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百이면 百 모두 다른 책… '예술 제본'을 아시나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0. 7. 00:10
 

百이면 百 모두 다른 책… '예술 제본'을 아시나요

 

입력 : 2016.10.05 03:00

- 종이책 프로젝트 '하우스 오브 픽션'… 오영욱·정유미·김중혁 등 참여
全紙 상태로 판매, 취향대로 제본 "아날로그의 매력 만끽했으면"

3일 오후 서울 상수동 뒷골목의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 손바느질로 실 꿰매 책 만드는 이 작은 공방으로 다섯 명 작가들이 속속 입장한다.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더 익숙한 건축가 오영욱,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 초청(2009)·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라가치상 대상(2014)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그림책 작가 정유미, '토마쓰와 로니' 캐릭터를 만든 일러스트레이터 이정환,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소설 창작 가르치는 작가 문지혁과 만화가 문지욱 형제다. 이들의 첫 공통점은 글과 그림이 모두 유려하다는 것. 또 하나는 출판사 스윙밴드의 아날로그 기획인 '하우스 오브 픽션' 참여 작가라는 점이다.

기획 취지는 '리브르 아 를리에(Livre A relier)'로 요약된다. 제본되지 않은 상태에서 판매하는 책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개별 독자의 취향대로 제본공방에 가져가 완성해보라는 뜻이다.

조효은(맨 오른쪽) 렉또베르쏘 대표가 제본한 저마다의 책을 들고‘하우스 오브 픽션’작가와 기획자가 모였다. 왼쪽부터 이수은·이정환·오영욱·문지혁·문지욱·정유미. 소설가 김중혁은 개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남강호 기자

 

독자도 저자도 목격하기 힘들지만, 책 제작 과정에서 잠시 동안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제본 직전 인쇄소에서 막 출력된 종이, 보통 16쪽 분량이 한 장의 넓은 평면에 펼쳐진 전지(全紙) 더미다. 잉크가 마르면 곧 우리가 보는 책으로 완성될 찰나의 운명. '하우스 오브 픽션'은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붙잡아보자는 취지의 기획이다. 스윙밴드 이수은 대표는 "책이 만들어지기 직전, 전지가 출력되는 그 순간이 정말 멋지다"면서 "이 아름다움을 독자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고 했다.

책도 안 사는 시대, 제본 전 상태의 종이 뭉치를 사라니. 더구나 제본하려면 추가 비용도 드는데. 물정 모르는 출판사 대표의 시대착오는 아닐까. 이 기획을 제안받았을 때 건축가 오영욱에게 처음 든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철이 없거나, 아니면 돈이 많거나. 이 대표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어쩌면 디지털에 대한 아날로그의 저항이랄까. 물성(物性)으로서의 종이책을 편애하는 작가들에게 던진 매혹적 제안. '집'을 소재로 글과 그림을 결합한 32쪽짜리 픽션을 완성할 것. 전지 두 장인 32쪽 분량도 타협 불가능한 전제였다. 분량 제한 없이 글·그림을 마음껏 표현하는 디지털 공간에서는 요령부득의 조건일 것이다. 이정환은 200자 원고지 300장 분량의 초고(草稿) 중 무려 2/3토막을 쳐내야 했고, '이사'라는 제목으로 사라지는 집을 32쪽 안에 완성한 정유미 역시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기묘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2인 1조로 참여한 문지혁·지욱 형제의 작품 제목은 '아날로그 보이'. 최신 스마트폰에 비해서는 아날로그 대접을 받는 낡은 휴대폰이 주인공이다. "혼자 할 때보다 어려웠냐"는 질문에, 내내 과묵했던 동생이 딱 한 마디 한다. "저는 우리가 의좋은 형제인 줄 알았어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하필 이날 이 예술제본 공방에서 모인 이유가 있다. 출판사가 특별히 주문한 5권의 수제(手製) '하우스 오브 픽션'이 마침내 완성됐기 때문. 공방 렉또베르쏘의 조효은 대표 역시 손으로 책 만드는 이 가내수공업이 좋아서 16년째 계속하고 있는 종이책 예찬론자다.

조 대표 역시 돈도 없고, 철도 없다. 하지만 예술제본의 매력은 특별한 소장품이 될 책을 각자가 원하는 구조와 형태로 만드는 것. 100권이면 100권 모두 다른 빛깔과 무늬의 책으로 태어난다. 자신만의 '하우스 오브 픽션'을 손에 쥔 다섯 작가의 얼굴에도 각자의 희열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