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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卵/ 나병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9. 2. 20:58

詩 卵

나 병 춘

 

1.

 

'산에 산이 없다'(山中無山) 어쩌면 시는 끝없는 화두를 던지는 도를 닦는 수행과 같다. '돌에 돌이 없다' 겉모습의 돌만 보고 돌이라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성철스님의 선시가 생각난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다산은 산이 아니요물은 물이 아니다......(중략)"

 

산과 물, 서로를 조응하는 관계망을 설파하는지도 모른다. 산과 물의 보이지 않는 존재론적 인드라망의 세계, 산은 물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물은 산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산은 돌멩이이며 새들이며 풀잎이며 애벌레이며 나뭇잎이며 나뭇잎을 기르는 나무 줄기이며 뿌리이며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다. 곰팡이이다. 이끼이며 돌돌돌 구르는 시냇물이며, 그 속에서 헤엄치는 어린 산천어 갈겨니 버들치이며, 반짝거리는 햇살이며 바람소리 물소리이며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작은 꽃향기이며, 낙엽이 부드럽게 땅으로 회귀하는 발걸음소리다. 낙엽 사이를 몰래 기어가는 뱀이며 눈동자이며 번쩍거리는 비늘이다. 뱀이 물고 가는 개구리이며 죽어가며 지르는 외마디 소리다. 삶과 죽음이며 그 속을 가르는 바람의 흐름이다. 흐르고 흘러서 다시 물이 되고 흙이 되고 불꽃이 되고 재가 되어 흩어지는 먼지이다. 먼지 속에 쉬고 있는 삼라만상이다. 산에는 삼라만상의 근본이 있다. 우리가 지금 쉬는 숨결이 있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속에 들락거리는 생명의 박동이 있다. 소리와 색깔과 향기와 맛과 부드럽고 딱딱하고 서늘한 촉감들이 있다. 오색과 오향과 오미와 오촉과 오음들이 펼쳐지는 파노라마, 그것이 산이며 물이며 자연의 시이다. 그 말의 뿌리를 찾아 아무 것 챙기지 않고 길을 떠나는 자들이 시인이다. 결국 시는 道이며 돌고 도는 돌멩이이며 그 사이를 가르는 물소리이며 새소리이며 바람소리다. 고요한 새소리 속에 섞여있는 허공이며, 씨알이며 새가 무심코 찍 갈겨 놓은 똥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씨앗으로 트는 어린 싹이다. 이 세상은 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네가 있어 존재하고 네가 있으므로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삶이 펼쳐지고, 다시 병들고 죽어서 다시 그 무엇인가로 거듭 윤회를 하는 것이다.

 

2.

 

시는 시다. 시고 맵고 짜고 달고 오묘한 오미를 다 갖고서 나의 구미를 당긴다. 배고플 때나 홀로 외로울 때 시를 읽고 있으면 먹는 것도 잊어버릴 때가 있다.시는 시골이다. 시냇물 흐르던 고향산천 산골짜기로 인도한다. 시골 숫처녀와의 첫사랑으로 끌고 간다. 시시껄렁한 추억을 시시콜콜 이어준다.시는 신이다. 신발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난생 처음 가는 곳으로 끌고 다닌다. 새로운 도시나 바닷가 섬나라까지 온갖 파노라마를 펼친다.시는 神이다. 지상의 노래뿐만 아니라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스펙트럼으로 날 유혹한다. 저절로 아무도 모르게 신바람을 일으켜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비몽사몽 헤매게 만든다.시는 실이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인생담을 쏟아낸다. 연줄이 풀려나가듯 실실실 풀려나가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십 수백 리 연을 날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실타래가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되고 영화가 되어 실없이 허허실실 시로 태어난다.시는 心이다. 심심할 때마다 뾰족이 고갤 내밀다 그 생각에 나를 맡기면 새로운 이미지들이 나의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린다. 아득한 옛적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언젠가 만났던 풍경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배우처럼 등장한다.시는 샘이다. 샘물처럼 퐁퐁퐁 솟아나 마음을 적시고 고독을 적시고 몸을 적시고 절로 눈물에 젖어들게 한다. 산골짜기 맑고 환한 시냇물처럼 어디서 맛보지 못한 새로움을 선사한다.시는 설雪이다. 눈처럼 휘날리는 아름다운 세상과 삭막한 폐허와 사막이나 빙하 지대를 보여준다. 때로는 쇄빙선을 타고 날아가듯 상큼한 스릴을 만끽하게 한다.시는 설날 아침처럼 가슴 설레게 한다. 설빔을 몰래 사다 놓은 머리맡에, 새벽 일찍 일어나면 새로운 신발과 옷이 가지런히 앉아 기다리는 아득한 세월 쪽으로 몰래 인도한다.시는 섬이다. 기슭에 구르는 온갖 조가비들의 서러운 이야기들, 몽돌 파도들의 서럽고 애통 터지고 몰래 눈물 짓던 할아버지 할머니 뱃사람이나 해녀들의 심심한 입술들이 활기를 띠며 구구절절 메아리로 울려퍼진다. 외로운 무인도에 다다른 연인들의 막히는 사랑들이 산호초 현란한 색깔과 향기들이 서로 조응하여 박수를 친다.

