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어찌하여 봄은 항상 섬진강에서 오는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4. 2. 21:27

 

어찌하여 봄은 항상 섬진강에서 오는가

섬진강변에 매화가 피고 지리산 자락에 산수유가 피었다. 백운산 옛 절터에는 동백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런 호강이 없다. 구례에서 광양까지, 꽃길 따라 남하해본다.

입력 : 2016.03.23 08:48 | 수정 : 2016.03.23 09:11

[섬진강 꽃마을과 피아골 이장 미선이]

구례 산동마을과 백부전

전남 구례 산동마을에는 백부전이 살았다. 다섯 남매 중 막내였다. 해방 정국 때 밤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내려와 우익들을 죽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들을 죽였다. 둘째 오빠 남승이 그 와중에 죽었다. 큰오빠 남수는 일제 때 전쟁터에 끌려가 죽었다. 그녀가 열아홉 살이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터졌다. 셋째 오빠 남극이 토벌대에 끌려가던 날 백부전이 말했다. "내가 간다. 오빠를 살려 달라." 백부전이 처형 직전에 시를 읊었다. 제목은 산동애가(山東哀歌)다.

통일신라시대 도선 국사가 심은 옥룡사 동백나무가 어느덧 끝없이 펼쳐진 숲이 되었다. 도선이 옥룡사지 한 구석에 몸을 뉘게 된 이유도 의미심장하다. /박종인 기자
[만물상] 봄꽃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 맺어놓고 /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하략)'

많은 사람은 '빨치산 여걸 백부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부른 노래'라고 알고 있지만 틀린 말이다. 오빠를 살려 집안 대를 이으려는 당시 시대정신의 실천자였을 뿐 이념과는 무관한 여자였다.

산동마을에 산수유는 관상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꽃이다. 노란 산수유가 지고 빨간 열매가 달리면 사람들은 그 열매를 따서 팔았다.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이 먹고살 만해지면서 생존을 위해 기른 이 산수유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리산을 향해 길게 펼쳐진 마을 골목과 개울, 담벼락이 온통 산수유다.


젊은 이장, 피아골 미선이


지리산 반대편 피아골은 원래 피밭골이었다. '피밭'에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빨치산과 토벌대 냄새를 맡는다. 사실과 다르다. 피아골 입구 연곡사 스님들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첩첩 산골에 피를 심었다. 그래서 이름이 피밭골이 되었다. 이 피밭골이 세월 속에 피아골로 바뀌었다.


직전마을은 피 직(稷)에 밭 전(田), 즉 피밭 마을이다. 원조 피아골 마을이다. 서른두 가구가 사는 이 직전마을에 미선이가 산다. 미선이는 직전마을 이장이다. 임기 2년짜리 이장을 세 번이나 연임 중인 '젊은' '여자' 이장이다. 김미선, 1985년생이다.

피아골 직전마을 이장 김미선. /박종인 기자

1983년 당시 거제도 대우조선 사원 김현덕(58)은 피아골로 휴가를 떠났다. 수녀를 꿈꾸며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 이영옥(55)을 보았다. 양가 반대를 물리치고 두 사람은 이듬해 마을 빈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첫딸 미선이 태어났다. "미선이 하나랑 벌 한 통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미선이가 돌이 지나고 결혼식을 올렸고 3년 뒤 지혜가 또 7년 뒤 애영이가 태어났다.

삶은 팍팍했다. 미선이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자갈밭을 손톱으로 긁다시피 하며 일을 했다. 나, 그게 놀이인 줄 알고 자랐다. 고로쇠 물 받으러 갈 때면 엄마는 내 튼 손 보고 울었고 나는 엄마 손 옹이 보고 울었다."

자갈밭 골라 민박과 식당을 차렸다. 미선은 다섯 살에 된장과 장아찌를 만들었다. 손님들은 키가 허리춤에 닿는 아이들을 예뻐했다. 미선이네 식당에 자주 들렀던 관광버스 기사들은 "미선이 네가 그렇게 고생을 했더랬는데"하고 울곤 한다.

