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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4. 16. 13:41

[박정호의 문화난장]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중앙일보] 입력 2020.04.16 01:35

 

 

박정호 논설위원

지난 주말이다. 아파트 현관 돌계단에 벚꽃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곱디곱다. 짧은 생명을 다하고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고 말을 거는 것 같다. 고개를 들었다. 전나무 뾰족한 잎새에도 벚꽃이 하나 걸렸다. 새하얀 꽃잎과 새파란 잎새의 절묘한 접속, 세상이 환해 보였다.

초속 5㎝, 시속은 180m
느리지만 곱디곱게 낙화
팬데믹에 멀어진 사람들
언제쯤 다시 가까워질까

스마트폰을 꺼냈다. 두 장면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이가 든 때문일까, 아니면 코로나19 우울증 탓일까, 올봄 여러 SNS에 올라온 울긋불긋 꽃대궐에 자주 눈길이 멈췄다. 착시일지 모르겠으나 최근 온라인엔 유독 꽃 사진이 넘실댔다. 맘껏 상춘(賞春)할 수 없는,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하는 갑갑함을 달래려는 마음일 것이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에 자극받아 일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다시 봤다. 색과 빛의 마술사로 꼽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07년 작품이다. 어릴 적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수채화 같은 화사한 화면에 펼쳐진다. 일본 특유의 소녀적 감성이 물씬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얘기임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첫사랑의 아스라한 추억을 화사한 화면에 담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 서로 떨어진 두 주인공의 관계를 속도와 거리로 풀어냈다. [중앙포토]

널리 알려졌듯 초속 5㎝는 벚꽃이 땅에 떨어지는 속도라고 한다. 초속 단위를 사용하니 꽤 빠를 것 같지만 시속으로 환산하면 0.18㎞다. 시간당 180m, 거북이걸음쯤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초속 5㎝는 어린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속도를 상징한다. 아주 느리지만 상대에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속도다.

영화에는 또 다른 속도가 등장한다. 주인공 남자아이는 여자 친구와 떨어져 우주센터가 있는 가고시마(鹿兒島)에 사는데, 이곳에서 시속 5㎞의 우주선 운반열차와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늘로 치솟는 우주선을 만난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실제론 가까워질 수 없는 물리적 거리가 속도라는 잣대로 은유된다.

속도와 거리, 일반적으로 속도가 빠를수록 두 지점의 거리는 좁아진다. 예컨대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30여분에 돌파한 것도 오래된 얘기다. 광속 디지털 시대, 코로나19가 지구촌 전역에 급속히 퍼진 것도 초연결 시대의 그늘이란 풀이도 이제 전혀 새롭지 않다. 일부 문명사가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극악 같은 침탈을 비판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인류 문명을 예전 속도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칠 수도 없다.

속도·거리 얘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은 것은 물론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뉴 노멀’(새로운 일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2m로 대표되는 사회적 거리가 향후 사람들 사이의 ‘표준 거리’가 될 수도, 비대면(언택트) 접촉이 인간관계의 보편적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마음의 거리도 그만큼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고 타인의 잔기침 소리에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요즘이 아닌가. 타인에 대한 거리두기가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지만 타인에 대한 공포는 분명 우리를 쪼그라들게 한다.

신카이 마코토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봄을 빼앗겼다. 진해·여의도 벚꽃 축제가 가로막혔고, 삼척·제주·부산의 유채꽃밭이 갈아엎어졌다. 학교·극장·경기장은 텅텅 비었다. 절벽으로 추락한 고용·산업현장엔 비할 수 없지만 마음의 박탈감도 그에 못지않다. 휑하게 구멍 난 가슴이 언제 다시 채워질지 하염없는 기다림만 계속되고 있다. 이 악몽 같은 재난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뾰족한 수는 없다. 다만 서두를 일이 아니다. 세상은 역설적이다. ‘집콕’ 생활이 늘어난 만큼, 즉 가족 간 거리가 좁아진 만큼 사랑과 우애가 도타워졌지만 다른 쪽에선 가정폭력과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초속 5㎝라도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여는 수밖에 없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공감과 연대가 지름길이다. 대지를 뒤덮은 꽃비를 만끽하는 내년 봄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김기택 시인의 ‘밤 벚꽃’ 한 구절을 인용한다. ‘젊은 남녀 나란히 않은 저 벤치, 밤 벚꽃 떨어진다/(중략)/천년을 건너온 매질처럼 소리 안 나게 밤 벚꽃 떨어진다/화끈한 누드쇼 이끌고 방방곡곡/사람사태 나도록 쏘삭거리는 일/참말로 잘하는 짓이다.’

거리에, 극장에, 꽃밭에 사람사태가 일어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 어수선한 총선 다음날, 너무 한가한 소리가 아닌지 객쩍지만 말이다.

박정호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박정호의 문화난장]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