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인간은 왜 사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을 보면서 매력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일까.

범죄소설이 늘 인기몰이를 하는 것은 범인 잡는 천재 탐정 셜록 같은 ‘정의로운’ 인물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추리소설이라는 ‘안전한 방식’으로 타인의 악의와 사악한 행동을 엿보는 은밀한 쾌락을 즐긴다. 그것은 숨기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지킬 박사의 알터에고(분신)인 하이드의 끔찍한 악행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이 저지르는 잔혹한 범죄들을 바라보면서 독자는 인간은 누구나, 그러니까 나 자신조차도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면 저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악의 충동은 인류의 집단적 그림자다. 악의 충동과 싸우는 것이 바로 수퍼에고(초자아)인데, 이 수퍼에고는 때로는 ‘지나친 간섭’으로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가로막지만, 때로는 우리가 달콤한 악행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을 꽉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말초적 충동만으로 행동하며 타인의 존재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충동사회(Impulse Society)에서 절실한 것은 바로 이 긍정적인 의미의 수퍼에고다.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화내실 거야, 이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야…. 이런 초자아의 시선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더 성숙한 인격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신의 촉매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초자아의 딜레마는 사람들이 ‘초자아의 간섭이 적을수록 나는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시선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그 시선만 없다면 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탈의 욕망을 느낀다. “저 사람 살짝 나사가 풀렸어”라고 말할 때 바로 그 ‘나사’가 수퍼에고에 가까운 것이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자신의 고향 무진에만 가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초자아 간섭 적을수록 행복해진다고 느껴
평소 나 자신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던 나사가 풀려 버리는 느낌. 특산물이라고는 희끄무레한 안개밖에 없는 이 삭막한 도시 무진에만 가면 이상하게도 윤희중은 고삐 풀린 야생마가 되어 버린다. 윤희중은 서울에서 돈 많은 아내의 비호 아래 쾌속승진을 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다. 아내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수퍼에고의 감시 속에서 제약회사의 전무 승진을 앞둔 채 그는 잠시 고향 무진으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그는 가장 출세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무진 하면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한국전쟁 당시 징집을 피해 골방에 숨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때였다. 아들을 전쟁에 총알받이로 보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강력한 의지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지만, 정작 윤희중은 ‘차라리 전쟁에 나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진은 신기하게도 모든 거짓된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자신의 그림자와 만나는 장소가 되어 간다. 그는 서울에서 깊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무진으로 간다. 그곳에서 며칠 게으르게 뒹굴고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 없이 느슨하게 풀어진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쯤이면 다시 말끔한 페르소나를 회복한다. 무진은 그에게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곳이자 모든 거짓된 페르소나를 벗어 버리는 회생과 정화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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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이 성장기를 보낸 순천

 

거짓된 페르소나 벗는 회생·정화의 공간
그런데 이 고삐 풀린 자아는 자꾸만 ‘틀린 선택’을 한다는 것이 문제다. 페르소나로부터 벗어나 ‘그림자’와 대면하며 자신의 슬픔과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윤희중은 음악선생 하인숙을 만나면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알터에고를 만나는 듯한 슬픈 착시에 빠지지만 그 만남을 자꾸만 나쁜 방향으로 끌고나간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인숙이라는 매력적인 여성과의 만남을 ‘충동적인 남녀관계’로 추락시키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각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기회가. 하지만 그 모든 기회를 윤희중은 허망하게 날려 버린다.

윤희중이 자신의 그림자와 진정으로 대면하고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첫 번째 기회. 그것은 윤희중의 후배 ‘박’이 하인숙을 남몰래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인숙의 마음은 자신에게 기울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윤희중은 박의 순수한 마음을 알면서도 하인숙의 마음을 은근슬쩍 받아주었다. 그가 하인숙을 향한 충동적인 호기심을 누르고 시골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살아가며 박탈감에 시달리는 하인숙의 고민을 지혜로운 큰오빠처럼 들어주기만 했더라면, 하인숙은 상처 입은 마음으로 무진에 홀로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윤희중이 진정한 자신의 그림자와 만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 그것은 읍내 술집 여자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윤희중은 하얀 다리를 내놓고 뻣뻣하게 굳어가는 여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그 쓸쓸한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여긴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무의식의 절박한 메시지는 우리가 밤에 꾸는 꿈뿐 아니라 외부세계에서도 도착하곤 한다. 자신과는 아무 연고도 없는 ‘자살한 여성의 시체’가 바로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에고는 예민하게 타인의 아픔을 향해 촉수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였던 그녀의 죽음이 보내는 메시지를 지나쳐 버린다. 그녀의 죽음은 어쩌면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진정한 자기(Self)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영원히 놓칠지도 모른다는 경고음 아니었을까.

윤희중이 자신의 숨은 그림자와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기회. 그것은 바로 아내로부터 전보가 왔을 때였다. 아내는 경영진과 모의하여 남편을 전무로 승진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드디어 ‘서울에 급한 회의가 있다’는 이유로 남편의 상경을 독촉한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자아를 찾아 헤매던 그의 방랑은 그저 ‘여행자의 일시적인 일탈’일 뿐이라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윤희중은 ‘전보의 눈’을 피해 하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진실한 자기’가 빼곡히 담긴 소중한 편지를 스스로의 손으로 찢어 버린다. 그는 전보의 눈, 그러니까 세속적인 자아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하인숙과 나눈 모든 사랑의 밀어들을 스스로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무진기행』은 독자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윤희중이 ‘박’을 통해 순수한 문학청년 시절의 자아를 보고, 하인숙을 통해 징집을 피해 은거하던 젊은 시절 자신의 분신을 보고, 술집 여자의 주검을 통해 절망의 끝에 다다른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모든 인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문학은 그렇게 ‘내가 가지 못한 다른 길’을 마음속으로나마 휘청거리며 걸어 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상상의 오솔길이기에.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 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