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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 호디에" 신부님의 라틴어, 청춘을 깨우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0. 31. 10:24

 "비베 호디에" 신부님의 라틴어, 청춘을 깨우다

입력 : 2015.10.31 03:00

[서강대 강의 한동일 신부]

동양인 첫 교황청 변호사 "숨쉬는 동안 희망하고 인생을 위해 공부하라"
학생들 "삶의 철학 배워"… 240석 강의실 항상 만원

지난 28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서강대 김대건관 2층의 계단식 대형 강의실에 학생들이 꽉 들어찼다. 240석을 가득 메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학생 20여명은 교탁 앞에 의자가 딸린 간이 책상을 놓고 앉았다. 교양과목 '초급 라틴어' 수업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한동일(45·교황청 로타 로마나 소속) 신부는 칠판에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란 글귀를 적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잠시 후 한 신부는 'Defectus et Meritum(데펙투스 에트 메리툼·결점과 장점)'이라고 적고선 설명을 이어갔다. "자신의 결점은 인정하지 않고 장점만 믿고 자만하면 어느 순간 그 장점이 치명적인 결점이 됩니다. 배는 강을 건너고 나면 강에 두고 가야 하는 이치입니다." 학생들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한 신부는 "여러분 중에도 가끔 배를 이고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죠?"라고 되물었다.

28일 오후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2층 강의실에서 한동일 신부가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라틴어는 배우기가 어려워 많은 대학에서 폐강 위기에 몰렸지만 한 신부의 강의는 항상 만원이다.  

 

28일 오후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2층 강의실에서 한동일 신부가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라틴어는 배우기가 어려워 많은 대학에서 폐강 위기에 몰렸지만 한 신부의 강의는 항상 만원이다. /성형주 기자

 

라틴어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 배우려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한국에서는 대여섯 개 대학 정도에서만 강의가 개설돼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최소 수강 인원이 차지 않아 폐강되기 일쑤다. 그런 라틴어를 배우겠다고 이 대학 학생들은 대형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한 신부의 강의를 듣겠다고 온 다른 대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연세대 4학년 이모(24)씨는 "한 신부님 강의는 어학 강좌라기보다 철학 강의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쳐도 영어·중국어를 배우기에도 바쁜 게 요즘 대학생들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한 신부에게 배운 라틴어가 뜻밖에 사회생활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학 때 이 수업을 들었다는 대기업 직원 한모(33)씨는 "유독 양보하지 않으려는 이탈리아 바이어와 협상을 하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때 커피 한잔을 하면서 'Do ut des(도 우트 데스·네가 주면 나도 준다)'라고 말했더니 협상이 쉽게 풀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동일 신부 수업에 등장하는 라틴어 글귀 정리 표

한 신부는 교황청 대법원(로타 로마나)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다. 동양인 중에선 처음이었다. 각국의 천주교회에서 교황청에 상소(上訴)하는 민·형사사건을 처리하는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는 지난 700년 동안 930여명밖에 없었다. 정교(政敎) 협약에 따라 유럽과 남미 등 적지 않은 천주교 국가에선 교회의 판결과 일반 법원의 판결을 동일하게 다뤄 로타 로마나의 판결은 이들 나라의 대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 셈이다.

서울 동성고 1학년 때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한 신부는 지난 2000년 부산가톨릭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교황청 라테란대학에서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신부는 교황청 사법연수원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했다. 그때 함께 공부를 시작한 40명의 사법연수원생 동기 중 3명만이 교황청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선 한 신부가 지금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때 쓰는 교수법도 그때 배운 것이라 한다. 교수와 학생이 서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이다.

한 신부는 "대학의 정신은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논 스콜래 세드 비태 디쉬무스·학교가 아니라 인 생을 위해서 공부한다)'란 세네카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취업이나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공부하란 뜻이다. "취업만 걱정하며 오늘을 의미 없이 사는 건 옳지 않아요. 'Dum spiro, spero(둠 스피로, 스페로·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 'Vive hodie!(비베 호디에·오늘을 살아라)'."