 

3.

 

시는 씨알이다. 까만 점이다. 마침표이기도 하고 말없음표나 느낌표 물음표이다. 저것은 무엇일까?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이다. 자신에게 혹은 너에게 그대에게 나무에게 꽃에게 다람쥐나 구름에게도 하늘에게도 시시때때로 질문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전혀 엉뚱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없던 질문을 찾아 바보처럼 헤매다니는 유랑자다. 사막을 떠도는 낙타같이 혹은 하이에나같이 배고픈 발자국을 찾아 이 세상 끝까지 쉬지 않고 걸어간다. 별에게 달에게도 질문하고 일출의 태양에게 질문하고자 까맣게 날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는 학문도 좋아하지만 알 수 없는 미궁을 더 사랑하고 좋아한다. 논리적으로 따지기도 하지만 논리 이전이나 논리 이후로 건너뛰기를 좋아한다. 은유나 상징처럼 일상의 상식으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곧장 날아간다. 논리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고 침투한다. 상식과 비상식 사이 논리와 비논리 사이에 둥지를 틀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저건 도대체 무엇인가? 어린 아이의 호기심 못지않게 과학자의 탐구심 못지않게 모든 사물과 사건과 역사와 자연에 대하여 혹은 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도전한다. 어찌보면 미친 자 같아서 세상과 짝하기가 힘들다. 깊은 산골에 은거하기도 하고 세상을 벗어나 바람처럼 구름처럼 운수행각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시는 씨알이다. 말씀의 알맹이는 어디에 있을까 시종일관 두리번거린다. 말씀을 하는 것보다 듣기를 더 좋아한다. 침묵을 더 사랑한다. 순간과 영원 사이에 있는 두려운 신비에 도전하고자 한다. 알 수 없는 신비, 아득한 심연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어린왕자처럼 이곳저곳을 찾아 오늘도 옷깃을 여미고 신발끈을 고쳐맨다.

시인은 백지 눈밭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숨결로 자신의 색깔과 외로운 발자국 모양으로, 그러니 그 발걸음은 이 광활한 우주에 처음 찍히는 첫발이다. 마치 달나라에 박힌 우주선 선장의 발자국처럼....... 세상엔 참 말도 많구나. 해서 돌처럼 묵묵히 그냥 있기로 한다. 침묵 고요 적막, 이 얼마나 평화로운 말이냐? 자연 속 숨은 보석들을 하나하나 보듬어 보리라 다짐해 본다. 기생충학자 서민의 말처럼 시가 공생의 언어이기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북돋우는 말이기를, 광야를 달리는 야생의 말갈기 속에서 희망과 기쁨을 길어 올리는 말의 마중물이기를, 시인은 말의 정부이니, 자신만만한 정부가 되어 키 작은 사물에게 풀꽃에게 사랑과 격려와 힐링 에너지를 듬뿍 불어 넣어주기를, 신록이 우거진 유월에 소망해본다.

