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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과 증오의 연대…가족의 이중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7. 6. 14:11

애정과 증오의 연대…가족의 이중성

[중앙선데이] 입력 2020.06.20 00:30

양선희 기자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

‘가족, 지지와 사랑이 넘치는 최후의 안식처’. 이 말은 ‘실화’일까 ‘신화’일까. 우리는 가족의 사랑으로 힘을 얻는 이야기, 언제나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 수많은 ‘가족애 스토리’들에 둘러싸여 있다. 가정은 낙원이며, 안식처로 규정된다.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아동학대
학대부모에게 아이 보내는 기관들
가족의 애정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사회제도, 가족의 이중성 직시해야

때로 이에 어긋나는, 갈등하는 가족들엔 곧바로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난이 따른다. 그들이 비정상이라는 듯 말이다. 그러곤 ‘가족애’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며, 가족 간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떠넘긴다. 우리 사회엔 ‘가족애 신화’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작동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렬한 ‘진실’ 하나를 모르는 척하며, 외면한다. 원래 미움 중 가장 깊고 무서운 게 가족과 핏줄 간의 ‘근친증오’라는 사실. 정신분석학자들이 ‘카인 콤플렉스’로 명명한 강렬한 적개심과 증오는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이고, 가족 간 벌어지는 폭력과 살인은 현재도 흔하게 벌어지는 범죄 유형의 하나라는 ‘실재’ 말이다.

충남 천안 남자 어린이 사망 사건과 경남 창녕 아동학대 사건. 최근 잇따른 아동학대 사건에 또 한 번 전 국민은 공분하는 중이다. 이런 공분은 이젠 거의 연례행사다. 연례행사엔 매뉴얼화된 행동양식도 존재한다.

정부는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이 일어난 양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아동학대 방지 대책’을 논의하고, 언론은 아동학대의 원인과 대책을 검토하고, 전문가들은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고 촉구한다. 시민사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을 내놓으라고 채근하며,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드높여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자성론을 쏟아낸다.

선데이 칼럼 6/20

이번 사건들과 관련해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매뉴얼에 따라 각자 맡은 위치에서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이런 사건에 대해 보여줘야 할 ‘성의’는 대충 다 보여줬다. 아마도 내년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만 바뀌어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또 사회관계장관들은 ‘아동학대를 방지하겠다’며 회의를 열고, 언론은 공분을 부추길 것이다. 수십 년째 봐온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행동 패턴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너무 불길한 예언이라고?

천안에서 가방에 갇혀 사망한 아이는 이미 아동학대로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개입했던 이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졌다. 아동보호기관은 학대 부모와 아이를 분리하지 않았단다. 이런 사건, 데자뷔가 느껴지지 않는가. 아동학대 사건만 일어나면 ‘분리’를 제일원칙처럼 거론하고, 학대 가족에게 돌려보내선 안 된다는 얘기가 반복됐던 터라 지금쯤은 이 원칙이 지켜지는 줄 알았다. 하나 아이는 부모가 돌봐야 한다는 ‘원가족 보호제도’는 여전히 아무 대책도 방비도 없이 ‘가족애’에 대한 믿음만으로 굳건하고, 지난 20대 국회에서 떠들썩하게 발의됐던 관련 보완 법안들은 그냥 묻혔단다.

창녕의 아동학대 피해자 아이는 처음 본 사람이 아동학대 정황을 알아채고 신고했을 만큼 학대 정황이 뚜렷했다. 그런데 그동안 그 아이의 주변에 있던 신고의무자들이나 이웃들은 왜 그 아이를 방치했을까. 실제로 학교 직원과 의료인 등 신고의무자가 신고해 밝혀지는 아동학대는 2018년 기준 27.3%로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이는 방임과 악의보다도 서로 아는 처지에 신고까지 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가족 간 화해와 중재를 시도하려다 시기를 놓쳐서 그런 경우도 있단다.

 


가족은 함께 있어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서로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다. 가족의 애증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다. 이처럼 격한 애증의 연대(連帶)라는 점에서 인간사에서 가족 간 참상은 끊이지 않았다. “일찍 주면 굶어 죽고, 늦게 주면 맞아 죽는다.” 요즘 고령층 사이에 재산 증여 시기를 놓고 오가는 농담이다. 2000여 년 전 한비자(韓非子)도 “딸을 낳으면 죽이는 것처럼 부모·자식 간에도 애정보다 계산이 앞선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냥 사람이 그렇게 생긴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마치 동전의 뒷면은 없는 셈 치고, 가족애 넘치는 동전의 앞면만을 들이밀며 ‘닥치고 사랑’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가족이 최고라며 학대 부모에게 아이를 돌려보낸다. 물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사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려면 미리 부모 교육을 하든지 주기적으로 감시하든지 아이의 학대를 막는 방비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가족애’라는 허울뿐인 믿음에 아이를 던져 죽음에 이르게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자녀 체벌 금지법’에 대한 얘기가 나온 지가 언젠데 또 추진할 예정이란다. 우리는 이 말이 ‘추진하다 잠잠해지면 폐기해도 그만’이라는 뜻의 다른 말로 알아듣긴 한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치료사 존 브래드쇼는 ‘가족의 역기능’을 설파해 유명해졌다. 그는 ‘가족의 최면’에서 벗어나 가족에서 분리된 자아를 찾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설파했다. 가족은 울타리이기도 하고 굴레이기도 하다는, 그 이중성을 직시해야만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걸 줄일 수 있을 거다. 가족 문제에 대해선 한 쪽 눈은 감고 실행하는 가족제도들. 선의를 믿는 사회제도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