전주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시간 날 때면 집을 찾았다. 피아골이 좋았다. 도시로 나가 돈을 벌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올까. 집을 택했다. 2005년이다. 학교 친구들이 말했다. "청춘 안 아깝냐. 무능력자나 시골 간다." 지금 그 친구들이 묻는다. "여기 들어와서 살려면 어떻게 하냐"고.

돌아온 고향은 바빴다. IMF 이후 빚보증 잘못 서 산더미처럼 불어난 빚은 여전했다. 미선은 엄마를 돕고 아버지를 도우며 식당과 민박을 꾸려갔다. 그리고 식품 명인들을 찾아다녔다. 장아찌를 배우고 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불쑥 찾아와 음식을 배우겠다는 어린 여자를 명인들은 하나같이 반겼다. 나중에 한 명인이 말했다. "이 년아, 네가 벌써 나를 뛰어넘었구나!"

살갑게 달라붙는 어린 미선이를 손님들은 좋아했다. 손맛도 좋아했다. 미선네 민박집과 식당은 피아골 여행객들에게 명소가 되었다. 2010년 동생 지혜가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으로 왔다. 2014년 막내 애영이도 합류했다. 2011년 공장을 지었다. 장류와 장아찌류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름은 '지리산 피아골식품'이고 브랜드명은 '피아골 미선씨'다.

2012년 6월 직전마을 사람들은 미선이에게 이장 임명장을 수여했다. 스물일곱 살 먹은 처녀가 산골 마을 이장이 되었다. 이장 미선은 전등 갈아 끼우고, 편지 부치고, 반찬 사오고, 은행 심부름을 하고, TV를 고치러 이모네, 할머니네로 스쿠터를 몬다. 그녀가 말했다. "어르신들마다 꽃꽂이, 영화 감상, 약초 같은 문화적 취향이 다 있었다. 이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주고 가난했던 삶을 치유해주고 싶다."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장이 잘돼서 식당을 때려치우고 싶다. 우리 집 손님들이 동네 친구들 집으로 골고루 갈 테니까. 아랫동네 좌판 할머니들 산나물까지 몽땅 사버리고 싶다. 더 많은 동네 이모들이 월급봉투 받고 웃을 수 있을 테니까.''

 

도선이 잠든 옥룡사지

전남 광양읍 북쪽에 있는 백운산에는 동백나무 숲이 빽빽하다. '끝이 없다'고 해야 한다. 숲 한가운데에는 너른 터가 하나 있었다. 정체를 몰랐던 이 터를 1997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했다. 결론은 '도선 국사가 주석하고 죽은 옥룡사지'였다. 사적 407호다.

섬진강변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 매화가 가득 피었다. /박종인 기자

 

 

도선 국사(827~898). 원효와 함께 이 땅 웬만한 절에는 도선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묏자리를 잡는 흔한 풍수지리와 달리 도선은 모자라는 부분에 건물이나 숲을 채워넣는 비보(裨補) 풍수에 능했다. 도선은 옥룡사에 모자라는 부분을 동백나무 숲으로 채워넣었다.

지금 옥룡사지에는 동백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300년 수명을 다한 나무들은 세월 속에 또 심고, 또 심어서 지금 숲이 되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숲은 크고 깊다. 한꺼번에 피고 지는 다른 동백과 달리 이곳 동백은 시기를 두고 피었다가 진다.

이미지 크게보기
/박종인 기자

 

 

황량한 절터를 지나 오른쪽 오솔길로 내려가면 경사 급한 작은 공터에 복원된 도선 국사 부도탑이 있다. 1997년 발굴 당시 부도탑지 아래에서 작은 통일신라시대 석관이 나왔다. 석관 속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60대 남자 유골이 나왔다.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선 국사 유골이라고 믿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고 세골장을 지냈다는 것이다.