 

[예제 1]

 

어처구니* | 마경덕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곳에 붙어 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

 

*맷돌의 나무 손잡이

 

<감상>

 

세상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많다.‘어처구니’가 무엇일까? 그냥 지나치기 쉬운 말인데, 그 말을 가지고 이렇게 맛깔스런 시를 뽑아낸 시인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어처구니없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성깔을 지녔다.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사소한 것들이나 중요한 것들이나 다 매한가지의 시성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시인들은 오히려 크고 중요한 일보다는 사소한 것에 관심을 쏟고 사소한 사물들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다. 사소한 것들은 바로 시의 소재로 삼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 경제 등 거대담론에 지친 사람들은 주변에서 사소하게 벌어지는 것들에 관심이 저절로 간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주장을 뒤로 하고라도, 꽃이 피는 일이라든가, 새가 우는 일이라든가, 나무에 새싹이 돋아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바라보면 생의 환희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숲속에서 주로 생활하는 필자와 같은 경우, 어제와 오늘 달라지는 숲의 모습에 경이와 신비감에 젖는 경우가 많다. 산목련이 오보록이 꽃봉오리를 살찌워가더니 어느 날 금세 꽃봉을 터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일이 있다.환한 개안의 순간은세상이 열리고 우주가 열리는 개벽의 순간이 아닐까 보냐?

시인은 오늘처럼 무더운 날, 가족들을 위해 콩국수를 만들려고, 콩을 삶아 콩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편과 어처구니를 잡고 사이좋게 맷돌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손에 맞춤하게 딱 맞아 천천히 돌리다 본 것이다. 나무와 돌이 어떻게 한 몸이 되었을까?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콩과 콩이 한몸이 되어 가득히 달콤하고 비릿한 콩물이 되는 현장에서, 맷돌과 어처구니는 전혀 근본이 다른 사물인데, 몸으로 살을 섞으며 잘도 돌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작은 손잡이에 따라 큰 맷돌이 순하게 돌아가는 것이 더 신기하다. 성격이 판이한 부부가 서로 눈을 맞추고 한몸 되어 살을 섞으며 가정을 이루는 것이나, 어처구니와 맷돌이 순하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나 매한가지다. 뾰죽한 손잡이와 오목한 맷돌의 물질적 상상력은 바로 음과 양에 다름 아니다.

 

세상 모든 이치가 음양의 조화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남성이 완강하고 고집이 세면 또 여성은 부드러운 살이 되어 넉넉히 껴안으며 한통속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손잡이 ‘어처구니’는 손과 팔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의 몸에서 손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 인간(Man)이란 단어는 손에 관련된 말들(Manual, Manuscript, Management, Manufacture)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원 상으로 손은 바로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 틀림없다. 진화론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직립보행’과 손의 해방이 인류문명의 가장 중요한 모멘트를 형성한 것이 사실이다. 즉 손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인간과 짐승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져온 것이 아닐 수 없다.

 

‘어처구니’는 손잡이이면서 맷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의 ‘성감대’라고나 할까? 사람에 있어서나 사물에 있어서나 사건에 있어서도 ‘어처구니’와 같은 핵심 성감대가 늘 있다. 시인은 어쩌면 시 「어처구니」를 통하여 시론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A와 B라는 사물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메타포를 형성하는 과정을 ‘어처구니’를 통하여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작은 것이 큰 것을 부드럽게 다스리는 역설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한 줌의 나무가 덩치가 큰 맷돌을 순하게 돌리는 모습이 재미있지 않은가?

 

시인들의 ‘역설적 상상력’,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구원이 될 수 있다. 기계화 합리화 정보화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일, 이것이 자꾸 왜소화 되어가는 물질만능시대의 시인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사건이나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망을 꿰뚫어보고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론적 의미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일이야말로, 이 소통 불능의 시대에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어처구니인지도 모른다.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고 ‘어처구니’를 끼워 넣어 빙글빙글 잘 돌아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은 시인의 몫임에 틀림없다.

