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소크라테스를 죽게 한 ‘프레임’…거짓도 사실로 둔갑
[중앙일보] 입력 2020.05.22 00:34 | 윤석만 기자
진실의 죽음
1787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 육체보다 정신을 강조했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침대에 등 돌리고 고개숙여 앉아 있는 사람이 수제자인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손을 얹은 이가 ‘절친’인 크리톤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제 각자의 길을 떠나자.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어디가 옳은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유죄도 무죄로 만들던 궤변론자
논리가 아닌 감성으로 대중 선동
윤미향 비리 의혹에 친일 프레임
반박 논거 부족한 물타기일 뿐
기원전 399년 아테네 재판정의 한 노인은 이 같은 말을 남긴 채 독배를 들었습니다. 배심원 500명 중 280명이 첫 평결에서 유죄를, 360명이 다음 평결에서 사형을 언도했기 때문입니다. 신에 대한 불경 및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프레임이 씌어졌죠. 훗날 플라톤의 표현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는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이날 재판은 젊은 시인 멜레토스의 고발로 열렸습니다. 배후는 30인 참주정을 무너뜨린 민주정의 권력자 아뉘토스였고요. 정치적 반대파인 소크라테스를 제거하려던 의도였습니다. 시민들은 아뉘토스가 퍼뜨린 ‘가짜뉴스’를 진실로 생각해 ‘불경’이라는 추상적 죄목으로 사형을 내렸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거짓으로 고발돼 왔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거짓말로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지도 않은 죄로 나를 비난한 사람들이다. (거짓 고발이기 때문에) 그림자와 싸워야 하고 대답할 자가 없는 상태에서 논박해야 한다. 내가 파멸 당하면 그것은 비방 때문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선량한 사람을 죽게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스승의 죽음을 지켜본 28세의 청년 플라톤은 어리석은 대중을 증오하게 됩니다. 훗날 그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비판하고 ‘철인정치’를 내세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죠. 그리스 고전의 권위자인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김헌 교수는 “시민이 지성과 인격 모두 합당한 자질을 갖출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었다”며 “모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과 모두가 권력 주체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14년 뒤(기원전 385년)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 무죄를 규명합니다. “그가 불경한 짓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년들에게도 솔선수범을 보이며 스스로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겠는가?”
당시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로 의사결정을 내렸습니다. 의회·행정·사법의 3권이 모두 시민들의 아고라에 있었죠. 그런 이유로 대중을 설득하는 ‘수사학’이 발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진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궤변론자로 불린 일부 소피스트는 돈만 주면 공공연히 있는 죄도 없게 해주겠다고 광고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3요소로 에토스(품성), 파토스(감성), 로고스(이성)를 꼽았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논리적이면 로고스만 있으면 된다”고 했죠. 하지만 사람은 늘 감정과 편견에 휘둘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고, “고통스럽거나 즐거울 때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듯 감성에 끌려 결정”을 내립니다.
독선은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켜
뤼쿠르고스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아테네 10대 연설가 중 신분이 가장 높았던 그는 시민들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군을 무찌르자 대부호였던 레오크라테스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 로도스섬으로 탈출합니다. 훗날 뤼쿠르고스는 그를 법정에 세우고 격정적인 연설로 “배신자를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법은 그를 처벌할 조항이 없었죠. 혼자 도망간 것이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순 있어도 반역죄에 해당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오크라테스는 불과 한 표 차이로 사형을 면합니다. 김헌 교수는 “합리적이었다면 여유 있는 표차로 무죄 결정이 내려졌을 것”이라며 “단 한 표차뿐인 것은 뤼쿠르고스의 말이라면 뭐든 믿어줄 준비가 돼 있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뤼쿠르고스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에토스와는 별개로 레오크라테스에 대한 공격이 비이성적이고 지나쳤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뤼쿠르고스의 말을 맹신했죠. 맹목적 믿음이 없는 죄도 있게 만든 것입니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전 델포이 신탁에서 한 무녀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내가 지혜로워 이런 말이 나온 게 아니다, 단지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옳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자기의 무지조차 인식 못 하고 있다는 뜻이죠.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신에게 절대 오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명적 독을 품는다”고 합니다. “자기 생각을 확신하는 사람은 절대 권력이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독선은)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영혼을 오염시키고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독단과 독선으로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거짓과 음모를 사실로 둔갑시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본질은 주관적 경험의 총합일 뿐이죠. 눈을 가리고 만진 코끼리의 형상이 제각각이듯, 경험적 사실은 애초부터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이성, 좋고 싫음은 감성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경험이 하나의 단편적 사실이라면, 진실은 전체의 모자이크입니다. 진실에 닿으려면 최대한 많은 사실 조각을 모아야 하죠. 수많은 주장과 논증이 오가고 자유로운 토론이 벌어진 뒤에야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존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말한 ‘사상의 시장’과 같습니다. “진실과 거짓이 맞붙어 싸우게 하라,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실이 패할 일은 없다”는 것이죠.
요컨대 진실을 위해선 수많은 의견과 논박이 있어야 하고 그 토론에는 이성과 논리가 전제돼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에토스를 가진 사람 또는 집단이라고 해서 무조건 맹신해선 안 되며, 달콤하고 선동적인 언어에 취해 감성적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에토스와 파토스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성은 ‘좋고 싫음’의 취향을 결정할 때 쓰는 것인데,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는 데까지 쓰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 스타일의 커피를 갈아 마시듯 ‘정의(正義)’를 취향처럼 소비하고 있는 것이죠.
최근 정의기억연대 논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연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과 이들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죠. 정의연에 대한 비판을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로고스로 판단해야 할 일을 파토스를 끌어들여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대중을 홀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궤변론자들의 교묘한 수사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게 진실이고, 무엇이 옳은지 알기 위해선 로고스가 필요합니다. 제일 먼저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A의 부정과 비리를 의심할만한 사실들이 제기되면, A는 무죄를 입증할 만한 사실적 논거로 반박하는 게 정석입니다. 그렇지 않고 ‘보수 언론의 모략’이라거나 ‘검찰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공격’이라며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반박할 논거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레임 또한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견’을 사실처럼 받아들여 A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플라톤이 말한 ‘중우’에 가깝습니다. 사실에 대한 반박은 사실로써만 가능합니다. 의견을 냈으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논거 역시 사실에 기인해야 하고요.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 볼 수 있는 혜안만 갖고 있어도 프레임을 내세워 진실을 은폐하려는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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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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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399). 절대 진리를 강조했고 탐구방법으로 귀납적 문답(산파술)을 제시했다. 정신을 강조한 그의 철학은 제자인 플라톤에게 이어졌다. 공자처럼 책을 직접 쓰지 않고 제자들이 기록을 남겼다.
플라톤
플라톤
(기원전 427~347).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일 뿐”이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이 구축한 이데아와 현실의 이분법은 니체에 의해 깨질 때까지 이천년간 공고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322).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이상을 좇던 스승과 달리 현실 세계를 중시했다. 그 결과 철학, 수학, 문학, 천문, 정치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로 학문의 아버지라 불린다.
존 밀턴
존 밀턴
(1608~1674). 서사시 ‘실낙원’을 쓴 영국의 시인. 셰익스피어에 준한다는 평가다. 그가 쓴 『아레오파지티카』는 천부인권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이는 존 S. 밀의 『자유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소크라테스를 죽게 한 ‘프레임’…거짓도 사실로 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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