유골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부도탑 위치가 중요하다. 풍수학자 지종학은 '도선의 부도탑에 담긴 비보 사상(2012)'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반도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국사의 부도는 일반적으로 명당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한 지점이다. 도선의 부도는 옥룡사 절터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도선께서 평생 이루고자 했던 것이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구세도인(救世度人)이었음을 생각하면, 죽은 육신까지 바쳐 옥룡사를 통해 자신의 염원을 이루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매화, 섬진강 그리고 홍쌍리

동백나무 숲에서 산을 돌아 섬진강으로 간다. 매화마을이 나온다. 이미 광양 전역에 새하얗게 피어 있는 매화밭이 이곳 다압면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서 발상했다. 광양시청 매화정책팀장 최연송이 말했다. "단언컨대 광양 매실은 오직 한 사람 홍쌍리에게서 비롯했다."

홍쌍리는 청매실농원 여주인이다. 남이 뭐라든 젊을 적 강변 야산 돌밭을 개간해 매실을 심고 매실로 매실청과 장아찌, 장류를 개발해낸 여자다. 최연송은 "매실은 그저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쓰였을 뿐 홍쌍리가 매실 활용법을 보급하면서 농민들이 매실 농사를 짓게 됐다"고 했다. 지금은 아들 김민수가 농원을 꾸린다. 산수유마을처럼 외지인들은 꽃구경을 하러 매화마을로 온다. 이번 주말까지 축제다. 길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하지만 가볼 가치가 있다. 강변 공기에는 매화향이 가득하다. 아침이면 매화밭은 섬진강 물안개에 싸인다. 비가 오면 매화 비가 내린다. 비가 개면 푸른 하늘에 매화꽃이 봉긋 솟는다.

백부전은 집안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김미선은 마을을 위해 마을로 돌아왔다. 도선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 악지(惡地)를 골라 묻혔다. 홍쌍리 덕분에 섬진강 농부들은 매실로 돈을 벌게 되었다. 이 봄날, 지리산과 섬진강 꽃 나들이에서 엿들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볼거리〉

1. 옥룡사지: 도선 국사가 말년에 주석했다는 절터. 동백나무숲이 아주 근사하다. 오솔길에 있는 도선 국사 부도탑 이야기도 유의한다. 옥룡면 추산리 303.

2. 구례 산수유마을: 산동면에 있다. 마을 입구에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다.

3. 광양 매화마을: 광양 다압면에 있다. 청매실농원을 검색할 것. 주말까지 이어지는 축제 기간엔 길이 굉장히 혼잡하다. 농원 입구 장터는 소음이 심하다. 무시한다. 농원 안으로 갈수록 조용하고 분위기가 좋다. www.maesil.co.kr, (061)772-4066

4. 피아골 미선씨: 지리산피아골식품 브랜드 이름. 각종 장류와 장아찌류, 각종 발효식품. 통신판매도 한다. 김미선씨 부모가 운영하는 민박 겸 식당 천왕봉산장도 있다. www.jiripia.kr,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직전길 9, (061)782-3468,

〈맛집〉

광양 삼대광양불고기집: 은근하게 양념을 한 쇠고기 불고기. 얇게 저민 고기를 한 점씩 석쇠에 구워 먹는다. 맛이 중독성이 있다. 1인분 국산 2만2000원, 호주산 1만5000원. 광양읍 서천1길 52, (061)762-9250.

섬진강 따라 봄이 맛과 함께 올라온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 /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 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문인수ㆍ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시인의 귀엔 남도에 봄 오는 소리, 꽃 피고 지는 소리가 북소리로 들린다. 고수(鼓手)처럼 무겁게 앉은 지리산은 섬진강이 판소리 하듯 길게 흐르며 한 구비 틀 때마다 난타로 매화를 터뜨리고 동백을 떨어뜨린다.

동아식당 가오리찜, 야들야들 살점과 오돌오돌 물렁뼈 몇 젓가락에 막걸리 주전자 금세 동나

전남 구례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중심 도로 봉동길에 동아식당이 있다. 70년 넘는 허름한 누옥에서 장사하다 길 건너 골목 안으로 옮겨 왔다. 세든 집이 팔렸기 때문이다.

원래 동아식당은 잿빛 슬레이트 지붕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낮고 어둑한 실내에 밴 아련한 정취로 사람들을 끌었다. 거기에다 예순 중반 주모의 꾸밈없이 살가운 인심과 소박하고 푸짐한 음식이 전국에 이름났다. 대표 메뉴는 가오리찜. 하루 이틀 말린 솥뚜껑만한 가오리에 파 당근 고추를 고명으로 얹고 가장자리를 빙 둘러가며 곱게 썬 부추를 수북이 쌓았다.

