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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그리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4. 2. 15:48

지금 이 순간, 그리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조동범

 

오늘날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시는 여전히 유효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직 시의 힘을 믿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의 허망함을 역시 잘 알고 있다. 시는 분명 이 시대에도 유의미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 시가 과거의 영예나 힘을 발휘하고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는 우리가 추구하고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 세계를 표상하지만 정작 그곳에 다다를 길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시의 세계를 믿고 꿈꾸며 시를 쓰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수는 많지 않지만 시를 읽는 독자 역시 적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시인들은 자신이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여전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믿고 싶어 한다. 물론 그곳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실패가 아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들이 가닿고 싶은 곳은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하는 절실함의 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갈 수 없는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불행한 일인가? 혹은 그 꿈이 불행임을 알고도 나아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일까? 시인들은 가능하지 않은 세계와 비극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비극을 향해 나아고자 한다. 그리고 비극의 한가운데에서 삶과 세계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시인은 때때로 자신의 삶을 일정 부분 포기한 채 시의 한가운데 있기를 희망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스스로 고통 속에 놓이기를 바라는 자이며 고통과 동일시되기를 바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를 쓰고 읽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유효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 정신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다가오는 가치가 아니다. 어쩌면 시 정신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남아 있는 제한적 가치일지도 몰흔다. 하지만 그것이 제한적이고 더 이상 폭 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 정신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모든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시 정신은 우리를 가치 있는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오늘날 우리 삶의 양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시가 세계를 드러내는 방법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의 시 정신이 과거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의 시 정신을 긍정적으로 생가하든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과거의 양상과 구분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시 정신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시인들의 시선과 방법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판단의 근거는 대체적으로 과거의 양상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대의 시 정신이 다르지 않은 것만큼, 과거와 현재의 시적 방법론과 인식 체계를 구분하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이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를 나누어 파악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런데 오늘의 시 정신을 과거의 시 정신과 비교하여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시를 구분하여 창작 방법론마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시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삶과 세계가 바뀜에 따라 시 정신을 드러내는 방식과 작동원리가 바뀌었을 뿐이다.

 

시 정신은 삶과 세계의 원형을 이루는 본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시 정신의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시 정신은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시 정신은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절대성의 세계에 놓이는 개념이다.

 

오늘날 시 정신과 시인들의 시적 인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 시대의 시 정신은 과거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인가? 앞 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시 정신의 본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시적 태도와 방법론 등을 부정하거나 불편해 한다. 변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 정신의 본질이 변하거나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특정 시대의 시적 태도가 다른 시대의 시적 태도보다 우월할 수 없으며 각각의 것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하나의 시선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시적 외연이 넓지 않다거나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둔감하다는 등의 개별적 판단은 젊은 시 전반의 보편적 특성으로 정의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판단은 개별 작품과 시인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특정한 세대를 향하면 곤란하다. 세대론이 위험한 것처럼 하나의 집단을 엮어 그것에 보편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시는 언제나 정서를 드러내고 사회적, 정치적 인식을 재현하려 한다. 또한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하며 부조리의 한가운데에서 고통받기를 원한다. 젊은 시인들 역시 현실의 고통에 괴로워하고 사회구조의 모순과 맞서 싸우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세대의 시는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오해는 2020년에 활동 중인 젊은 시인들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최근 발표되고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과연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둔감한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오해이자 편견이다. 오히려 젊은 시인과 시는 끊임없이 사회와 정치의 부조리애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만 그것의 발화방식과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과거와 다를 뿐이다. 최근의 정치적 저항의지와 과거의 정치적 저항의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의 정치적 저항의지가 과거에 비해 약화된 것이거나 방향전환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 시의 사회적, 정치적 저항의지의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의 삶은 희망 없는 세대의 절망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비극보다 가볍지 않다. 어쩌면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 구조 속에 너무나 단단하고 자연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거대한 괴뭃이 되어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속에서 젊은 시인은 그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고통을 견디고 그것을 통해 시적 세계를 드러내려 한다.

 

젊은 시인 대부분은 IMF 국제금융사태 이후의 비극을 온몸으로 맞닥뜨리게 된 비애로운 세대이다. 이들은 성장기와 청년기에 IMF 국제금융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삶에 희망이라는 가능성이 끼어들 여지는 애초에 차단된 상태였다. 사회에 진출한 이후 쉽게 희망을 꿈굴 수 없던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젊은 시인들은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성장기와 청년기를 지나왔다. 어쩌면 이들의 시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읊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들은 온몸으로 처절한 고통을 견디며 맞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현실인식이 사적 경향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인들은 자신의 삶이 이와 같은 세계 속에 휩쓸려 무너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행동하고 실천한다. 온몸으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실천하려 한다. 특히 이전 세대가 감지하지 못했던 사회적 오류를 수정함으로서 우리의 삶과 세계가 버리지 못했던 부조리와 편견을 바로잡으려 한다. 과거 촛불 정국에서 나온, 젊은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시국선언문 ‘67.9 작가 선언이 의외라는 반응이 있었지만, 젊은 문인들의 이 선언은 의외의 행동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젊은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무감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관심 없음 자체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젊은 시인들은 우리가 그동안 미처 몰랐거나 애써 눈감고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일개우고 바로 잡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젊은 작가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인식은 과거와 다른 측면의 논의를 이끌어낸다. 이들에게 거대 서사와 같은 비극이 없다고, 그겻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최근 시가 드러나는 일상이 지나치게 사소한 국면으로 재현된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부분도 있다. 시적 경향이 시단 전반을 지배함으로써 최근 시의 외연이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부 시적 경향을 전반적인 양상으로 확장하여 세대론으로 가져가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어쩌면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어느 시대의 시인들보다 온몸으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비전 없는 시대 속에서, 싸워야 할 괴물조차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이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견디고 견딜 뿐이다. 다라서 오늘의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시대의 시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려 한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젊은 문인들은 문학 권력이나 출판 권력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들에게 그런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물론 문학 권력이나 출판 권력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시인그것을 가질 이유 역시 없다. 이 자리를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대 이후의 시인들은 그동안 문학이라는 시스템의 변방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이들의 문학은 타인에 의해 인정받거나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이들 모두 문학 권력과 출판 권력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다. 문학 권력과 출판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며 2000년대 이후의 시인이 그 중심에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출판 자본을 직접 소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전의 문학 권력이나 출판 권력과는 다르다. 출판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힘은 애초에 영속성을 갖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은 삶 전부가 비극적 현실이라는 용광로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문학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황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발언은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기보다 개인적, 집단적 투쟁 양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과 현상은 젊은 시인들 때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젊은 시인들의 역량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에 당도한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비전 없는 세상에 맞서 각자의 문학적 지평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조동범

 

2002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비평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출간. 청마문학연구상, 당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 계간 시와 정신, 2020년 봄호, 우리 시대의 시정신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