으로 하는 사물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가능하게 된다. 이에 반해 진술의 언어는 시인의 정서와 생각을 객관적 언어로 제시하지 않고 이미 시인 자신에게 만들어진 관념을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위의 인용한 시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삶에 대한 절실하고도 구체적인 어떠한 천착도 없이 예언자적 위치에 올라서서 인생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말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진술적 언어를 통해서는 독자나 시인 자신 모두 구체적 삶과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수행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이런 성찰이나 반성이 따르지 않는 문학적 감흥은 제시되어진 관념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문제를 위로 받는 위안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 시집이 대중적 성공을 얻게 된 외적 조건으로 흔히 매스컴의 역할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매스컴과 이 시집의 이런 진술적 언어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시집의 대중적 성공이 매스컴의 우연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수동적인 받아들임을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위안을 제공하는 매스컴의 문화 형식과 이 시집의 시들이 갖는 진술적 언어 형식이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의 시들이 좋은 방송 재료로 간주될 수 있었음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이런 관념적 진술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표현으로 나타나지 못할 때 그것은 상투성을 드러내고 만다. 앞서 지적한 안도현의 시들도 이런 상투성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상투성은 감상성으로 이어진다. 익숙하고 상식적인 사물에 대한 관점이 우리의 감각과 정신에 참신한 감동을 주지 못할 때, 흔히 시는 정서를 과장하는 방식으로 감동을 가장한다.

 

수련 잎사귀 위에

 

일광욕하러 나온 물뱀

 

물뱀 지나간 자리

 

꿰맬 수 없어

 

빨간약을 구할 데 없어

 

수직의 수련이 울고 있다

- 안도현, 수련전문

 

동화적인 상상이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동화적인 순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자연 속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대해 상처를 낸다. 시인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 대한 우화이기도 한 이 장면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설득력 있는 정서적 근거는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수련이 슬퍼할 이유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유 없는 그 슬픔을 강조해 애써 수련이 가지는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현실적 맥락도 수련의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제시도 아니어서 정서적 진정성을 주기에는 크게 미흡해 보인다. 다만 외부에서 부여된 감정의 과잉만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상투성과 감상성은 사실 안도현 시가 가지는 대중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익숙한 것이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일어난 갈등에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거기에서 위안을 느낀다.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이미지나 특별한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감각적, 정신적인 부하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익숙한 정서와 생각은 편안함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와 함께 있다는 위안은 제공한다.


4. 맺으며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문학이나 예술도 또한 팔려야만 가치를 갖게 되는 시대에 대중성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야 의미를 가진다는 강박관념이, 새로움으로 우리의 상투화된 일상을 괴롭게 뒤흔드는 진지한 예술적 성찰을 약화시키고, 키치라는 가짜 예술을 양산하고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의 예술의 카타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키치에 대한 저항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