 

[예제 2]

 

나사/박남희

 

내 기억은 나사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감고 수없이 돌아서 그것을 단단히 조이려는 성향이 있다

나사의 원조는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인데 뱀이 지시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브를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이브는 결국 뱀 모양의 볼트의 꼬임에 빠져 스스로를 너트로 만들었던 것인데 그 때부터 해와 달은 보이지 않는 볼트와 너트의 궤도를 따라 쉬지 않고 돌기 시작했던 것인데 한번 너트에 든 볼트는 궤도를 따라 돌면서 한 몸이 되어 갔던 것인데

너트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볼트는 아담이 아니라 뱀이라는 게 문제여서 결국 나사를 따라가다 보면 죄와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내 기억 속에는 수많은 뱀이 살기 시작했고 뱀은 날마다 이브를 그리워했다 원초적인 나사의 숙명이 시작되었다

 

<감상>

 

내 기억은 DNA속에 저장되어 있다. DNA는 나사 모양이다. DNA에 저장된 원초적인 본능을 볼트와 너트로 된 나사로 묘사하였다. DNA는 뱀 모양으로 서로 서로 뒤엉켜있다. 뱀을 연상하면서 태초의 남자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면서 저절로 이 시는 은유와 상징이 뒤범벅이 되었다.

볼트의 꼬임에 빠진 이브는 스스로 너트가 되어 아름다운 짝이 되었다. 해와 달의 음양 원리가 자연스레 배치되면서 결국 탄탄한 구성감이 느껴지는 시로 태어나게 되었다. 볼트의 꼬임에 빠진 이브는 행복한 이브인가 불행한 이브인가? '이브'라는 말은 왠지 따스한 느낌이 드는 말이다. 이부자리에서 포스근히 잠든 여인이 연상되지 않는가? '굿 이브닝!'하면서 여우짓을 떠는 관능의 여인이 연상되지 않는가? '볼트와 너트' 이 원초적인 죄에서 벗어날 장사가 그 누군가? 결국 욕망과 죄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 욕망이 없이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 사랑과 죄와 욕망 덩어리! 이것이 아마도 우리 존재의 뿌리일 것이다. 사랑과 욕망과 죄에서 벗어날 때, 해탈의 그 순간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볼트와 너트의 운명!

뱀은 징그럽다고 사람들은 그런다. 특히나 처녀들은 뱀을 보면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그들의 DNA 속에는 아마도 에덴 동산에서 꼬임을 당하던 이브의 본능이 숨어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본능이 들켜버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도망가는지도 모른다. 뱀은 날마다 이브를 그리워하고 본능을 그리워하고 원초적인 나사의 숙명은 나사처럼 돌고 돌고 돌아서 또다시 뱀이 되고 이브가 되고 DNA가 되고, 결국 본능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DNA를 거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욕망을 어떻게 볼트와 너트로 조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아름답고 합당한 짝을 만나 새끼를 낳아 그 새끼가 새끼를 낳고 낳고 낳고 낳아서 오늘날의 아담한 지구가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본능은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것이다. 시가 시를 낳고 시를 낳고 시를 낳듯이 생명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낳듯이...... 볼트과 너트가 궁합이 맞지 않으면 기계가 자신의 일을 제대로 못한다. 볼트와 너트가 없이 남녀 간의 사랑이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시인은 넌지시 점잖은 도덕관념의 궤도를 깨부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진솔한 자아성찰을 통하여, 관념에 빠진 근엄한 종교의 궤도에게 도전장을 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속에 살고 있는 푸른 뱀들, 오늘은 과연 어디로 향하여 갈 것인가? 푸른 독은 흐르고 흘러가서 푸른 강물이나 되거라. 푸르 푸른 하늘로 날아가 조각구름이나 되거라. 원초적 본능이여 리비도여! 너는 누구에게 날아가 어느 뱀이 될 것인가? 시는 결국 우리 속에 있는 뱀이 꿈틀거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이얀 백지 혹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는 뱀들의 흔적, 그것이 시로 노래로 춤으로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예제 3]

 

자벌레 하나 느릿느릿 기어간다

 

둥그런 하늘 모습으로 지붕을 만들고또 팽팽한 허리로 지평선 만들어가는저 단순한 굴신운동

 

구부려야 곧게 펴지는곧게 펴야 또 구부러지는길들지 않은 용수철

 

그 작은 벌레의 몸속에구부릴 수 없는 하늘이

쉬고 있었다니

 

(졸시, 「자벌레」 전문)

 

 

 

(약력) 1994년≪시와시학≫으로 데뷔. 충북대 산림치유학 박사(수료), 시집으로 새가 되는 연습』하루』『어린왕자의 기억들』등이 있음. 현재, 월간우리詩》주간. 전화: 010-2065-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