야들야들한 살점, 오돌오돌한 물렁뼈 몇 젓가락에 막걸리 주전자가 금세 동난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도록 고아낸 돼지 족탕도 일품이다. 콜라겐이 걸쭉하게 섞인 우윳빛 국물에 넣어 먹는 라면도 별미다.

이 집에선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하면 여주인이 나서 말린다. 일단 한 가지를 먹어보고 시키라고 한다. 딸려 나오는 곁 음식이 워낙 푸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접시 가득 담긴 달걀 프라이가 이 집 명물이다. 달걀 네댓 개를 한꺼번에 부치고 다진 부추와 고추를 올렸다. 시골 주막 후한 인심이 덩달아 얹혔다.

씻어서 볶은 김치, 매콤한 파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콩나물무침까지 하나같이 소탈하고 친근한 집 반찬이다. 무말랭이에선 햇빛 좋은 마당에 펼쳐놓고 말리던 그 냄새가 난다. 요즘 음식점 무말랭이는 물엿 범벅이어서 젓가락이 안 가는데 고소하고 쫄깃한 게 제맛이다. 국은 멸치국물에 무를 큼직큼직 썰어 넣고 고춧가루에 소금 간을 해 끓였다. 반으로 갈라 내장 뺀 국물 멸치가 정겹다. 이 집 메뉴판엔 값이 없다. 주인이 부르는 게 값이다. 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둘이서 푸짐하게 먹고 마셔도 2만~3만원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새 가게는 환하게 넓고 여전히 손님도 많지만 마음이 허전할 수밖에 없다. 옛 낡은 가게가 지녔던 독특한 주막 분위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심 좋고 손맛 좋은 주모가 있는 한 예전처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구례축협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면 된다. (061)782-5474. ▷전체 기사 보기

5~6월 설탕소비 늘린 '매실의 여왕'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운산 중턱 16만㎡(약 5만평)가 매화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농원에선 매실 따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농원의 대표인 홍쌍리(72)씨는 챙 넓은 밀짚모자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매실을 따고 있었다. 산비탈은 경사가 너무 심해 나무 위쪽에 달린 매실을 따려면 사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작업을 해야 했다.

청매실은 너무 익으면 약효와 좋은 성분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확 적기를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6월 초부터 20일 동안 매실 따는 작업을 끝내야 한다.

 

 

홍쌍리씨가 광양 청매실농원에서 수확한 매실을 그릇에 담으며 활짝 웃고 있다. 50년 동안 산비탈을 개간해 매실 농사를 지은 그는 매실을 농축액 등 각종 먹을거리로 만들어 ‘매실 명인’이 되었다. 이 농원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매실 농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매년 3월 매화축제 때는 100만명이 찾는 관광명소다. /김영근 기자

예전에 매실은 약재(藥材)용으로 또는 술을 담그는 데 주로 쓰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초여름이 되면 매실을 설탕에 재워 매실청을 담그는 가정이 많아졌다.

홍 대표는 "예전에는 그냥 줘도 안 먹던 매실이 이젠 건강을 지켜주는 귀한 몸이 된 걸 보면 놀랍다"고 했다. 매실이 대중화되는 데는 드라마와 웰빙 열풍의 덕이 컸다. 그는 "2000년 한창 인기 있던 드라마 '허준'에서 매실로 전염병을 다스리는 장면이 나오고 웰빙 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매실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2000년 7700t이던 전국의 매실 생산량은 지난해 4만9000t으로 급증했다. 매실청 만드는 계절이 되면 설탕도 잘 팔린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매실청을 만드는 5~6월 설탕 매출이 다른 달에 비해 180% 증가했다"며 "매실 철은 1년 중 설탕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기"라고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  (0) 2016.04.14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  (0) 2016.04.13
경주  (0) 2016.03.26
해남(진도)  (0) 2016.03.22
神이 사는 숲에 봄이 움튼다  (0) 2016.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